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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산
□ 때 : 2024. 09. 08(일)
□ 곳 : 버리미기재(해발 490m)~촛대봉(661m-‘푯돌’))~밀재(701m-‘푯말’)~고모령~조항산(954m-‘푯돌’)~갓바위재~시루봉 갈림길~청화산(970m-‘푯돌’)~늘재(380m-‘푯말’
□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19기-19구간
□ 참여 : 모두 23명 안팎
□ 날씨 : 햇볕, 습도 높고 바람은 아침에는 거의 불지 않았고, 09:00 이후(?)에는 곳에 따라 조금 불어 무더웠다.
□ 길 : 흙길+푸석돌길+바윗길+플라스틱 널빤지 계단길
□ 걷는 데 걸린 시간 : 2024. 09. 08(일) 03:04~15:51(12시간 47분, 쉰 시간 포함)
□ 길 푯말에서 따온 거리
○ 늘재—2.1km—청화산—4.3km—조항산—1.2km—고모재—2.5km—밀재—1.1km—대야산—1.2km—촛대봉—0.5km—불란티재—1.1km—곰넘이봉—0.9km—버리미기재(합계 : 14.9km)
□ 간추린 발자취(제 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 03:04 버리미기재(해발 약 490m) 나섬.
○ 03:18 헬기장
○ 05:05 촛대봉(661m-‘푯돌’)
○ 05:34~05:39 머묾. 뒤에 오는 대원들 도착하기를 기다림.
○ 06:38~06:49 (930.7m-‘푯돌’), 머묾.
○ 07:08~07:43 「고래바위」, 아침밥
○ 07:57 밀재(해발 701m-‘푯말’),
○ 08:09 잘루목
○ 08:17~08:24 머묾.
○ 08:53~09:00 바위. 머묾.
○ 09:18 「마귀할멈 통시바위」 갈림길,
○ 09:40~09:45 「고모령」
○ 09:47~09:51 머묾.
○ 09:55 「왕송 마을」 갈림길,
○ 10:17 「의상 저수지」 [「송면 저수지」] 갈림길,
○ 10:38~10:48 조항산(951m-‘푯돌’), 머묾.
○ 11:20~11:23 머묾.
○ 11:34~11:41 「갓바위재」(769m-‘푯말’), 머묾.
○ 11:58~12:13 머묾.
○ 12:58~13:14 머묾.
○ 13:28~13:33 머묾.
○ 14:04 「시루봉」 · 「연엽산」 갈림길.
○ 14:10~14:23 청화산(970m-‘푯돌).
○ 14:25 헬기장
○ 15:14~15:23 머묾. ※ 승승장구 님 사과.
○ 15:25 「정국 기원단」(靖國祈願壇)
○ 15:51 늘재(해발 380m-‘푯말’), 산행 끝.
중대봉이 보인다
중대봉은 대간에서 조금 비켜 나 잏다
중대봉을 오르려면 긴 밧줄을 타고 올라야 한다
뒤로 중대봉이 보인다
뒤돌아 본 대야산
고래바위
이곳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밀재
미역취
당삽주
흔히 '창출' 이라고 한다
꿩의다리
송이풀
정영엉겅퀴
바디나물
각시서덜취
동자꽃
눈빛승마
노랑투구꽃
병조희풀
'조희풀' 이라고도 한다
이름에 풀이라는 말이 들어가도 이것은 엄연한 '떨기나무'이다
조항산
조항산을 내려서 조금 앞에 있는 바위 봉우리
뒤로 중대봉 - 왼쪽 허옇게 보이는 바위 봉우리
대야산 - 뒤 가운데
뒤돌아 본 조항산
뒤로 청화산 쪽
연엽산 - 왼쪽
시루봉 - 가운데
청화산 - 오른쪽
며느리밥풀
갓바위재
뒤돌아 본 조항산
뒤 오른쪽으로는 대야산
뒤돌아 본 대야산 - 뒤 가운데
희양산이 보인다 - 맨 뒤 오른쪽 허옇게 보이는 봉우리
시루봉 갈림길
청화산
시루봉 - 가운데
정국 기원단
정국 기원단에서 바라본 속리산 주 산등성(이)
늘재
□ 줄거리(제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2024. 09. 08(일) 03:04 「버리미기재」(490m)를 나섰다.
「버리미기재」에서 14분쯤 뒤 헬기장에 닿았다.(03:18)
헬기장에서 곰넘이봉과 「미륵 바위」를 지났다.
몇 사람이 「미륵 바위」를 찍고 있었으나 나는 어두운 새벽에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2010. 8월 이 구간을 지나는 백두대간 길에 용감한 대원 한 사람이 까다로워 보이는 「미륵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대원은 뒤에 어느 산악회 산행대장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산악회에 몇 번 가서 그를 만났다.
헬기장에서 1시간 47분쯤 뒤 촛대봉(661m-‘푯돌’)에 닿았다.(05:05)
촛대봉에서 29분쯤 뒤 머물렀다.(05:34)
앞장 선 산행 대장이 “뒤에 오는 대원들 오면 같이 나서자”고 했다.
5분쯤 뒤 길을 나서(05:39) 얼마쯤 뒤 대야산 바위 구간에 들어섰다.
길을 나서 거의 1시간 쯤 뒤 대야산(930.7m-‘푯돌’)에 닿았다.(06:38)
밧줄 구간을 네댓 번 다녔던 길.
한 번은 버리미기재에서 이번처럼 대야산을 올랐고, 나머지는 대야산에서 버리미기재로 내려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밧줄 구간에 아주 굵은 밧줄이 통 길이로 걸려 있었고, 어림짐작으로 거의 50m를 넘는 90도쯤 곧추선, 직벽 구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산행기를 보았더니 직벽 구간 옆에 조금 수월한(?) 둘러 가는 구간이 있다고 했는데, 모르긴 해도 이번에 우리는 둘러 가는 구간을 따라 오른 것 같다.
앞서 촛대 바위 앞뒤와 대야산 바위+밧줄 구간에서 몇몇 남성 대원들이 다른 대원들이 쉽게, 겁내지 않고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보기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분들 노고에 손뼉을 친다.
대야산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해가 솟은 뒤였다.
날씨가 맑지 않아 조항산, 청화산은 잘 보이지 않았고, 가까이 있었던 중대봉은 잘 보였다.
11분쯤 머문 뒤 대야산을 나서(06:49) 19분쯤 뒤 「고래 바위」에 닿아(07:08) 아침밥을 먹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곳까지 들고 온 나무 지팡이를 「고래 바위」에 받쳐둔 많았으나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밥을 치르고 「고래 바위」를 나서(07:43) 14분쯤 뒤 밀재(해발 701m-‘푯말’)에 닿았다.(07:57)
밀재는 “옛날 양봉으로 꿀을 채취하던 곳”이라 하며,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를 이어주던 길이었으나 지금은 대야산을 오가는 등산객 말고는 그곳 주민들이 두 곳을 오가기 위해서는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여기까지 푯말을 참고하여 서술했음》
밀재에서 20분쯤 가다가 급한 일을 해결하느라 6분쯤 머물렀다.
그 몇 분 사이에 대원들이 다 지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다시 길을 나서(08:23) 30분쯤 뒤 속리산 쪽이 트인 바위에 닿았다.(08:53)
대원 예닐곱 명이 있었고, hong 님이 가져온 오미자(?) 즙을 받아 먹었다.
무겁게 지고 와서 베풀어 준 hong 님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날씨가 좋았으면 이곳 바위에서 속리산 칼날 같은 산등성(이) 잘 보이는 곳인데, 구름이 끼어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잠깐 쉬면서 속리산을 구경하던 곳이다.
7분쯤 머문 뒤 바위를 나서(09:00) 18분쯤 뒤 ㅣ/ 갈림길인, 「마귀할멈 통시바위」 갈림길에 닿았다.(09:18)
우리는 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왼쪽 바로 나아가면 「마귀할멈 통시바위」~「손녀마귀 통시바위」~둔덕산으로 갈 수 있다.
「마귀할멈 통시바위」는 이 갈림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2005년 6월. 삼송리~농바위~중대봉~대야산~밀재~마귀할멈 통시바위~손녀마귀 통시바위를 지나 둔덕산 50m 앞 갈림길을 거쳐 용추계곡 쪽으로 간 적 있었다.
그 뒤 2010년 9월.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9기 때는 혼자 「손녀마귀 통시바위」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적 있다.
2020년 7월. 대야산 주차장~둔덕산~손녀마귀할멈 통시바위~마귀할멈 통시바위~마당바위~고래바위~밀재~거북바위~대야산~월영대~용추폭포~대야산 주차장 구간을 걸은 적도 있다.
미리 지도를 보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귀할멈 통시바위」를 거치는 구간이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농암면을 갈라놓는 도(道) 경계이고, 백두대간 길임을 알고 「마귀할멈 통시바위」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마귀할멈 통시바위」에 갔다가 되돌아 나오지 않으면 대간 길을 잇는 길을 발견하지 못해, 대간 길을 걸으면서도 습관적으로 「마귀할멈 통시바위」를 거치지 않게 된다.
그럴 적마다 대간 길을 완전히 걷지 않고, 요령을 피운 것 같아 만족스럽지 못하고, 편법을 택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대간 길을 걷다 보면 이런 미진한 구간이 몇 군데 있다.
대표적으로 소청봉~한계령 구간과 한계령~조침령 구간을 완전히 잇지 못한다.
설악산 대청봉~희운각 대피소 대간 길을 빼먹고 소청봉을 거쳐 희운각 대피소로 돌아가는 경우이다.
몇 번의 대간길에서 대청봉~휘운각 대피소 옆 백두대간 구간, 개방되지 않는 구간을 딱 한번 제대로 걸은 일이 있다. 그 때 걸음을 위안으로 삼기도 한다.,
「마귀할멈 통시바위」에서 22분쯤 뒤 길 푯말(↑조항산 1.2km, ↓대야산, ←고모샘 10m)이 있는 「고모령」[「고모재]」에 닿아, 왼쪽 아래 있는 「고모샘」에서 빈 물병에 물을 받았다. 오랜 가뭄에도 물이 제법 나왔다.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에 빚지고 산다.
내가 여러 번 백두대간 길과 그냥 대야산을 갈 때도 이곳 「고모샘」에서 물을 받은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날은 습도가 높고 바람이 거의 없어, 빈 물병 1개에 물을 채웠다.
빈 병이 2개 있었으나 다른 대원들이 빈병 여러 개를 갖고 왔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1병만 받았다.
5분쯤 뒤 「고모령[고모재]」을 나서(09:45) 조금 가다가 급한 일을 해치웠다.
4분쯤 뒤 길을 나서(09:51) 4분쯤 뒤 길 푯말(↑조항산 1.1km, ↓고모치 0.3km, →왕송 마을 6.9km)이 있는 「왕송 마을」 갈림길에 닿았다.(09:55)
「왕송 마을」 이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2리, 「왕 소나무」가 있었던 곳을 말한다.
2019년 3월 늘재~청화산~조항산~의상저수지[송면 저수지]~「왕 소나무」 구간을 걸었다.
그 때 우람했던 왕소나는 당시 몇 해 전 벼락을 맞아 나무 뿌리가 뽑히고, 박제된 나무 등걸은 지붕 있는 시설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었다.
말없이 누워 있던 소나무를 보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왕송 마을」 갈림길에서 22분쯤 뒤 「의상 저수지[송면 저수지]」에 닿았다.(10:17)
「의상 저수지」는 어떤 지도에서는 「송면 저수지」라 적어 놓았다.
2019. 3. 3(일) 늘재~청화산~조항산~송면 저수리~「의상동 왕 소나무」~「옥양교」 구간으로 걸을 때 이 갈림길에서 「의상 저수지」 쪽으로 걸은 적이 있다.
「의상 저수지」 갈림길에서 21분쯤 뒤 조항산(951m-‘푯돌’)에 닿았다.(10:38)「」「」「」
조항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농암면 경계가 되는 산으로, 봉우리가 새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졌다”고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
10분쯤 뒤 조항산을 나섰다.(10:48)
조항산을 나서 「갓바위재」로 가는 길에는 바위 지대를 지난다.
전에 늘재~버리미기재 쪽으로 백두대간 길을 걸을 때 바위에서 내려서는 지점에 나무가 있었고, 밧줄이 없어 긴장한 적이 있었다.
눈이 내려 얼면 위험한 구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이번에는 바위를 오르게 되어 덜 위험하다고 느꼈다.
조항산을 나서 바람이 조금 부는 곳에서 3분쯤 쉰 시간을 빼면 43분쯤 뒤 「갓바위재」에 닿았다.(11:34)
「갓바위재」에서 오른쪽[거의 서쪽]으로 가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의상 저수지」[ 「송면 저수지」]로 갈 수 있고, 왼쪽[거의 동쪽]으로 가면 경북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상궁 마을」로 갈 수 있다.
7분쯤 머문 뒤 「갓바위재」를 나서(11:41) 너무 더운 나머지, 3번에 걸쳐 24분쯤 머문 시간 포함하여 무려 2시간 23분쯤 뒤 「시루봉」 · 「연엽산」 갈림길에 닿았다.(14:04)
시루봉, 연엽산은 가보고 싶은 곳이었으나 기회가 많지 않았고, 언제 그곳으로 가는 산악회가 있었으나 다른 일이 있어 가보지 못했다.
늘재~청화산~시루봉~연엽산~「농암 초등학교」 구간을 걷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갈림길은 백두대간 길과 일반 산행으로 몇 번이나 지나간 곳인데, 아무 생각 없이 시루봉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먼저 와 있던 ‘승승장구’ 님이 늘재 쪽을 가리켜 주었다.
여러 번 걸으면 무슨 소용인가? 갈 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으니...
‘승승장구’ 님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이 갈림길에서 6분쯤 뒤 청화산(970m-‘푯돌’)에 닿았다.(14:10)
청화산 푯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그 옆에 서 있는 길 푯말 하나는 글자가 떨어져 나간 채 거의 20년째 고치지 않고 있었다.
13분쯤 머문 뒤 청화산을 나서(14:23) 2분쯤 뒤 헬기장에 닿았고(14:25), 여기서 14분쯤 뒤 \| 갈림길에 닿아(14:39) 바로 나아갔다.
이 갈림길에서 35분쯤 가다가 잠깐 쉬었다.(15:14)
‘승승장구’ 님이 커다란 사과를 1개 꺼내 반으로 갈라 먹었다.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19분쯤 머문 뒤 길을 나서(15:23) 2분쯤 뒤 「정국 기원단(靖國祈願壇)」에 닿았다.(15:25)
이곳에서는 앞쪽으로 속리산 산등성(이)이 잘 보인다.
정국(靖國)은 “어지럽던 나라를 태평하게 함”《여기까지 표준 국어대사전에서 따옴》이라 한다.
’어지럽던 나라를 태평하기를 빌면서 세운 단(壇)‘인 셈인데, 백두대간 길, 늘재~청화산 사이 그곳에 세웠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라가 태평하면 좋은 일이고, 그런 뜻을 담아 푯돌을 세웠으니 고맙게 받아들인다.
「정국 기원단」에서 26분쯤 뒤 「늘재(380m-‘푯말’)에 닿아(15:51) 산행을 마쳤다.
늘재는 “낙동강과 한강 물길이 갈리는 곳”이다.
늘재에는 아주 키가 큰 ‘배두대간’ 푯돌과 성황당이 있다.
덥다는 핑계를 대며 많이 쉬었다.
집행부 수고하셨고, 대원 여러분도 고생하셨다.
‘승승장구’ 님이 사서 얼음에 쟁여둔 음료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다시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 그밖에
◎ 흘러가는 생각을 잠깐 붙들고...
백두대간을 알게 된 구간
전에 나는 어느 산에 갈 때 미리 지도를 꺼내 그날 가고자 하는 산 옆에 또 다른 산이나 봉우리가 있는지 살펴보고 하루에 한 곳에 만족하지 않고, 당일 산행에 참가한 산악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1~2곳 산을 더 가보려고 욕심을 냈다.
목요일 쯤 되면 우리 지방에 있는 신문사 두 곳 「등산 가이드」란을 열심히 보았다.
2005년 10월 초 내 눈에 청화산~조항산 두 곳을 가는 산악회가 눈에 띄었다.
내가 무리하지 않아도 산악회에서 아예 하루에 산 두 곳을 가는 것이므로 무조건 신청했다. 낙동산악회였다.
낙동산악회는 일반 산 몇 곳에 참여했던 곳이었다.
2005. 10. 9(일) 늘재~청화산~조항산~고모령 구간을 걸었다.
차에서 들은 얘기로는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이었다.
그날이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3기 18구간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반 산 위주로 다니면서 ‘백두대간’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날 이 구간에 참여한 대원들이 지친 나머지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거의 맨 앞에서 걸었던 것 같다.
그때 건방지게도 백두대간 길 걷는 사람들. 산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도 백두대간 길은 충분히 걸을 수 있겠다는 자만심이 들었다.
이 구간이 내가 백두대간 길에 처음 들어선 계기였고, 그 뒤 몇 번 백두대간을 걸었다.
그래서 청화산~조항산 구간은 잊을 수 없는 구간이다.
2. 대야산 직벽 밧줄 구간에서 벌어진 일
2007. 12. 8(토)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5기 22구간, 밤티재~늘재~청화산~조항산~대야산~버리미기재 구간을 걸었다.
당시 먼저 시작한 4기 대원이 많지 않아 5기와 많은 구간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무박 산행일 경우 금요일 밤에 출발하여 토요일에 걸었고, 5기는 처음부터 진부령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른바 ‘남진(南進)’을 했다.
그날은 12월 초순이었음에도 날씨가 추웠다.
당시 김부열 산행대장이 이끌었는데, 그는 구레나룻이 시커먼, 키가 크고, 호남형의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그가 대야산에 오른 뒤 대야산 직벽 구간 밧줄을 타고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 그가 당시 13만원인가 거금(?)을 주고 산 겨울, 등산용 가죽 장갑을 끼고 나섰다고 했다.
날씨가 매우 추운 나머지 전날 내린 비가 탈이었다.
밧줄은 팔뚝 하나쯤 되는 굵기로, 토막을 낸 밧줄을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50m 이상 되는 밧줄이 한 가닥이었다.
바위 구간에 내걸렸던 밧줄은 간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꽁꽁 얼어 있었다.
별 생각없이 밧줄을 붙잡은 김부열 대장.
그는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손을, 죽을 힘을 다해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와중에 새로 산 비싼 장갑이 얼음으로 뒤덮였던 밧줄과 마찰하면서 너덜너덜 갈래갈래 찢어졌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손전화기가 없었고, 무전기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다.
혼쭐이 난 김부열 대장이 직벽 50m 이상을 미끄러져 내린 다음 땅에 발을 딛고, 급히 무전기로 위험한 상황을 전파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갈 길이 없었으므로 대야산에 남았던 다른 대원들은 한 사람씩 밧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직벽 구간이 70m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실은 약 50m쯤 될까?
꽁꽁 얼어붙은 밧줄-줄다리기 경기할 때 쓰는 밧줄만큼 굵은, 중간에 매듭을 지을 수도 없고, 이어 붙이지 않은, 통 밧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극도의 긴장감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조심성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공포의 구간을 안전하게(?) 내려섰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이 뇌리에 생생하다.
내가 백두대간 걸을 여러 번 걸으면서 가장 무섭게 느꼈던 구간이다.
아내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당장 ‘금족령’을 내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내에게 이 위험했던 순간을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 김부열 대장은 9정맥을 꽤 오랫동안 책임지고 진행했다.
건강하고, 하는 일 잘 되기를 빈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김부열 대장 님. 같이 술 한 잔 하고 싶다.
※ 다른 사진과 글은 아래 제 블로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https://blog.naver.com/angol-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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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어연 백발
꼿꼿한 허리
커다란 배낭
앤틱한 카메라
지속적인 적바림
거침없는 발걸음
대단한 老益壯 이십니다.
이번 동행에선
저의 20년후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실상은 한참 못 미치는데, 찬양 일색이라 부끄럽습니다.
무쏘꿈 님 일행과 승승장구 님이 서로 서로 기다려주고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산에서 밀어주고 끌어주고,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도타운 정을 느꼈습니다.
멋진 우정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짧은 구간이었지만 같이 해서 즐거웠습니다.
'가을' 이란 말이 무색하게 더운 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그밖에....
다큐멘타리처럼 대야산과 김부열 대장과의 기록이 인상적입니다. 읽는 내내 제가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기로서 대간길을 마친 산꾼들이나 19기로서 대간길에 오른 산꾼들이나 모두가 자연에 감사하고 즐기는 사람들이란 말씀에 자연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자세가 내재된 듯 들립니다.
고맙습니다.
같이 걷는 길에 누군가의 배려와 돌봄, 이끎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됩니다.
참 멋진 김부열 대장 님!
언제 보아도 밝고 티 없고 학처럼 순수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알게 모르게 선한 영향을 받고 즐거운 대간 길을 걸을 수 있었지요.
좋은 분들에게 제대로 인사치레도 못하고 삽니다.
승승장구 님과 돈독한 우정. 멋집니다.
더운 날 수고하셨습니다.
사진으로 보기보다 더욱 가파른 바위구간 대야산
정상 직전 까칠한 암릉구간을 문제없이 걸었어요 19기 화려한 대원들의 빛나는 활약을 잘 읽고 보았습니다
선배님이 계시기에 앞날이 짱짱할 대간길이 기대되어요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편안함과 스스로 힘든 일을 일부러 하는 일.
누가 시키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즐거움과 보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나른할 때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지?..." 하고 자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생각합니다.
사람이 편안하고 쉬운 일을 찾다 보면 이내 게을러지고 엉뚱한 일을 하게 된다고 여기고
약해지려는 스스로를 추스릅니다.
때론 다른 이에게 짐이 되고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뒤돌아 보기도 합니다.
한여름 더위 못지 않게 습도 높고 바람이 별로 불지 않았던 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망각이란것이 정말 희한한게 힘듦은 빨리 잊어버리게 하고 좋은 기억은 오래 남아있더군요
이 힘든 대간길을 다시 걷다니~~ㅠ
이또한 지나면 좋은 기억만이 남아있겠죠?
무더운 날씨에 수고많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고 기억했던 것도 흐릿해지고,
새롭게 알거나 경험한 것은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우리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용량과
20대 후반부터 진행된다는 노화와도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어쩌면 지난 일을 잊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을지도 모르겠지요.
대간 길을 같이 걸었던 사람 가운데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는 만사 제쳐두고 지리산 이어 걷기 등에 나선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비우고 무작정 걷는다고 했습니다.
매우 똑똑하고,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했던 이야기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길선배님도 또 험한코스를 다녀오셨네요 ~~ㅎ
언제나 크고무거운 베낭에 같이 나눔할 먹거리 잔뜩챙겨오시고, 큰카메라 둘러메고 산행하시는 모습 존경스럽습니다!!
선배님을 보면서 낙동산악회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5기선배님과 19기님들이 함께해서 걷는 대간길이 정담이 느껴집니다 ~~ㅎ
더운날씨에 어려운구간 수고하셨습니다!!!
대장 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쉬엄쉬엄 산천경개 즐기면서 걷습니다.
옛 추억도 떠올리고, 들꽃이며 나무도 구경하면서...
땀을 흘릴 때는 힘들 때도 있지만 다음 날 개운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 몸이 갖는 역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러날 기색이 없는 더위. 잘 극복하고 좋은 곳 많이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역시 여러 번 대간길을 걸으셨던 관록이
여지없이 드러나 많이 배웁니다.
곰넘이봉서 이어지던 기암지대를 랜턴 불빛으로 보는 순간
아~~역시 대간길은 뭔가 한방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직벽 로프구간은 들었던 얘기들보다는
그나마 수월하여 다행였습니다.
한겨울 한길님의 그 때처럼 얼음벽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후배들과 함께 다시 걷는 걸음이
귀감으로 다가와서 항상 고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 👍 👍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일들을 회피하지 않고 헤쳐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능력이 모자라고 힘에 부치는 일이 많을지라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부딪혀 가려고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이겨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려 합니다.
남들이 보면 우스운 일이겠지만...
"It is during our darkest moments that we must focus to see the light."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어느 영어 강좌에서 우연히 들은 글귀입니다.
강사는 그 문구를 "가장 어두운 순간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빛을 보기 위해서" 라고 풀이하면서
"가장 힘들 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고 의역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감히 이런 자세를 배우고 실천하고 싶은 마음으로 좌충우돌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