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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의 치유(1)
벧전 2:9~10,2024.08.04.늘찬양교회
자존감이란 우리 자신의 영상(image)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더불어 자존감은 사고 (thoughts)와 느낌 (feeling)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좋은 자아상을 가지고 스스로를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반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서 매사에 불평과 원망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자아상 높은 자존감을 갖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긍정적일수록 우리들의 자존감은 높아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반면, 항상 부정적이면 점점 더 자존감이 떨어져 여러분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Ⅰ. 상처 입은 자존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좋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동행하며 하나님을 찬양함 속에 매일 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들의 첫 번째 자존감의 상처는 벌거벗은 육체에 대한 자화상의 상처로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 모든 것이 자유로 왔고 행복하였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나 벗은 줄 몰랐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자신의 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부끄러운 자존감을 가리기 위해 창세기 3장 7절에 기록된 대로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하지만 무화과 나뭇잎이 오래갈 리가 있습니까? 부끄러운 자존심의 부분을 무화과 앞치마로 가렸지만, 햇빛이 비취니까 금방 쪼글쪼글해지고 말라서 버석버석 부서지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노력해보지만, 그것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움으로는 온전한 자아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상처 난 자아상을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가 없어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산을 거닐면서 찾았어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널 보고 벗었다고 말하더냐? 네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죄가 들어오자 자존감의 모습은 쉽게 상처가 나고, 상처 난 자존감은 낮은 자아상과 더불어 갖가지 핑계와 원망과 저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존심이 낮아지면 사람이 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고상하지 못합니다. 욕도 막 하고 주먹질도 하고 난폭해지며 비열해집니다. 아담은 자존감이 낮아지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만들어준 그 여자가 나를 꾀므로 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자. 그 여자 책임입니다.”라며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둘러씌웠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면 어찌하든지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 때문에, 아내는 우리 남편 때문에…. 내 친구 때문에, 내 이웃 때문에…. 심지어는 대한민국 때문에….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낮은 자존감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므로 자기의 상처 난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만 허물어진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은 그렇게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대인 공포증이 생깁니다. 내 이지러진 자존심을 가지고 사람들 못 만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람들 보기가 두렵고 하나님이 무서워서 나무 뒤에 숨은 것처럼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대인 공포증이 있고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혼자 외롭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안 벗었으면 두렵지 않을 것인데….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화상을 잃어버리고 자존심이 상하면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을 숨기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변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2절로 13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느님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한 사람도 내 책임이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나쁜 자화상을 이루며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아가는 이유가 죄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온전한 자아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고 좋은 자아상을 가지고 행복으로 나가는 첫걸음인 것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Ⅱ. 대속의 십자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벌거벗은 자화상, 상처투성이인 자존감을 회복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대신 벌거벗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높은 데서 엄청나게 낮아진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과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와서 종처럼 살았으며 나중에는 범죄인 중에 가장 극악한 범죄의 탈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므로 옛날 자화상 (아담과 하와)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벌거벗은 자화상과 비천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이지러진 자기의 모습, 우리의 비천한 자존심, 깨어진 인간,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주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주님께서 이지러진 자화상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의 자존심이 극악한 죄수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상실했습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을 대신 짊어지고, 허물로 뒤덮인 인격을 자기가 담당하시고, 병든 마음과 몸을 끌어안고 저주받은 삶을 자기의 것으로 짊어지고 죽음과 멸망의 문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로 11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던 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자존심에 대한 상처가 깊을수록 사람들은 비열한 언어와 행동을 합니다. 욕을 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쌍말을 하고 부패한 말을 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기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를 찾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을 살리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군사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조롱했습니까? 채찍으로 때리고 침 뱉고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를 구원하라”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끝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행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그리고 마지막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십자가 강도의 죄를 용서하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34절) 하시며 그를 구원의 나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강도가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믿으면 주님 대속의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 많은 우리의 모습을 주님 보혈의 옷으로 다 덮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거룩한 옷, 영생의 옷을 입고. 예수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날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아름다운 자화상을 가지고 행복의 주인공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Ⅲ. 행복의 주인공
가정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자존심, 직장에서 일그러진 자존심, 이웃과의 관계에서 망가진 자존심을 가진 분들이 교회로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난 자존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회피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뜨거운 시각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는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반사적으로 여인도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회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우물가에 계셨지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물을 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상처와 원망 속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여인에게 희망과 생명과 기쁨을 주기 위하여 “물을 좀 달라”(요 4:7)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여인은 퉁명스럽게 “당신은 누구기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더구나 사마리아 남자들도 나보고 물 달라는 말하지 않는데 유대인으로써 감히 나보고 물을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웃으시면서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물을 오히려 달라고 했을 것이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속에서 솟아난 생수가 될 것이다.”(10절) 상처 난 자아상의 여인은 불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당신이 지금 날 놀리는 것입니까? 이 우물은 깊고 당신은 물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에서 물을 떠서 나에게 먹인다는 말입니까?” (11절) 예수님께서 다시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라고 말하자 놀랍게도 이 여인은 “그 물을 내게도 좀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낮에 물을 길으러 나오지도 않게 해주세요!”하고 청원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장 상처 난 자아상의 부분을 건드립니다. “물을 먹고 싶으면 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남편이요? 내 지금 남편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서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고 여섯째 남자하고 살고 있으니 남편이 없다 하는 그 말이 맞지요”, “어떻게 나를 알아요? 이제 보니까 선지자시군요.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는 예루살렘에 어떻게 우리가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지금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24절)
지금 예수님과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과의 관계에서 귀한 대화와 치료가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회피성 도피성 자아상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변화의 자아상으로 바뀌더니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려는 자아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더니만 이제는 물동이를 던지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나의 부끄러운 행적을 다 아는 이분은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 나와서 그분을 만나보라”(29절)며 소리치며 다닙니다. 대인 기피증의 상처 난 자아상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180도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여인으로 변화시켰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 난 자아상. 결혼을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섯 번째 남자와 살아가야만 하는 상처뿐인 자아상의 부끄러움을 예수님께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려놓았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으며, 예배에 대한 갈망도 비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고 낮은 자아상을 가지고 치유 받고자 또는 도피처로 찾아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와 내려놓음이 결국 사마리아 여인처럼 긍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였든지 너의 과거의 일을 내가 기억지도 아니한다. 나는 너를 위해 나의 독생자까지라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너는 내 자녀다."는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런 이후 많은 성도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망가진 자존심이 회복되고 믿음, 소망, 사랑의 꿈을 안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도전하며 나가는 변화의 주인공으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문이 밝히는 최대의 메시지는 신분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자아상의 변화, 나아가 생명의 변화, 행복의 변화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변화되어서 전에는 죄가 장악하였던 낮은 자존감 때문에 발생하였던 삶의 회피, 원망, 불평 등을 모두 떨쳐버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변화의 주인공으로 행복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변화의 축복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죄 씻음. 받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나 스스로가 나를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설득해도 사탄은 자꾸 나를 공격합니다. 내 결점을 들추어냅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이 공격에 넘어집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결점을 사탄은 낱낱이 알고 나의 양심과 율법을 통해 나를 들쑤십니다. 나의 자존심은 공격을 견딜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하는 탄식을 하며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 공격을 차단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그래 나는 결점투성이인 죄인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결점은 주님의 보혈로 가림을 받았고 나의 죄는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았고 나의 죽음은 주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바뀌었다. 나는 약하나 주님의 권세에 의지하여 나를 주장하니 내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사탄아 주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하고 명령하는 힘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런 변화의 기쁨이 무엇인지? 또 누리고 나누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간증하며 행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