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H 밀러(Elizbeth Hughes Miller 1840~1919)
환갑이 지난 나이에 아들인 "에드워드 밀러"와 내한하여 아들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자신도 연희 전문학교와 서교동 교회에서 교사와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9년 79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아들 부부의 이름도 묘비에 적어 이들이 죽을때까지 한국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듯 하나
일제에 의해 강제귀국 당하여 고향 미국에서 소천했다.
에드워드 H 밀러(Edward Hughes Miller 密義斗 1873.7.18~1966.6.6)
"엘리자베스"의 아들 "에드워드 H. 밀러"는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 루스벌에서 출생했다.
로스앤젤러스에서 "옥시덴탈 대학"(Occidental College)을 졸업(1898)하고
1901년 9월 10일 어머니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조선에서 미 북장로회 여성 선교사 "헨리"(Miller, Mattie Henry)와 결혼(1902)했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을 위한 학생교육에 진력(1905-1913)하였으며,
연희전문(연세대)에서 화학 교수와 이사로 활동(1918-1942)했다.
한편 1927년 12~ 1939년 1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서교동 장로교회 제3대 교역자(당회장)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전도부인 급여를 자비로 지원했으며, 응암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사업을 활성화했다.
교인들을 지도할 영수(領袖)와 서리집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선거를 통하여 임기제로 교인들 스스로 선임하게 했다.
교회를 치리(治理)함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격하여
성찬참여나 세례에 철저한 교육이 부족한 자는 참여 시키지 안했다.
교인들이 보다 열심히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한글을 깨우치고 더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행주 교회와 도내리교회 당회장으로도 겸직한 기록(老會錄)이 있다.
또한 제1회(1911년) 노회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산하의 경충노회와 경기노회에서
서울을 포함한 경기남부, 청주 동편, 경기 중앙시찰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공천위원, 목사장립 예식위원, 정사위원 등으로 폭 넓은 노회 활동을 했다.
이 밖에 기독교서회 이사(1934), YMCA 이사 등으로 문서 선교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같은 그의 폭 넓은 선교활동은 일본 당국자들에게 곱지 않게 보여 간첩 혐의로 투옥(1941.12.27-1942.5.26)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강제 추방되어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천로지남"(1914)과 "예수께서 구원하심"(1938) 등이 있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미국에서 조선인을 위한 조선어 방송을 담당했다.
1966년 6월 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부인 "매티 헨리 밀러"(Mattie Henry Miller 1873-1966)선교사
"헨리 밀러" 선교사는 1873년 미국 아이오아에서 출생했다.
1897년 훼어필드 파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까지 무디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1년 5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1902년 밀러(밀의두) 목사와 결혼했다.
정신 여학교 제5대(1905-1909)와 제8대(1910-1912)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에 찬송가 수 십 곡을 번역하고, 정신학교 교가(校歌)도 작사 작곡했다.
(주: 그후 정신교가는 "아담스"에 의해 바뀌고, 박목월에 의해 작사되었다)
특히 "헨리 밀러"선교사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초학지지"(初學地誌),
산수 교과서, 등을 편찬하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의 교육선교 분야에 공헌했다.
1943년 남편이 강제추방될 때 함께 귀국했다.
참고로 "밀러"(Miller)라는 이름(姓)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또 있다.
첫 번째는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 민로아:閔老雅)선교사로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Anna R.Miller 1892.11.15~1903.6.17)와
이들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Miller, Fred S)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Miller, Frank, 1902∼1902)도 출생한지 하루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묘지번호 A60)
두번째 "휴 밀러"(Hugh Miller 민휴:閔休)선교사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