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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 (눅 12:35-48)
우리는 영성을 민감하게 해야 하며, 우리의 영력을 주님의 장성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영성을 믿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영성,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성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이 사셔야 합니다. 이것이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나 죽음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쉽다면 무엇을 강조하고, 설명하고 이렇게 외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위대한 일에는 고난이 따르고 산고를 치러야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엔’ 박사님이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를 만나서 인생의 고민이 되는 여러 문제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시 많은 문제로 고민하던 헨리 나우엔 박사가 자신의 문제와 고민을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속 깊은 사정을 한 10분 정도 말씀드린 후에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테레사는 조용히 헨리를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글쎄요.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며 보내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영성의 대가라는 헨리 나우엔이 다시 영성의 대가라는 사람으로부터 두 가지 방안을 들었습니다.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면서 보내라”는 것과 “잘못인 줄 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면서 보내셔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잘못인 줄 알면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결심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옛날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로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놓고 망치와 정으로 열심히 쪼아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최고의 걸작이 된 “다비드”상을 조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한 소녀가 다가와서 여기 저기 떨어져 있는 크고 작은 돌조각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지금 이 어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소녀가 다시 미켈란젤로 앞에 다가와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돌을 두드리고 있어요?” “얘야, 이 바위는 그냥 돌덩이가 아니란다. 이 바위 안에는 천사가 들어 있어” “천사가요?” “그래요, 아저씨는 지금 잠자는 천사를 깨우는 중이야.” “왜죠?” 소녀는 신기한 듯이 대리석 조각을 쳐다보면서 물었습니다. “천사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거든.”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처럼 “나도 내 안에 있는 천사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영적인 훈련이란 우리의 마음과 인격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돌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깎여나가도록 조각의 거장이신 하나님의 손에 내어맡기고 묵묵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부분들이 더 떨어져 나가야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형상과 작품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생각과 행동들, 우리의 습관, 우리의 가치관, 자존심, 나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만심으로, 이것은 마치 대리석보다도 더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내 안에 있는 천사로 자유롭게 해주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때리시는 망치에 얻어맞으며, 필요 없는 조각들을 내어버리고, 떼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방망이로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천사가 자유롭게 날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가장 방해하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혼인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이 깨어 있는 종들에게 복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청지기에 대한 칭찬의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이 구절은 주인이 종들에게 명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라는 말은 옷을 벗지 말고, 잠자지 말고, 언제든지 민첩하게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은 주님의 종들은 항상 불을 밝히라고 합니다.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두음을 밝히고 빛을 발해야만 주인이 오시는 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허리에서 띠를 풀지 말라는 말이나 등불을 켜 들고 서 있으라는 말은 종의 철저한 준비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믿는 사람으로 졸거나 잠자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경계를 풀거나 준비성이 없으면 책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 왜 깨어 있어야만 하고, 준비하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인이신 우리 주님은 돌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큰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잠시 집을 떠나신 것이요, 당신의 소유이신 그 집을 영원히 버리시거나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눅21:27에서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막14:62에서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행1:11에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수백 번도 더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종이란 사람은 종다워야 종이지, 주인이 종을 잘 대접해서 아들과 같이 여긴다고 해도 종이 아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은 어디까지나 잘 해도 종이요, 잘 못하면 얻어맞아야 종다운 것입니다. 주인이 잔칫집에서 돌아왔는데 종이 깨어 있는데,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런 종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옛날 주인과 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를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지, 옛날이야기나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신실한 종과 같이 주인이 돌아왔다고 기침을 하면서 문을 두드릴 때면 즉시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그런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에 성도들은 깨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초저녁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오신다고 하여도 여전히 깨어 있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있다면 그런 종은 복 받을 사람입니다. 옛날 정말 고달픈 종도 있다고 안타까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옛날 종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39절에서는 종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주인과 도둑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둑을 맞는 일이 발생합니다. 정말 도둑이 어느 때에 들어올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단단히 경계하고 문단속을 잘해서 도둑맞지 않게 할 것입니다.
후암동 높은 언덕의 4층 집에 살 때에, 하루는 고난주간 저녁에 교회를 다녀왔는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사실 가져갈 것이라고는 정말 변변한 게 없었습니다. 이미 상도동 아파트에 살 때에 현관문을 간단히 열고 들어와서 값나가는 것이라고는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위임할 때에 선물로 준 행운 금 열쇠가 있었는데, 그것은 IMF 때에 국가에 헌납하고 후에 돈을 받았으니, 정말 잘 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었으면 도둑에게 좋은 일 했을 것입니다.
우리 집은 4층이었는데, 도둑이 도시가스관을 타고 올라왔는데, 베란다의 알루미늄 새시 천장을 타고 뒤쪽에 있는 창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언제 도둑이 들어온다고 알았다고 하면 방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가스관에 예리한 칼날을 설치하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간단합니다. 언제 들어온다고 해도 이제는 방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둑의 예를 들면서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을 예로 들어 거북한 느낌을 들지만, 예기치 않은 시간에 들이닥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아니, 이렇게 과학문명이 발달된 시대인데, 아니 이렇게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대를 사는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론이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먼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경륜에 맞추어 생각해야지 나의 이 좁다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청지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도 종들 중의 한 사람이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라고 하여도 주인이 아니고, 주인에게 있어서는 한 사람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이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이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신실하지 않은 종입니다. 주인이 올 때에 청지기라고 하는 자가 남녀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옛날 노아의 때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도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자기들 말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라고 하셨습니다.
사데교회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의 하나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신실하지 않은 종이 받을 벌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하였다면 그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하셨습니다.
48절의 하반절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님, 제가 보기에는 집사님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많이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목사님이 집사님만 불렀으니, 나는 아니구나 하지 마시고, 우리는 다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사실 생각해보면 많이 받은 종이요, 많이 맡은 종입니다. 우리 주님이 많이 달라고 하신다는 말씀에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정신 차릴 때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 맡기고 주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지난주간에는 헨리 나우엔 박사의 “영성수업”이란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려면 어리석은 삶에서 순종하는 경청으로 옮겨가려는 씨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교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싶습니까? 영성수업은 어느 한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성자가 되거나 이제는 다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순수하고 진실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성이 되고, 능력으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하려면, 어리석은 삶에서 순종하는 경청으로 옮겨가려는 씨름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을 연구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귀머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데, 어리석은 인생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많은 사업과 활동들, 이미 그를 독차지 하고 있는 많은 관심사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소음으로 인해서 침묵 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적은 소리도 있는데, 우리는 큰 소리를 듣는데 익숙하다보니 아예 세미한 음성에는 우선 관심도 없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40일을 금식기도하면서 세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세미한 음성을 나팔소리와 같이 들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도 내려놓고, 나의 경험도 접고, 나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이 내 안에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생명이요, 나의 전부가 되십니다.
영성이란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내 안에서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요, 하나님의 종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나의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유지하면서 성령에 충만하고 말씀에 충만하고, 기도에 영력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