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의 고고한 삶이 깃든 필암서원//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소수․도동․병산․도산 서원과 남도 장성의 필암서원이 있다. 필암서원은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위치한 호남 최고의 서원으로 손꼽힌다. 이 서원은 김인후(1510~1560)와 그의 사위로서 학통을 이은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1523~1594)을 배향한다. 대체로 서원은 배향 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연고지에 세워지기 마련인데, 필암서원은 하서의 서당에서 사당을 갖추어 서원으로 발전한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선비들은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90년(선조23) 장성 기산리에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받들어 모셨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때 왜군의 방화로 불타자 제자들이 황룡면 증산동에 서원을 복원한데 이어 ‘필암’으로 사액되었다. 현재의 필암서원은 1672년(현종13) 수해의 우려가 있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이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서 제외된 호남 유일의 서원일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서원의 건물 구성과 공간의 꾸밈새를 이루고 있어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필암서원의 건물 구성 선비다운 검소한 가치관이 잘 반영되어 특별한 꾸밈이 없으면서도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형미가 돋보인다. 필암서원 앞에는 필암천이 흐르고, 뒤에는 낮은 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있어 우선 공부하기에 매우 아늑했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춘 유학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본래 서원은 교육시설로서의 재실과 강당, 제향 시설로서의 사당으로 배치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은 17세기 이후에 제향 시설 중심으로 건축되고, 19세기에 이르면 사당과 강당으로 구성되는 단순한 형태의 구조로 변화된다. 그러나 서원의 배치는 앞쪽에 교육 시설을, 뒤쪽에 제향시설을 마련하는 전학후묘가 일반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필암서원도 강당과 사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고, 경장각․전사청․장서각․장판각 등으로 구성된다. 물론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대지의 높낮이에 따른 위계성은 없으나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그 일축선상에 주요 건물을 배치하여 그 축선에 따라 더해지는 공간의 깊이가 잘 드러난다. 더구나 서원의 공간 구성은 네모진 방형의 담장으로 서로 엄격하게 구획되었으나 크고 작은 문들과 건물형태가 각 공간을 유기적으로 잘 연결시켜 준다. 우선 필암서원은 신성한 사묘(祠廟)의 구역임을 알려주는 홍살문을 들어서면 확연루(廓然樓)가 나타나는데 그 편액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씨이다.
외삼문(外三門)으로 불리우는데, 그러나 확연루 같은 누각이란 본래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고, 시회(詩會)를 베푸는 훌륭한 장소로도 활용된다. 이 확연루는 앞․옆면 3간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로서 진리 추구의 엄정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확연루 앞에는 윤봉구(尹鳳九,1681~1767) 글씨의 ‘필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앞면 5간과 옆면 3간의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이 있다.
강당은 학문을 연구 토론하는 건물로 서원 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데, 보통 대청 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된다. 이렇게 강학 건물을 향교에서는 명륜당(明倫堂)이라고 하지만 서원은 각기 다르다. 강당 뒤에는 원생들이 기거하는 재실이 있다. 강당을 향해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동재․서재라고 부르는데, 필암서원에는 각각 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판의 명칭은 곧 교육 목표를 나타내는데, 이들 현판 명칭에는 충절․도의․명절(名節)을 고고하게 지향한 유학적 실천적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들 재실은 보통 강당 앞에 대칭으로 배치한 것과는 달리
인조가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소장되어 있다. 경장각은 서책이나 이를 찍어낸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다른 서원에서는 장판각․서고로도 불리우지만 필암서원에는 장판각(아래의 사진)이 따로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의 장판각에는 하서의 문집 목판이 소장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현재 인종의 ‘어필묵죽도(御筆墨竹圖)[사진]’와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69점의 고문서, ≪하서집(河西集)≫ 등 1,3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보관된≪노비보(奴婢譜)≫ ≪원장선생안(院長先生案)≫등의 보물 고문서들은 필암서원의 내력과 당시의 서원 교육,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인 우동사(祐東祠)가 있다. 앞면 3간, 옆면 1간 반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김인후․양자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본래 사당이란 선현의 위패․영정을 모신 곳으로 봄․가을로 제사지낸다. 이 제향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그 달의 일진(日辰)에서 중간에 있는 정일(丁日)인 중정일(中丁日)에 행한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체인묘(體仁廟)는 ‘묘’로 지칭했다. 본래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하지만 후에 다시 받들 선현이 생기면 추가로 배향했으며, 양자징도 1786년(정조10)에서야 모셨다.
이러한 구조를 지닌 필암서원 구석구석엔 김인후의 고결한 사상과 이를 몸소 실천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현판의 확연(廓然)․청절(淸節)․진덕(進德)․숭의(崇義) 같은 명칭에서 그가 추구하고, 제자들에게 깨우쳐 주려고 했던 정신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힘들이지 않고도 깨친다. 남도정신의 뿌리 하서 김인후 이 곳 장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그는 1540년(중종 35)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등제(登第)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등용된 후 부수찬(副修撰)에 이르렀다. 그 후 인종의 지우(知友)로서 사랑을 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령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이후에는 장성에 귀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진력하고, 누차 조정에서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은 선비들의 귀감이 되어 성균관 문묘에 모셔진 호남 유일의 한국 18현인 중의 하나로 추앙 받았다. 사림은 16세기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훈구파(勳舊派)와의 오랜 투쟁 끝에 선조때 우뚝 선 선비들을 말하며, 이들이 전개한 정치를 붕당정치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대체로 충신(忠信)과 도의, 명절을 토대로 지치주의(至治主義)와 이학(理學) 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한 사류들이었다. 이들 사림들의 정통은 흔히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로 이해된다. 김인후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때 이 곳 남도의 동복에 유배된 최산두(崔山斗,1483~1536)에게서 배웠다. 바로 최산두는 1500년(연산군6) 순천에 유배된 김굉필에게서 배운 사림이었다. 또한 그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1493~1583)과 김안국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을 연마하고, 이항(李恒)․기대승(奇大升) 등과 교류하면서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1530~1593)과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양자징(梁子徵) 등을 비롯한 숱한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제 필암서원은 2003년에 대대적인 단장 끝에 더욱 새로운 사적지의 모습으로 선보인다.
한국유학의 지평을 확장한 김인후 마음에 깃들어 있으므로 마음을 바르고 참되게 하는 ‘경(敬)’을 추구해야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와 ‘기’를 분리하지 않고 인식하면서도 태극(太極)을 ‘도(道)’로 보고, 음양을 ‘기’로 이해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는 “대개 ‘이’와 ‘기’는 혼합되어 천지간에 가득 찬 것들은 ‘이’와 ‘기’에서 생하지 않는 것이 없고 각각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와 ‘기’의 구분은 한계가 없을 수 없으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다. 주자는 태극의 음양을 타는(乘) 것이 마치 사람이 말(馬)을 타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천지간에 ‘이’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여 ‘이’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 ‘이’는 ‘기’에 비하면, ‘이’는 영원하여 하루도 없는 날이 없고 조금도 없는 곳이 없지만 ‘기’는 영원하지 못하다”고 하여 ‘이’의 절대․영원성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와 ‘기’의 상관에서 천지 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한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이기일원론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선학(禪學)에도 반대하였다. 그는 불교가 돈오를 중시하여 인학(仁學)으로서의 유학을 해친다고 보았으므로 양명학의 시초를 이루는 중국 송나라의 육상산(陸象山)과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의 학설도 반대하였다. 이처럼 그는 퇴계 이황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학설에 순정(純正)했으며 그 외의 학설에 대해서는 이학(異學)․이단(異端)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기에 그의 사상은 주자의 성경설을 좇아 우주 만물에 일관하는 ‘성’은 천리로서 마음에 깃들어 있으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경’을 추구해야 성인이 된다고 보았다. 천성(天性)과 본연을 보존하고 물욕(物欲)과 인욕(人欲)의 해(害)를 밝히는데 있다고 보아 그 책들을 윤리 도덕의 기본 교과서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립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성리학의 근본의(根本義)에 더욱 천명하여 ‘성경’ 연구에 치중한 성격을 지닌다. 아마 이같은 사상은 그가 현실적 정치적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향리에서 한평생 고결하게 살면서 ‘성경’의 실천을 도모케 한 비결이었다.
자연을 벗삼아 진리를 탐구한 필암서원 김인후는 호남사림의, 남도의 정신적 뿌리로 추앙된다. 이들은 조선 중종때 이래 김인후․기대승․이항 등으로 차츰 학맥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나 선조 이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제각기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특히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로 불리우는 정여립(鄭汝立,?~1589) 모반사건이 터지면서 호남사림 중에서 동인계에 속하는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중앙 정계만이 아니라 대체로 나주 이남은 동인으로 그 이북은 서인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따라서 이들 사림들의 학통 계보가 서로 중복되고, 남도의 동서 분화로 남도정신의 뿌리를 찾기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따라서 오늘날도 대체로 호남사림은 기호사림(畿湖士林)의 범주에서 호칭되거나 이해된다. 이는 학맥으로 볼 때 율곡 이이(1536~1584)에게 가깝고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의 영향이 있었으며, 기호지방이 경기․호서지역을 지칭하면서도 지리적으로 ‘호(湖)’라는 의미를 호남지방까지 연결하는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김인후가 생존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짐작되듯이 그 붕당에 관계없이 학문적으로 교류하여 남도사림의 분화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더구나 그의 학문과 성리학적인 삶의 실천은 남도의 지역성을 뛰어넘어 당대 사림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그때 세속의 때를 씻어 버리고 청결한 몸가짐을 가지려고 이렇게 읊었었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라도 절로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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