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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와 속죄의 성당 및 민족화해센터- 북한지역 순교자들을 위하여 |
설립배경과 목적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2013년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한반도에 전쟁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도할 수 있도록 세워진 성당이다. 남북 화해와 일치, 사회적 갈등 해소, 그리고 민족의 평화정착을 기원하며 세워진 이 성당이 북한 지역 순교자들을 위한 순례지로 선포됨에 따라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등 북녘 땅의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 운동도 활성화될 전망이다.
선포 미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인 2018년 6월 25일 오전 11시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와 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북녘의 순교자들을 위한 순례지가 선포되는 것은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이다.
북녘 땅이 바로 보이는 임진강 자락에 자리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동·서 냉전 시기 독일인들이 매주 모여 기도를 바쳤던 성 니콜라이 교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고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을 모방 복원했고, 민속화해센터는 함경남도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성당을 재현했다.
민족화해센터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하고, 지난 잘못을 참회하며, 그 길을 모색하고 준비하기 위해 지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1월 1일 세계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평화를 위해서 무엇보다 전제되는 것이 '형제애'"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사명은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드리는 일이다. 동시에 적대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달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며, 또 상처받고 굶주린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이다.
민족화해센터 및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이러한 목적으로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평화의 사도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도터이며 상설 연구 교육시설이다.
신암리 성당을 출발하여 11시 30분경 참회와 속죄 성당 정문에 도착. 비가 내리고 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
성당 2층 전면 벽에 걸린 예수님 상은 러시아에서 구한 상본을 모자이크화하여 예수님께서 슬라브어로 요한복음 17장 11-12절 말씀을 펼쳐 보이시는 모습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성당 로비에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 소개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몇 컷을 보면 다음과 같다.
로비에는 이밖에도 수녀님들의 축일 달력, 성화 김대건 신부상, 어느 신자가 개관을 기념하여 붓으로 마태오복음 전사(全寫)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당 내부
성당 제단 벽면 반원형 모자이크화(평화의 예수님상과 제자)는 남한 작가들의 밑그림에 북한 평양 만수대창작예술단 소속 작가 7명이 완성했다. 예수님의 오른편에는 성 우세용, 성녀 고순이, 성녀 김효주, 성녀 김효임이며 왼편에는 성 유정률, 성 정하상, 성 김대건, 성 유대철이다.
반원형 모자이크화 아래에는 십자고상이 있고 그 좌우에 예수님의 제자와 천사상이 배열되어 있다.
좌 회랑 앞에는 바실리카(대성전) 급에 설치하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봉헌자 명단도 았다. 부근 감실에 북한 교회에 보내려던 김대건 신부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이 김대건 안드레아의 유해는 평양교구 진남포 본당 출신 고 걍덕배 요한 신부(1936-2012)가 북한에 모시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전 효임 볼롬바 수녀의 가족이 이 유해를 모시고 있다가 의정부 교구에 봉헌하여 1021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기헌 베드로 주교가 안치하였다. 현재의 유해대는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의 도안과 참회와 속죄의 성당 교우들의 정성으로 봉헌되었다.
십자가의 길 - 14처는 모두 이콘(성화)으로 제작하고 한옥 성당에 어울리도록 한식 창호로 테두리를 하였다.
이콘(icon)은 원래 그리스어로 형상이나 모상을 뜻하며, 예수님, 성모님, 성인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소재로 그린 성화를 지칭한다. 이콘은 1054년 동서가 분열되기 전부터 함께 공유해왔으나 서방교회는 민족별 시대별 변화를 수용한 반면, 동방교회는 옛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글 모르는 사람이나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려는 의도에서 도입된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십자가 이외의 상징물을 우상 숭배라고 비판하지만, 이콘 자체에 대한 경의가 아닌 묘사된 주인공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기에 우상 숭배와 차별된다.
성당 내부 뒤편에는 왼쪽에 덕원 성 베네딕토 수도원관 성당, 그리고 오른편엔 평양 대동문과 주교좌 성당 그림이 있고 그 좌우 양단에 덕원 함흥교구 보니파시오 사우머 주교와 평양교구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의 모습이 있다.
민족화해센터
성당 오른 편에 있으며 나지막한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민족화해센터는 오른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감도 참조) 로비에는 여러 유형의 성모님들이 있다.
▲ 한반도 평화의 성모자상
한반도 평화의 모자상은 심순화 화백의 작이다. 평화의 모후인신 성모님은 참평화이신 아기 예수님을 안고 남한과 북한 가운데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아기예수님은 한반도의 구원의 빛을 담은 지구의를 들고 있다.
꽃은 천국의 꽃이며 평화의 꽃이다. 뿌리는 하나이면서 가지는 두 개인 남한과 북한의 나뭇가지는 서로 화해하면서 하나가 되어 평화의 꽃을 피우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우리의 기도이다. 7마리의 비둘기와 묵주 역시 우리들의 기도이다. 7운 7천만 우리 민족이요 7성사의 숫자이다.
▲메리놀의 성모님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1월 6일에 M.J 로저스(1882~1955)가 설립한 미국 최초의 외방선교 수녀회. 1924년 한국에 들어왔다. 부산 메리놀 벼병원, 용산 막달레나 집(매춘여성 보호시설)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메리놀(Maryknoll)이란 말 자체가 성모마리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라방의 성모님, 알퇴팅의 성모님
라방은 베트남의 깊은 산림지대의 명칭의 하나이며 언덕 위에 피는 한 송이 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박해시대 베트남 신자들은 이곳에 은신처를 마련하였으며 정글의 맹수, 질병,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묵주기도를 바치며 신앙을 지켰다. 이후 약 200년간 여러 번 발현하시며 희망을 주셨다. 한반도와 비슷한 역사를 가졌기에 한반도의 평화를 전구해 주시리라 믿는다.
독일 알퇴팅은 바이에른 주에 속한 오랜 역사의 신앙의 도시이다. 알퇴팅의 성모님은 블랜 마돈나(검은 성모님)이라고도 부르며 병자, 위험이나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로 유명하다. 이 성모상에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곤경이 사리진다고 한다. 한반도의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 민족회해 센타 순례지 겔러리에는 두 가지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하나가는 함흥교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 사진전인데 지금으로선 보기 어려운 자료들이라 관심 있게 지켜봤다.
덕원교구의 원명은 덕원수도차치구이다. 덕원교구는 함경도를 관할하던 원산대목구가 분리되면서 설립되었다.1922년 조선 대목구(현 서울대교구의 전신)에서 대구 대목구(현 대구대교구의 전신)와 원산(元山) 대목구를 분리시켜 이미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파견된 성 베네딕토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함경남북도와 만주 북간도(北間島) 지방의 선교 활동을 담당하게 하여 덕원교구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자치교구장은 보니파시오 주교이다.
1949년 5월 10일 북한이 폐쇄한 후부터 성직자와 수도자, 소속 신자들이 없는 이른바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현재까지 북한에 위치한 ‘침묵의 교회’에 속하는 교구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가 있으며, 평양교구장 서리는 서울대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는 춘천교구장이, 덕원자치수도원구 교구장 서리는 왜관수도원장이 맡고 있다.
공산당에 의한 순교자들, 신상원 보나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하느님의 종은 현재 시복 절차 중이다.
마당으로 나오니 성모동산의 인자하신 성모상, 예수 성심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12시 20분.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끝으로 의정부 교구 순례는 끝이 났다. 이제 강화도로 간다. 이곳 파주에서 강화도까지 아무리 건너 뛸 정도로 가깝다고 해도 버스로 한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진무영 순교성지 - 병인양요의 현장이 천주교도 순교처가 되다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643(강화 성당 내)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1
진무영이란 어떤 곳인가
강화도는 섬이라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외부 적에 대한 방어가 용이했다. 이런 이유로 고려시대 때는 강화도가 40년 간 임시수도가 되어 대몽항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에도 국왕이나 왕실 사람들이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몽진을 한 실례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조선왕조실록이나 선원각 보물들, 그리고 중요한 국가 기록물이 보관되기도 했다.
이런 자취가 지금도 강화도에 많이 남아있다.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라든가. 정족산성이나 사고지라든가 기타 방어시설과 유물들은 약간만 주위를 둘러보면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는 노천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은 경주 남산에 버금가는 유적지이다.
진무영(鎭撫營)은 숙종 4년(1678년) 강화도에 창설한 군영(軍營)이었다. 이러한 방어체제를 구축한 이유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강화도는 서울과 가까워 물길로 아침에 떠나면 해 질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해도와 삼남(三南) 지역을 연계하는 수로와 한강 하류가 연계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도는 일찍부터 중요한 군사 방어기지로 간주되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17세기 초, 청나라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강화도의 군사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강화도는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국왕 일가와 조정의 신하들이 피난할 수 있는 지역인 보장처(保障處)로 지정되었고, 행정 단위도 유수부(留守府, 유수는 종2품관)로 승격되었다. 유수부는 한양의 동 · 서 · 남 · 북인 강화 · 개성 · 수원 · 광주(廣州)에 설치한 관아다. 그리고 비상시, 경기 · 황해 · 충청 · 전라도의 연안 읍들이 강화 유수부를 중심으로 군병과 군량을 지원한다는 해안 방어 체제의 기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는 인조(仁祖) 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정비되었고, 그의 일환으로 진무영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강화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인 경기도와 황해도 연안 읍을 통솔하는 하나의 해안 방어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진무영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방어 체제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청나라와 조선의 긴장 관계가 완화된 것이 한 원인이었다. 또한, 국방정책도 비상시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를 사수하는 도성 수비론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강화 유수부의 전략적 기능은 서해안 지역의 요충지 정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무영의 군사 활동도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그런데 진무영의 기능이 다시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866년에 발발한 병인양요였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데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점령하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 금은괴(金銀塊) 등을 약탈했다. 그러나 11월 9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했고, 이를 계기로 11월 11일 강화도로부터 철수했다. 이처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가 손쉽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중앙 및 각 지방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러한 가운데 진무영도 다시금 해안을 지키는 최대의 해방(海防) 기지로 정비되었다.
한편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던 신자들을 총융진(總戎陣)이 있던 양화진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진무영에서도 신자들이 많이 처형되었다.
진무영의 순교자들
진무영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로는 1868년 5월(음) 장치선(張致善) · 최인서(崔仁瑞, 다른 이름 최영준) 이었다. 이들의 죄목을 알기 위해서는 승정원일기가 도움이 된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지금 우포도청이 보고한 바를 보니, ‘사학(邪學) 죄인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은 양인(洋人)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의 진상을 모두 자복했다’고 합니다. 치밀하게 일을 꾸며 화응한 죄는 흉악하고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천지간에 이보다 심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5월 22일).
장치선과 최인서의 죄목은 ‘서양인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이었다.
장치선(張致善, 1830-1868)은 성 장주기(요셉)의 조카로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세례명도 분명히 지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가 만나보지 않은 선교사가 없었으니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주교.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리델, 칼레, 페롱, 오메트르, 볼리외, 위앵,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을 경향 각처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체포되어 1868년 4월 18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하게 하고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여 침략하게 하며 국내의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교인이었기 때문에 연루자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7월 13일 강화도에서 최인서와 함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최인서(崔仁瑞, 1811-1868)는 일명 영준(英俊).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의 권유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처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토마스), 정의배(마르코), 최형(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초 병인박해가 일어났으며,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에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음)에 장치선, 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1867년 10월(음)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음) 박순집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장치선과 최영준(요한)은 리델 신부를 보호하여 지켰으며 박해상황을 프랑스 당국에 알려 선교사와 교우들을 보호하고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 그들은 당시 포도청 문초에서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인 흉악하고 패역한 일’로 규정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에서 보았듯 왕조시대에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다는 것은 어떠한 명분이나 이유로도 합당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반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황사영 사건 당시 조선 천주교 지도부조차도 황사영의 과도한 행위로 인정되어서 이에 대한 해명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이 이유에서일까 황사영은 조선 교회에 크나큰 활동을 했지만 시복 시성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5월 22일(음) 진무영에서 효수되었다. 진무영으로 보내 처형한 이유는 강화도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양화진과 같이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강화도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진무영 순교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순교하였다. 박 서방은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박순집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그들의 유해 보존에도 큰 공을 세운 이였다. 하지만 박 서방의 신앙생활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 서방도 마찬가지다. 조 서방은 조 참봉(參奉)의 부친이고, 나이가 50여 세라는 점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최인서와 함께 잡혔다는 점을 볼 때, 최인서와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성지 조성 과정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성지가 조성되어 있지만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1976년 강화문화원에서 간행한 “강화사”(江華史)에는 강화 농협이 있던 자리로 추정했다. 성지 연구가인 한종오(베드로)도 문헌과 구전을 근거로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재는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다.
진무영 성지가 조성된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2004년 강화 본당은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고 9월 15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성지의 모습은 소박하다. 옆의 일반 주택과의 경계에 담을 두르고 제대와 십자고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대 뒤에는 반원형 장식물을 세웠다. 같은 해 9월 20일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성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세웠다. 현재 인천교구에서는 진무영 성지에 대한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진무영 성지를 찾으려면 강화 읍내 중심가에서 북쪽에 있는 고려궁지를 먼저 찾는 것이 좋다. 고려궁지(考慮宮址)는 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터이다. 궁지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한옥으로 유명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궁지로 가는 오르막길 오른쪽에는 역사가 오랜 강화초등학교가 있고, 그 맞은편에 천주교 강화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제대와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진무영 순교성지이다.
내리는 비로 도로가 젖어있는 길을 올라 강화성당에 도착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제대 후벽에는 예수님 고상 좌우에 그리스도왕과 성모님의 유리화가 있고 벽면 좌우에는 성모님고 성 요셉의 조각상이 걸렸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특이하게도 양 벽에 따로 모아져 있었다.
성당 뜰에 나오면 성 가정상과 성모동산의 성모상, 그리고 그리스도 왕 예수님 상을 만나 볼 수가 있다.
큼직한 건물이 나오는데 그리스도 교육관이다. 이 안에 지하 대강당, 사제관, 식당, 성물방, 회의실 등이 들어있는 다목적 건물이다. 바로 앞에 사무실이 있다.
진무영 성지는 계단 아래 낮은 곳에 있다. 성지라고 해야 2004년에 세운 순교성지 안내판, 십자가 조각품, 옥외 제대와 십자고상 가톨릭 농민 사목비뿐이다.
십자가 조각상에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이 시작된 곳이라는 교구에서 세운 비가 있다. 1968년 삼도직물공장 직원 해고 사건이 일어나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대표 김수환 신부와 주교단의 성명이 발표되는 등 노동계와 정치적 갈등이 유발되었다. 이 비는 이곳이 가톨리노동청년회가 있었던 곳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이듬해 김수환은 47세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벌써 오후 2시. 다음은 일만위 순교성지가 순서인데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서 점심부터 먹기로 한다. 성지에서 바로 내려가서 들어갈 만한 식당이 쉽게 나오지 않아 황소 곱창이라는 식당에 가서 곱창 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에 택시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