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7. 구산선문 개창 이전의 ‘신라禪宗’
혁명적 선사상 9C초에도 발 못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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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림사 입구 전경> |
사진설명: 중국의 선은 520년경 갈대 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에 정착한 천축 출신의 눈 큰 사문 보리달마와 함께 시작된다. 사진은 소림사 입구 산문 모습. |
역사적으로 중국불교는 우리나라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전래에서부터,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본류를 이루는 ‘선(禪)의 전파’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러했다. 해동의 수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배우고 귀국, 해동의 사상적 밑거름을 풍부하게 했다. 게다가 유학승들이 갖고 온 각종 선진문물은 우리나라 고대, 중세국가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일조했다. 선사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9세기 중후반 통일신라 곳곳에 개창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전환기에 필요한 적절한 사상적 대안을 제시했다.〈조사선의 실천과 사상〉(김태완 지음. 장경각 펴냄) 등에 의하면 중국의 선은 520년경 갈대 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에 정착한, 천축 출신의 눈 큰 사문 보리달마와 함께 시작된다. 보리달마에서 시작된 선은 혜가, 승찬, 도신, 홍인스님을 거쳐 육조 혜능스님(638~713)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적인 선’으로 만개된다.
달마대사에서 혜능스님까지의 이 시기는 “선이 능가종, 동산종, 우두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듯, 인물에 따라 다양한 종파의 활동이 펼쳐지며 인도선의 중국화를 모색하던 때”(김태완)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의 중국화를 이룬 인물이 혜능스님이었다. “혜능스님의 선은 문인인 하택신회(670~762)에 의해 크게 선양됐고, 마조도일(709~788), 석두희천(700~790)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혜능스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인 하택신회 선사는 732년 활대(滑臺)에서 열린 무차법회를 통해 “홍인대사의 법을 이은 신수선사, 신수스님의 법을 이은 보적선사의 선을 북종선”이라며 “북종선은 점교(漸敎)로 방계(傍系)고, 돈오법인 혜능대사의 남종선이 달마 이래의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선의 본질에 있어 북종은 점차적인 방편법 즉 점수법(漸修法)이고, 반면 달마 이래의 남종선은 방편으로서의 단계적인 수행인 좌선관행을 택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견성하는 돈오법(頓悟法)”이라며 신수스님 계열을 공박했다.
하택선사가 ‘활대의 종론’과 낙양 하택사(荷澤寺)에서 북종선을 공격하며 혜능대사의 남종선을 선양하는 사이, 양자강 남쪽의 강서와 호남 지방에서는 혜능대사의 선을 계승, 발전시키는 움직임이 조용하지만 성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강서의 마조도일 문중과 호남의 석두희천 문중이 그들인데, 마조선사에게 혜능대사의 선을 전한 스님은 남악회양(677~744), 석두선사에게 혜능대사의 선법을 전한 인물이 청원행사(?~740)였다. 마조선사와 그 문하는 활동지역의 이름을 따 ‘홍주종’으로, 석두선사와 문하는 ‘석두종’으로도 불리는데, 이 때 비로소 본격적 중국 선인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마조선사와 석두선사의 문하에서 몇 대가 지나 10세기 중반이 되면 석두계에서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마조계에서 임제종, 위앙종이 파생돼 ‘오가(五家)’가 성립된다. 100년 뒤인 11세기 중반,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가 갈라져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되는데, 이 즈음 선은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중국 선 ‘오가칠종’으로 분파, 발전
오가칠종 이후 점차 쇠퇴하던 선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어지는 것은 12세기 중반. 임제종 계통의 대혜종고(1089~1163)스님이 간화선을 주창하고, 조동종 계열의 굉지정각(1091~1157)스님이 묵조선을 선양하자, 중국 선종은 새롭게 변모된다. 그러다 원나라 이후 선종은 점차 선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치(禪敎一致), 선과 정토사상을 융합한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종합불교를 지향하다, 거대한 족적을 불교사에 남긴 채 사라져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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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스님이 성주산문을 개창한 충남 보령 성주사지 전경. |
중국 선의 흐름 속에서 해동에도 선법(禪法)을 갖고 온 스님이 있었으니, 법랑(法朗)선사가 그였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법랑선사는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선사(580~651)의 법을 이었다. 호북성 기주 황매현 쌍봉산에 거주하던 도신선사는 교단을 집단화시켰으며, 우두선(牛頭禪)이라는 분파를 최초로 파생시키는 등 선종 발전에 전기를 마련한 선사. 법랑선사는 도신선사의 비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시됐던 인물, 때문에 “선사의 귀국은 신라 선종 발전에 큰 계기가 됐을 것”(서울대 최병헌 교수)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법랑선사가 전하려던 새로운 불교는 당시 신라 불교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사는 은거하고 말았다.
법랑선사의 자취가 사라질 즈음인 성덕왕대(702~736) 지리산 화개곡의 삼법화상, 백률사의 대비선사, 김유신의 부인이자 영묘사 스님인 비구니 법정스님, 미륵사 규정스님 등이 우리나라 선과 관련돼 사서(史書)에 이름이 나온다. 헌덕왕 이전 신라 선 성립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북종선을 신라에 처음 도입한 신행선사(神行. 704~779)가 바로 그다. 김헌정이 찬(撰)한 ‘단속사신행선사비’에 따르면 신행선사는 호거산에 은거하고 있던 법랑선사에게 3년간 선법을 배웠다. 법랑선사가 입적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신수선사(?~706)를 이은 보적선사의 문인 지공(志空)선사의 관정수기(灌頂授記)를 받고 귀국, 지리산 단속사에서 혜공왕 15년(779)에 입적했다. 신행선사가 입적하자 북종선의 법맥은 끊어지고 말았지만, 신행선사의 법맥은 혜은(慧隱)선사를 거쳐 지증대사 도헌(道憲)스님의 희양산문 개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선행선사의 한국선종사상 위치는 높다고 아니 할 수 없다.
7세기 말 8세기 초 ‘선 전래’와 관련해 반드시 기억해야 될 스님이 한 분 있는데, 고구려 출신의 지덕(智德)스님이 바로 그다. 돈황에서 발견된, 중국 정각(淨覺)스님이 지은 〈능가사자기〉(최근 도서출판 운주사에서 번역됨)에 인용된 현이스님의 ‘능가인법지’와 〈역대법보기〉 등에 의하면 지덕스님은 혜능, 신수스님 등과 더불어 홍인대사의 11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병칭될 만큼 비중 있는 스님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덕스님의 전기와 관련해 전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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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선사의 법을 이은 법랑선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
법랑선사 신행선사 등과 더불어 신라 선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바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나오는 무상선사(無相. 680~762)와 상산 혜각(慧覺)선사다. 성덕왕의 세 번째 왕자였던 무상선사는 성덕왕 27년(728)년 입당, 홍인선사의 제자였던 지신선사(609~702)의 제자 처적선사(處寂. 648~734)의 선풍을 이어받아 정중사의 주지가 됐다. 유명한 마조도일 선사가 한 때 그 밑에 있을 정도로 스님의 선풍은 대단했다. 무상선사의 동생이 경덕왕으로 등극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선사는 끝내 귀국하지는 못했다. 상산 혜각선사 또한 귀국하지는 못했지만, 최치원은 ‘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선사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선사의 자세한 전기가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법랑, 신행선사 초기 신라선 발전에 큰 기여
이처럼 우리나라 남종선의 초조(初祖)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종조(宗祖)인 도의국사가 귀국하던 헌덕왕 13년(821) 이전에도 선종은 지속적으로 중국에서 신라로 수입되고 있었다. 신라 스님들이 단순히 수입에만 그친 것은 아니고, 무상선사 등의 경우에서 보듯, 중국선의 성립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일파(一派)의 개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중국에서의 활동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계와 그 때 그 때 연결돼 후일의 한국선종 수립에 극히 주요한 의미를 갖는 것”(서울대 최병헌 교수)으로 평가된다. 최치원도 이점을 알았기에 선사들의 비문에 중국서 활동하던 신라 스님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던 것이리라.
중국에서의 이러한 활동에서 불구하고, 헌덕왕 이전의 신라에선 독자적인 선종 종파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의 선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독자적인 종파로 발전할 수 없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고대국가의 지배자인 왕실이나 귀족세력에 사회적 기반을 두고 있던 화엄이나 계율 등의 교학불교가 풍미”(최병헌 교수)하고 있었던 게 가장 컸다.
정치사상적인 면에서도, 왕실의 전제권이 유지되던 신라 중대(무열왕, 선덕왕) “개개인의 특성을 강조하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분권적인 사고는 발 디딜 물적(物的)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중앙집중화가 약해지고 지방 분권화가 힘을 받던 신라 하대가 돼야만, 선종이 비로소 기지개를 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라 헌덕왕 이전에 귀국한 선사들은 “마어(魔語)를 퍼뜨린다”는 등의 비난을 받고 불우하게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안 입당(入唐) 유학승들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통일신라 말의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남악회양 문하 마조도일의 고제(高弟) 서당지장선사의 심인을 얻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귀국한 도의선사와 홍척선사가 나타나면서, 신라 선종은 비로소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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