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주영동지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며]
더 이상 죽을 수 없다! 하루 24시간 활동보조를 보장하라!
우리는 오늘 소중한 동지를 잃었다.
10월26일 새벽2시경,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주택에서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불은 10분 만에 꺼졌지만 오직 한 사람, 혼자서 전동휠체어에 앉을 수 없어 밖으로 나오지 못한 34세의 뇌성마비 중증장애여성 김주영동지만 화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난 밤 11시경 그녀를 방에 눕혀드리고 집을 나온 활동보조인이 그녀가 마지막 만난 사람이었고, 불이 난 사실을 알고 신고한 119구조전화가 그녀가 세상과 했던 마지막 소통이었다.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에게 활동보조 생활시간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싸워왔던 그녀는, 결국 활동보조가 없는 상황에서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그녀의 싸움이 승리해서 다른 나라들이 수십년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활동보조가 하루24시간 필요한 사람에게 24시간 보장이 되었더라면, 그녀는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쉽게 대피하여 이와 같은 참변은 충분히, 너무도 당연히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너무도 억울하게 너무도 처참하게 죽었다.
다시는 故김주영동지와 같은 억울한 죽음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다시는 장애등급제 따위의 악법으로 권리를 잃고, 자립생활의 꿈을 잃고, 목숨을 잃는 비극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강력히 요구한다.
필요한 사람에게 하루 24시간 활동보조를 보장하라!
활동보조 대폭축소 계획을 중단하고, 확대계획을 마련하라!
장애등급제 폐지하고, 대상제한 폐지하라!
본인부담금 폐지하고, 활동보조를 권리로 보장하라!
<장애해방운동가 고 김주영동지 장례준비위원회>가 바로 오늘(10/26) 결성되었습니다. 장례준비위원회에서는 장애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투쟁한 고 김주영동지의 생전의 뜻을 기리고, 그녀를 추모하고자 아래와 같이 장례일정을 갖고자 합니다.
<장애해방운동가 故 김주영동지 장례일정>
■ 빈 소 :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층 10호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7. T.02-2290-9442)
■ 입관식 : 2012년 10월 29일(월) 오후3시, 장례식장
■ 추모식 : 2012년 10월 29일(월) 오후3시,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 건물 앞
■ 발 인 : 2012년 10월 30일 오전 9시30분
■ 장례식 : 2012년 10월 30일 오전 11시, 광화문 광장 (노제 후 복지부로 이동하여 복지부규탄 기자회견 예정)
■ 이후 벽제화장터로 이동하여 2시에 화장. 광명시납골공원에 안치 예정.
또한 “고 김주영동지 장례위원”을 모집하여 가시는 고인의 길에 함께 하고자 합니다.
이에 많은 동지들이 함께 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애해방운동가 故 김주영동지 장례위원 모집>
■ 공동장례위원장(10만원) 모집 :
현재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최진영(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홍세화(진보신당 대표) 외
■ 장례위원(개인(1만원) 및 단체(3만원)) 모집
■ 계좌 : 박경석 국민은행 031601-04-005802 (입금시 장례위원 및 단체명 넣어주세요)
■ 마감 : 2012년 10월 29일(월) 밤 12시까지
■ 연락처 : 장례위원 명단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메일 : sadd@hanmail.net) 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문의 : 김지영 010-7156-8337
장애해방운동가김주영동지의 삶
장애를 갖고 세상에 태어나다
1979년 6월 14일, 전남 담양의 한 가정에서 2녀 1남중 장녀로, 그리고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자립의 꿈을 키우다
1988년 2월 삼육재활학교 고등부를 졸업하였지만, 세상에서 그녀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차별은 오히려 그녀의 꿈을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2004년 정보처리전공 학사자격을 취득하고, 2005년에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화센터를 통해 직장체험 연수에도 참가하였다.
그녀가 세상에 들려준 자립생활 이야기
2005년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이야기를 다룬 작품 ‘외출 혹은 탈출’을 연출하여 KBS1TV 열린채널에 방송이 되고, 그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수여하는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2006년 1월부터 2007년 9월까지 영상운동단체 <다큐인>에서 상근자로서 활동을 하고, 해마다 <장애인권영화제> 스텝으로도 활동하였고, 2006년 10월부터 2007년 9월까지 RTV에서 방영된 ‘나는 장애인이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녀의 삶과 투쟁
2005년, 당시 활동보조 제도조차 없었던 환경에서 그녀는 가족의 짐이 되는 삶도 시설에서 한평생을 보호받는 삶도 거부하고 목숨을 건 자립생활을 시작했다.혼자서는 살림은 물론, 식사나 용변, 옷갈아입고 휠체어에서 내리기도 어려운 중증의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누구보다 활동보조인의 절실함을 알았던 그녀였기에, 2006년부터 시작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가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제도화 뿐이 아니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투쟁, 장애인이동권 투쟁, 장애등급제 폐지투쟁, 부양의무제 폐지투쟁까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함께 장애인권운동의 맨 앞에서 그녀는 온몸을 내던져 투쟁했다.
자립생활운동가 김주영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서울 성동구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립생활운동가로서 상근활동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동료상담, 활동보조파견, 자립생활정보제공 등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2007년 3월, 한양사이버대학에 편입하여 2009년 2월에 전자계산학 전공 학사자격을 취득하고, 2011년 3월에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다시 한양사이버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자신의 역량강화에도 치열했다.광주시 <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가를 모집한다는 제안을 받자, 혼자서 광주시에 내려가 1년간 상근활동을 할 정도로 그녀의 삶은 물러섬이 없었다.광주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다시 2009년 11월부터 2012년 8월, 최근까지 다시 서울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을 하였다.
못다한 자립생활의 꿈
그녀와 동지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2007년부터 활동보조제도가 시행되었고, 첫해 한달 최대80시간, 다음해 한달 최대100시간, 나중에는 독거장애인 특례로 한달 최대 180시간을 받게 되었다.
고작 하루 6시간으로는 생존조차 위태로왔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립생활을 꾸려나가며 운동을 했
다. 서울시를 상대로 추가지원 투쟁을 했고, 그 결과 지난해부터는 한달 360시간, 하루12시간 꼴로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지역의 장애인보다 나은 환경이라고는 하지만, 24시간 활동보조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의 자립생활은 여전히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녀의 죽음
2012년 10월 26일 새벽, 활동보조가 없어 화재에 대피하지 못하고 방안에서 숨졌다.
그녀 나이 34세. 그녀와 함께 나왔어야 할 전동휠체어와 못다한 자립생활의 꿈들을 남긴 채 치열했던 삶과 투쟁을 마치고 영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