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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가 없는 날이면 너를 만난다 원문보기 글쓴이: 노옥분
2017년 12월 31일, 서파에서 오르다
백두산 인문기행을 위해 용정에서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길림성만 해도 우리나라 두 배의 면적이라니 곳곳에서 대륙의 면모를 실감한다. 무엇보다 지역 간 이동거리가 만만찮다. 윤동주시인 탄생100주년기념 좌담회를 마친 용정에서 이도백하까지 3시간 30여분을 달려 도착했다.
정유년의 마지막 날, 전용버스로 서파 산문에 도착한 후 백두산 전용 환보셔틀로 갈아탔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백두산보다 금강대협곡을 먼저 탐방했다. 천지의 용암이 분출해 형성된 금강대협곡의 장엄함 앞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스마트폰셔트를 눌러댔다. 끝없이 이어진 협곡과 눈의 조화가 위용 넘치는 거대한 산수화를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겨울나무의 맨몸에는 자연이 새긴 갖가지 설치작품들이 탐방객의 눈과 마음을 붙든다.
“딱 두 가지만 묻지 마십쇼. 그게 뭐냐면, 백두산의 날씨와 동식물이름이라는 말입니다.” 연길 교포총각 가이드의 너스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문제없을 것 같은 날씨인데도 천지의 속내는 알 수가 없었다. 금강대협곡을 먼저 찾은 이유도 그랬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탐방불가여서 포기했던 날씨가 그새 길을 연 모양이다. 일행들은 한 치 망설임 없이 점심을 미루고 백두산행을 택했다.
서파에서 천지로 오르는 길에는 1442개의 계단이 있다, 하지만 한겨울엔 계단 대신 스노우모빌을 타고 조.중5호경계비가 있는 주차장까지 간다. 스노우모빌은 운전자 외 두 명이 탑승할 수 있는 스쿠터 모양의 오픈카이다. 눈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야 하고, 아슬아슬 위태로운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달려야하니 체면 따윈 생각할 틈이 없다. 운전자가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하듯 힘껏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꿈속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감개무량, 감격, 감동, 감사... 세상의 감탄사를 다 끌어다 모아도 모자란다. 영하 25도라고는 하나 바람이 없으니 전혀 춥지 않다. 순백의 면사포를 쓴 순결한 새색시로 천지가 우리를 반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설경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삼 대가 복을 지어야 겨우 만날 수 있다던 백두산 천지! 네 번째 방문에 겨울천지를 처음 만났다는 K방송국 박PD의 상기된 얼굴빛도 특종이다.
기쁨에 들떠 사진을 찍다가 바람보다 날카로운 중국공안의 제재를 받았다. 중국.조선이 등댄 표지석을 의식하지 못한 탓이다. 한 발짝이라도 더 우리 땅에 닿고자 했던 간절함이 자석에 끌리듯 자꾸 선 밖을 넘보게 된다. 비석처럼 선 경계석과 새끼손가락 굵기의 줄 하나가 국경이란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어찌 저리도 허술할까. 장백의 촘촘한 발자국들과, 들짐승의 흔적조차 없는 한 뼘 거리 백두의 침묵에 훅~ 슬픔이 드리운다. 건너편 동파의 북한군 초소로부터 천지까지 뻗은 계곡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만이 밭은기침으로 기척을 한다. 물리적 경계보다 더 선명한 동편의 고요가 경계를 실감케 한다.
2018년 1월 1일, 북파로 오르다
무술년, 황금개의 해가 밝았다. 이도백하 ‘王朝聖地호텔’에서 바라본 세상이 참으로 정갈하다. 밤새 내린 눈 때문이다. 오늘은 북파다. 어제 등정의 피로는 호텔 안 최상급 온천에서 즐긴 온천(+야외온천)욕으로 말끔히 날려 보냈다. 날씨가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바람의 매섭기가 마치 시어머니 서슬 같다. 변화무쌍한 천지와의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새해맞이를 위해 백두산으로 향했다. 늘씬한 키의 피부미인 자작나무가 배꼽인사로 사람을 반긴다.
슬픔이 차갑고 무릎이 시리다
백두 중산간 자작나무들
흰 살결로 말을 걸어온다
아무도 슬픔의 절정에 오를 수 없다고
슬픔이 가득한 눈길 바라보라고
순간이 힘겨운 슬픔의 절정이라고
-시 ‘백두산 편지.1’ 전문
이번에는 지프차로 천문봉(2,670m) 주차장까지 올랐다. 운 좋게 앞좌석에 앉아 휘몰아치는 눈바람의 기세를 적나라하게 감상한다. 체인도 하지 않은 차가 잘도 달린다. 특수 스노우타이어의 위력이란다. 거침없이 정상을 박차오르는 지프차와, 망나니의 칼춤을 춰대며 길을 막아서는 눈바람과의 결투도 신난다.
새해 첫 날, 북파로 향하는 길은 중국관광객들로 이미 북새통이다. 귀를 막아야 될 만큼 대화는 시끄러웠지만 그들의 공휴일 여흥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영하 30도에다 칼바람을 더하니 체감온도가 영하 40도쯤 된다는 안내원이 귀띔에 감각이 혼미하다. 따뜻한 남쪽, 부산 사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혹한이다. 주최 측의 안내대로 겨울 백두산행 준비물을 꼼꼼히 잘 챙기다보니 한기는 견딜만했다. 하지만 손은 달랐다. 장갑 끝에 카메라를 작동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나 벗지 않고는 한 컷의 사진도 얻을 수가 없었다. 장갑이 눈바람에 꽁꽁 언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 다시 볼지 모를 백두산 천지의 겨울을 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天池’ 돌판 앞은 인증샷을 남기기 위한 행렬로 인산인해다. 그날따라 일행들 대부분이 나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이유가 있다. 전날 서파에서 찍은 백두산 천지 사진콘테스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천지의 혹한은 살갗을 노리고 섰다가 내가 장갑을 벗는 순간 수천 개의 바늘로 변신해 인정사정없이 찔러댄다. 아~ 내 손 손 손…(내가 이럴려고 사진을 잘 찍었었나.ㅎ)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참 아름다운 보시였다.
천지를 보기 위해 거치는 산의 초입에 장백폭포가 있다. 천지의 배수구라 일 년 내내 얼지 않으며, 한여름에도 폭포 아래는 지난겨울의 눈이 남아있다고 한다. 68m의 장대한 폭포가 90도 수직으로 암벽을 때리며 떨어지는 물의 낙차가 용이 오르는 것 같다하여 비룡폭로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방이 눈천지인데 폭포로부터 이어진 계곡의 물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눈앞에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꼭 먹어야 할 것이 있다. 유황온천수에서 삶아낸 계란과 옥수수이다. 보통의 삶은 계란과는 달리 온천수에서는 노른자위부터 익다보니 흰자가 덜 익은 상태로 판매를 한다. 방한복 위에다 허연 흔적 하나 남겼지만 추위 속에서 먹는 계란의 맛이라니. 내리 두 번이나 만남을 허락한 겨울 백두산 천지의 기억은 평생 회자될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조국의 땅을 두고 돌고 돌아 남의 나라로 오르는 슬픔은 어찌할꼬!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언제쯤 백두산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천지를 만날 수 있을까.
남과 북이
서로 기쁜 마음, 그대로
어깨를 얼싸안고 얼어붙어 있거라
봄바람이 불어오거나
사랑이 식어도 멀어지지 말고
자자손손 동서남북
내 핏속
삼지연 고원 대평원
금강대협곡 비룡폭포가 되어
눈•비•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침묵의 노래로라도
너희가 풍성하여라
다시는 다시는
나를 찾아와
평화를 기도하지 않도록
백두와 한라가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는 그날이
그 나라가 오게 되리라
-시 ‘백두산 천지’ 전문
첫댓글 백두산에서의 뜻 깊은 새해맞이. 덕분에 겨울의 백두산을 즐감합니다. 사진도 쵝오!
감사합니다. 멤버들이 좋아 여행이 더욱 좋았습니다.
겨울 천지를 두 번이나 만나는 행운까지요^^
이곳에서라도 자주 뵙겠습니다. 설명절 잘 쇠십시오!
백두산아, 어쩌다 장백산이 되었니. 슬픈 현실.
뿐만 아닙니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명동촌에 가면 더 슬픕니다.
중국시인이 돼 있으니까요. 애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