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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김다윗목사/낮아지지 않으면 낮추신다 (욥 22:29)
겸손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며 동시에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면적으로 요구하시는 것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겸손이란 사람에게 보이는 겸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낮아져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 겸양이나 또는 백화점 등의 서비스 업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습득된 고객들에 대한 친절함은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겸손이 아니며 수단을 위한 가장된 겸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의 겉 행동만을 보고 겸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겉 행동대로 속 마음도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 행동대로 속 마음도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겉 행동은 교만한 것처럼 보여도 속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은데 속 마음은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동만 가지고 사람의 겸손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겸손은 남을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자기의 눈을 낮추고 자기 마음이 낮아진 겸손을 말합니다.
그러면 눈을 낮추고 마음으로 낮아지는 겸손, 하나님께 합당한 겸손은 무엇입니까?
첫째, 이것을 습득하려면 스스로 자기를 철저히 낮추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 훈련이란 우선 자기의 실존적 자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실존적 자아라는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로 인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거듭나지 못한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적 자아는 그 태생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후패’라는 말은 ‘썩어 문드러진다.’는 말입니다.
속사람에는 관심이 없고 겉 사람만 꾸미려고 하면 결국은 썩어 문드러져 멸망당합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만 꾸미는 사람은 실존적 자아를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에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 거듭나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인간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거듭난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날로 새롭다’는 말은 믿음의 행복과 영혼의 기쁨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삶을 통해 낮아지는 겸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기 실체인 속사람, 자기의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자기 속사람 영혼을 통해서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실제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이 육체는 땅에 묻히면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예수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후에 살아있는 자들이 들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부활하는 사람들이나 살아서 들림 받는 사람들이나 모두 육체 그대로 들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5:51~54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그랬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들의 썩어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 육체가 모여져서 영체로 변화되어 들림 받는 것이고, 살아있는 자들은 그 육체가 홀연히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들림 받는 것입니다.
육체 자체는 영혼과 함께 영체로 변화되는 것이고 들림 받는 영체, 그것은 곧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실체는 그의 영혼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몸이 어떤 화학적 작용을 거쳐서 영체로 변화되는지 그건 모릅니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판명하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떻튼 우리의 육체는 주님 재림하실 때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도 역시 우리의 영과 함께 구원 받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고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의 권세는 우리 주님의 이김의 권세에게 삼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영혼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때 영혼만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이 육체가 변화하여 들림 받는 것처럼 불신자가 지옥에 떨어질 때도 영혼과 육체가 함께 떨어집니다.
마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이 말씀에서 주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신다’ 그랬습니다.
영혼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같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감각을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진정한 자아를 지칭할 때 항상 ‘내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진정한 구원은 육체의 구원이 아닌 영혼의 구원임을 시종 강조하고 있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사람은 자기의 영혼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기 인식에 집중합니다.
영혼의 내면은 마음의 심연으로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만납니다.
양심 역시도 그 곳 한 부분에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도 큰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 곳 성령의 탄식과 비탄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마음의 심연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온갖 다양한 세속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얻는 재미나 쾌락 때문에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요일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과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란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자이며 또한 인간 실존적 자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더 사랑하고 그리고 나서 세상을 즐기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렇게 우선순위의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동시에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으면 세상을 사랑하여서 세상으로 나가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든가 둘 중 택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24에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는데, 왜 여기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했을까요?
하나님도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세상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과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구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쾌락적 차원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사랑입니다.
세상이 멋지고 세상이 좋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화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쾌락과 욕심, 탐심, 정욕을 가지고 세상이 멋지다, 세상이 재미있다, 세상이 좋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속사람인 영혼보다는 겉 사람에 치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고 간구하며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속사람의 실체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기 속사람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는 영혼의 내면에까지 들어갈 수 없고 거기에서 들리는 음성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혼 내면의 심연의 소리는 실패와 좌절, 낙망하는 가운데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삶의 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잘 들려옵니다.
그렇다고 거지들이나 노숙하는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잘 듣고 실존적 자아를 깨닫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실존적 자아를 찾으려고 인생을 늘 절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돈이 많은 부자나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나 모두 그 심령 상태에 달린 문제입니다.
돈이 많거나 가난한 것은 그저 상대적인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자라는 개념은 물질적인 부자와 정신적인 부자라는 두 개념이 있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부자는 이 두 개념을 모두 내포합니다.
정신적인 부자는 돈은 없어도 자신의 정신세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을 갖고 이런 정신세계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영적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겠지만, 그것이 아닌 단순히 인간의 철학적 정신세계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도 물질적 부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부자들은 모두 절망과 좌절, 실패한 비참한 삶의 처지를 경험하지 못함으로 영혼의 속사람을 들여다 볼 기회가 가난한 자보다는 적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부자도 자수성가한 부자이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자이냐에 따라 그 태도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부자는 돈이 많으므로 돈을 바라보며 살고, 허영과 사치스러운 삶을 살다보면 자기의 실체인 영혼과는 거리가 멀게 되고, 마음의 심연의 탄식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 비참함과 처절한 슬픔, 실패와 좌절의 혹독한 절망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고 심연의 소리, 성령의 탄식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번지르르한 외적 모양의 껍데기만 입고 있다면...
그렇다면 삶의 고통과 아픔, 처절한 패배의 절망을 뼈저리게 느낄 때, 저 아래 마음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탄식을 들으며 진정한 겸손의 낮아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진정한 낮아짐의 훈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알려면 자아 중심의 세계관에서 이타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막12:31에서 주님은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곧, 이웃은 곧 내 몸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이웃, 즉 타인을 나와는 다른 이질적 존재로 보고 취급하는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오늘날의 세계 모든 인류는 태초에 한 사람이었던 아담에게서 나온 후손들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세계 인구 65억의 인류는 서로 다른 점만 제외한 서로의 공통점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똑같은 뼈와 똑같은 육체를 갖는 것, 같은 색깔의 피를 가졌고, 같은 육체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차원을 놓고 볼 때,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른 것,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것, 이런 것은 그리 큰 이질적 요소는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과 아담의 후손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의미를 통해 한 가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나와 다른 이질적 존재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타인은 곧 ‘또 다른 나’라는 생각으로 남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이 지구상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퍼져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우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지구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 살아남은 몇 몇 사람들이 생존해 가는 것을 그린 영화를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드넓은 지구에 단 몇 몇 사람들만 살아남은 세계는 얼마나 외롭고 황량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영화는 비록 현실이 아니지만, 그런 영화를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지구에는 인류가 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편만하게 퍼져 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외롭지 않도록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의도, 그 배려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세계를 지구촌이라 부르는 것도 어쩌면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구라는 한 마을에 사는 이웃, 아니면 지구라는 한 집에 사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는 자아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타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갈등과 대립은 자아 중심의 세계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자아 중심의 세계관은 모든 것 중에 자기의 필요를 가장 우선시 합니다.
자아 중심적 세계관 때문에 독재자가 철권통치를 하지요.
자아 중심적 세계관 때문에 반인륜적 폭력 테러가 발생하지요.
이러한 자아 중심적 세계관 때문에 도둑, 강도, 사기 범죄 행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 중심적 세계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유혈 사태가 발생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 사고가 결국 따지고 보면 자아 중심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아 중심적 태도를 비판하는 이 말은 자신감마저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아 중심적 성향은 독선적인 것이지만 자기 자신감은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요 세상의 중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그 중심에 계시지 않는 세계관이에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아 중심적 세계관은 실상은 자기를 잘 모르는 세계관입니다.
자기가 자신 스스로에게 빠져 있으니 자아를 되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되돌아 볼 수 있을 때 자기를 잃지 않게 되고 남을 돌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이타 중심의 세계관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타 중심의 세계관은 나보다는 남이 우선인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세계관이 이타 중심의 세계관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자아 중심적 세계관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며 언젠가는 자아 중심적 세계관으로 살다가 실패와 낭패를 겪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을 되돌아 볼 때가 올 것입니다.
셋째로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알려면 자기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며, 기도를 통해 탄식과 속죄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5:4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인가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위로는 괴로움이 아니요, 위로는 고통이 아니요, 위로는 형벌이 아니요, 위로는 나쁜 것이 아니요, 위로는 지옥이 아닙니다.
위로라는 것은 따뜻한 것이요, 위로는 평안한 것이요, 위로는 기쁨이요, 위로는 행복이요, 위로는 좋은 것이며, 위로의 종착지, 위로의 종점은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는 인간이 주는 위로와 질적 양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영원한 천국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영원한 기업을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냥 인간이 주는 위로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기대치가 높지 않을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인간의 위로와 비교할 수가 없는 위로입니다.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인간의 문화와 인간의 잣대, 인간의 생각과 인간 이성으로 비교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인간 생각으로 제한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너무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우리가 살아서 움직이는 생동력은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큰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우주 가운데 있는 태양계를 자연 원리로만 해석하고 과학적인 근거로만 따지고 듭니다.
그러나 실제로 태양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가 원만하게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 공간에 달랑 지구 하나만 만들어 놓았다면 우주에서 날아오는 모든 천체들을 막아줄 방패가 없어 지구는 우주의 천체들과 충돌하여 벌써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계라는 거대한 방패는 우주로부터 날아드는 모든 천체들로부터 지구를 감싸줌으로 말미암아 충돌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위대한 보호 시스템인 것입니다.
또한 지구나 태양계 말고도 드넓은 광대한 우주가 결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태양계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고안하여 만드신 인간의 삶의 터전이고, 드넓고 광대한 우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광대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증거입니다.
우주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광대하심을 깨달으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과 끝없이 광활한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주가 생겨났는지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우주는 전적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거울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위대하시고 광대하시고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인간의 얄팍한 생각에서 나오는 가치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자연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 몰라서 믿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은 어떤 구원 방법이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 못 받았다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롬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랬습니다.
시90:10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는데, 사람이 70년 혹은 80년을 이 땅에서 살면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만 보아도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 존재를 찾고 구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70~80년 살아가면서 초월적인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랬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였든 어느 곳이었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고 자연숭배로 만든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구원의 방편을 보내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곧 존귀에 처할지라도 짐승으로 전락하여 멸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에 감격하고 감동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영혼의 갈급함을 갖게 됩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고픈 것처럼 사람이라면 영적인 세계를 갈구하고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으셨던 구약시대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방인들 중에도 구원 받기로 예정 된 사람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일이 몰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은 어느 세대에든 어느 누구이든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고 그 이전 모든 인류를 다 멸망에 빠지도록 방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의 갈급함을 갖는 사람에게라야 구원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아무리 자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다 해도 사람이 짐승같이 깨닫지 못하고 그 손을 잡지 않으면 결국은 멸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눈물 흘려 애통하고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울음이 없는 사람은 현재 영혼의 갈급함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필요를 갈급해 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합니다.
이러한 눈물은 마음을 씻는 세척제이며 교만과 죄악에 찌든 영혼을 씻고 닦아내어 맑고 투명한 영혼으로 만드는 세례인 것입니다.
그 눈물을 통해 참되고 진실 된 자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진정한 겸손은 마음이 정결하게 씻겨 지고 영혼이 맑고 깨끗하게 정화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애통해 한다는 의미는 실제적인 눈물이 아닌 마음의 애통으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으로도 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통해 하는 자의 마음이요 겸손한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현재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며 탄식과 속죄의 요구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의 겸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며 조속히 영혼의 갈급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실존적 자아를 깨달아 낮아질 것과, 자아 중심 세계관에서 이타 중심의 세계관으로 나아갈 것과, 영혼의 갈급함을 가지고 탄식과 속죄의 눈물을 흘리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마음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징계와 채찍과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