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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장우목사/에봇과 흉패 (출 28:1-29)
상당히 복잡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양재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골치 아프고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좀 쉬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왜 이런 복잡한 말씀들을 읽어서 짜증스럽게 하는 거야? 이런 느낌이 없습니까? 혹시 그런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까봐서 그런 마음은 있지만 참고 있습니까? 참지 말고 그냥 짜증난다고 해 보시기바랍니다. 참는다고 짜증스러운 것이 은혜롭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짜증난다고 하면 하나님께 벌 받을 까 두렵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믿음 없다고 할까봐서 못하기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짜증나는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나서 찢어버리고 싶은 말씀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다 화나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객이 전도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한 이후로 이 관계가 거꾸로 되어 있다고 착각하며 살도록 마귀가 조장하고 있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교육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근본이라는 정신이 발현된 정치체제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런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를 괴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다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하는 프로그램에서 형이 동생을 괴롭히고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대책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조금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딸은 어머니 탓을 합니다. 아동 전문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은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하여 폐위된 왕이라고 합니다. 왕위가 찬탈이 되었기에 동생이 자기의 것을 만지면 사수하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때리고 침 뱉고 발로 차고 고함을 지르고 난리입니다.
이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무언가 달라졌습니까?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른이 되면 살아남아야 하기에 눈치가 생긴 것입니다. 속으로는 죽을 정도로 싫지만 상사에게 아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퇴근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한잔 하면서 상사 씹기로 안주를 대신하는 것이 서민들의 세상살이가 아닙니까? 이런 세상에서 교회에 오면 무언가 포근하고 평안한 위로도 되고, 이렇게 힘들게 교회로 나왔으니 세상에서 복도 준다고 해야 다닐 맛이라고 나는데 이상한 성경이나 읽어놓고 그것을 가지고 죄를 말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 여기 앉으신 여러분은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나가고야 마십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의 복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분을 보다가 한번 씩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성막을 만들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 곳에서나 만나시면 안 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인이 아무 곳에서나 만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제사장의 중재 하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막이 필요하고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마땅하다는 죄인임을 안다면 성막을 만드는 것도 제사장의 복장이 까다로운 것도 다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텐데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만사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기에 거룩한 장소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거룩한 시간으로 안식일을 허락하십니다. 이런 거룩한 안식일과 성막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이 되었기에 지금은 다른 거룩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시대는 예수 안에서 안식과 거룩함이 다 주어집니다.
이것을 제사장의 복장에서 보려고 합니다. 제사장의 복장은 4절을 봅니다.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가 됩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만들고 착용하는지를 2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에봇과 흉패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에봇이라고 하면 주로 제사장의 겉옷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짭니다. 전체 제사장의 복장은 거룩하고 영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이 에봇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에봇과 붙여 짜게 합니다. 이 어깨 받이에 무엇을 메다는가 하면 호마노 두 개를 양 어깨에 달아서 나이 순서대로 한 보석에 여섯씩 이름을 도장 새기듯이 새겨서 매답니다.
제사장의 어깨에 열두지파의 이름이 달려 있다는 것은 제사장의 어깨에 열두지파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상징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 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고 감사제와 서원제의 모든 제사를 드릴 때에 이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한 사람만 제대로 잘 하면 백성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백성 전체가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잘못된 제사를 드린 제사장이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28:1절을 봅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자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데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합니다. 레위기 10:1-7절을 봅니다. “봉독” 9장에서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응답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이 분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불이 나와 죽임을 당합니다.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아 나갔기에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3절입니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과 나타내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신다고 하십니다. 아론은 자기 아들 둘이 죽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여러분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에게 슬픔을 표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래야 죽음을 면하고 온 회중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분향하는데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았다고 죽임을 당하고 그 죽임 당한 자 때문에 가족이라고 울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도 못하게 합니다. 다만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하도록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무슨 신약의 무슨 말씀이 떠오릅니까? 다른 불이 담았다고 이렇게 혹독한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갑자기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 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입니다. “봉독” 사도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복음과 참 복음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조차 마케팅 원리가 도입이 되어 고객을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고객을 졸도시켜야 한다고 두 날개 양육을 말하는 목사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게 하는데도 잘 용납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기에 용납을 합니다. 사람의 행위에 가치를 두고 사람의 자존심을 높여주면 좋아합니다. 정성 바쳐 복 받자는 것이 먹힙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어느 정도로 악질인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다고 하는 복음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앞서서 가시면서 모델을 보여 줄 테니 따라오라는 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보석에 도장을 새기듯이 이름을 새겨서 어깨받이에 붙이고 그것을 에봇에 붙여서 짜 버립니다. 도저히 흘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메어버립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은 제대로 사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하듯이 제사장도 연약하기에 제대로 담당을 못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레위지파를 따라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레위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에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영원한 대 제사장입니다.
이 대제사장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옷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9:6-7절입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로 오신 분의 이름이 어머 어마합니다. 그런데 이 아기로 오신 분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합니다. 정사(政事)란 나라의 일을 맨 것입니다. 임금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우리의 통치자라고 합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 어깨에 달린 보석을 누가 감히 떼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22:22절입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고 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8:15-29절입니다. “봉독” 흉패를 붙이게 하는데 이 흉패에 열두 보석을 달게 합니다. 각 보석에 각 지파의 이름을 새겨서 가슴에 붙이도록 합니다. 이 흉패도 에봇에 붙여서 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기념이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리품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시고 어린양의 피로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구원하여내신 자기 기념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심으로 자기의 전리품이 되시며 기념물이 되는 것이 주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주의 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영원한 하늘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이 본향이 아닙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주님께서 가신 나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주의 품에 안긴 백성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기에 환난이 옵니다. 세상이 애굽이며 바벨론입니다. 이런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하여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환난이 복입니다.
히브리서 7장 전체를 읽겠습니다. “봉독”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