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수님을 포크가수로 보기엔 그렇지만 그래도 70년대중반 많은 소녀 팬들을 사로잡은 가수로써 짧게나마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경복고를 다닐 때 응원단장을 한 김만수는
재수시절 음악평론가 임백천 씨의 눈에 띠어 1975년옴니버스
음반에 "나 어제 그녀 만나서"를 올리며
가요계에 얼굴을 내밀게 된다. 이어 "먼훗날", "눈이 큰 아이" 같은 기존의 가요를
리메이크하여 부르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1976년에는 옴니버스 음반에 "별이 밤하늘에 불타서 사라질 때까지"라는 곡으로
자리매김을 하고1977년 "영아", "푸른 시절"과 "진아의 꿈"으로 10대 가수에 진입하면서 인기절정을 맞는다.김만수는 입담도 재치 있고 사회자로서의 자질도 갖추고 있어서 가수 성공 뒤에는방송의 사회를
보기도 했었는데 TBC라디오의 "노래하는 곳에"같은음악프로를 진행하기도 했다.
"노래하는 곳에"는 장은아 같은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했었다.김만수의 데뷔 초기 곡으로 데뷔 곡은 아니지만 데뷔 곡과 다름없는 김만수을 알린 곡이 "먼 훗날"이다.원곡은 에보니스의 "가랑잎(1968)"이고 김만수에 이어 ‘둘다섯’이 1976년 불러 김만수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 김만수만의 떨리는 듯한 독특한 바리브레이션과 창법은 ‘둘다섯’이나 ‘에보니스’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먼훗날’의 원곡 ‘에보니스’의 "가랑잎"(1969년 발표, 1972년 음반에는 제목을 "추억"으로수록) 김만수는 작사, 작곡에 까지 손을 대서 1976년에는 옴니버스음반에자작곡을 선뵈는데"별이 밤하늘에 불타서 사라질 때까지"란 긴 제목의 노래로 이 곡도 한창 인기를 끌어 올리던 시기의 곡이라나름대로 꽤 방송을 탔던 곡이다. 독특한
제목에사랑 노래로는 선율의 흐름이 장중한 느낌의 가요제에 나올법한 노래라는 느낌이 들어제법인기리에 선곡되던곡이다.
김만수는 70년대 중반에 <영아>
<푸른시절> <별.달.장미,백합>등의 청소년
취향의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사했던 가수이다. 제치있는 말솜씨와 특유의 귀여운 용모 등 재기
발랄한 모습으로 당시 TBC-TV의 "오라, 오라, 오라"를
비롯 "노래하는 곳에""살짜기
웃어예", "당신을 스타로" 등의
인기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특히
소녀 팬들로부터 열정적인 사랑을 받았던 그는 서두에 열거한 노래 이외에도 <눈이 큰 아이> <진아의 꿈>등 일련의 히트곡을 통하여 부동의 스타덤을
구축하였다. 이 같은 활동의 결과로 1977년 KBS,MBC에서 10대가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후
뒤늦은 군입대로 인하여 3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보내기도 했던 그는 군복무를 마친 후인 1980년 록 스타일의 노래 <그 사람>을 히트시키며 다시금 인기를 만회하고 이듬해 MBC가 선정한 10대가수의 대열에 합류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이렇듯
가요계에서의 한 시절을 풍미한 그였으나 의욕적으로 출범시킨 "김만수와 4번타자"라는 그룹이 멤버간의 갈등으로 인해 결성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해체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 후 가요계를 떠난 그는 건축업에 종사하며 사업가적인 역량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음악을 향한 애정과 정열을 가슴에 담아 두고 있던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간헐적이나마 미국, 일본들을
왕래하며 공연부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그만둔 지 8년만인 1992년 예전의 재기 발랄한 청소년에서 성숙한 장년의 모습으로 앨범 [사랑의
아픔]과 더불어 가요계에 복귀했다.
1년여 준비기간을 통하여 완성된 [사랑의 아픔]은예전의
그가 보여 주었던 상큼한 발라드 취향에서 벗어나 트로트 계열의 성숙함과 노련함으로 채색된 타이틀곡 <사랑의
아픔>과 록 & 고고타입의 <마지막 여자> 자작곡인
<사랑이란>등의 다양한 장르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도 그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 각종 행사에는 물론, '배철수의 콘서트 7080', '가요무대' 등에 자주 출현해 당시 소녀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들을 해맑게 노래해 주고 있다. 60 중반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해주고 있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