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되찾으려는 전주최씨와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문로 사이 분쟁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땅을 사고 판 당사자들은 물론, 처음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도 모두 죽고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가며 소송을 벌였으나 전주최씨가 패소하여 땅을 되찾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갔다.
127년간이나 끌어온 지루한 송사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1934년 봉사공(경립)파 23세 죽암공(竹菴公) 최규동(崔圭東)이 주암촌에 살고 있는 일가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친한 친구를 동원하여 대리 매입하여 되돌려 받으므로 인하여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다.
죽암공은 원래 참봉공(응운)파 22세 최한팔(崔翰八)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봉사공파 최한풍(崔翰豊)의 계자가 되었다.
전주최씨종대기적비(全州崔氏宗垈紀蹟碑)
이번에 종대 터를 되돌려 받았으니 그 터에 건물 하나를 새로 지어서 1935년 봄에 낙성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새로 복구된 건물은 내외의 강당은 물론, 창고와 문랑 등 일체로 모두 수리하고 보완하여 새롭게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今於宗垈之復舊也乃爲新建一閣而乙亥春告成奉安影幀耳復舊之內外講堂及庫舍門廊一切修補面目一新
암계공 생가 터를 되찾았으므로 드디어 다음해 1935년 그 자리에 주암서원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새로 복원한 주암서원에도 예전에 배향했던 선현을 네 분을 그대로 배향하였는데, 대개 철폐 되었다가 새로 복원한 서원의 경우, 배향 선현이 바뀐 경우도 적지 않지만 주암서원은 바뀌지 않았다.
주암서원을 다시 복원할 때 전주최씨와 흥성장씨 두 가문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없지만, 암계공 생가 터에 복원된 것으로 보아 전주최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된 주암서원에 율계공과 사촌공이 계속 배향된 이유가 흥성장씨 가문에서 다시 그만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인지, 아니면 예전에 해 온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두 가문 이상 선현을 배향하지 않으면 서원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리한 것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