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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迦智山)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서 중산(中山), 낙하산, 보두산(步斗山)에 이른다. 다시 보두산(步斗山)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비학산(飛鶴山)에 이른다. 이 산록(山麓)을 배경으로 하여 東.南.西쪽에 각각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 기슭에는 남가(南佳), 南쪽 기슭에는 정문(貞門), 西쪽 기슭에는 기회(沂回)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남가(南佳) 마을의 건너편에는 中山에서 한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려와 꾀꼬리봉(峰)을 지나 부리미산(浮鯉尾山)을 거쳐 화지산(花枝山)에 이른다. 부리미산(浮鯉尾山) 아래쪽에 남계(南溪)가 있고, 화지산(花枝山) 기슭에는 양덕(陽德)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남가(南佳)와 남계(南溪), 양덕(陽德) 마을 사이에는 엄광(嚴光)에서 내려오는 엄남천(嚴南川)이 응천강(凝川江)으로 흐른다. 또 멀리 마을 앞에는 응천강(凝川江)의 지류(支流)인 북천수(北川水)와 동천수(東川水)가 합류되고 있다. 긴늪 삼거리를 중심으로 국도 24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여 東으로 단장(丹場).산내면(山內面)으로 달리고 있고, 또 국도(國道) 25호선이 북쪽 상동면(上東面)으로 달리고 있다.그래서 교통도 편리하며 東.西.南으로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또 도로(道路)를 따라 북천수(北川水) 가에 긴 송림(松林)이 둘러 싸여 있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가곡(南佳谷), 기회(沂回), 양덕(陽德), 남계(南溪), 화계(華溪) 등을 합하여 남기리(南沂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남가(南佳), 기회(沂回), 양덕(陽德), 남계(南溪), 정문(貞門) 등 5개 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계(華溪)는 금천리(琴川里)로 편입되었다. 東으로 다죽리(茶竹里), 西로는 밀양시(密陽市) 교동(校洞), 南으로는 밀양시(密陽市) 용활동(龍活洞)과 단장면(丹場面), 北으로는 상동면(上東面)과 엄광리(嚴光里)와 각각 인접해 있다.
(1) 기회(沂回, 장연(長淵), 긴늪)
뒤로는 비학산(飛鶴山)을 등지고 있으며 서쪽으로 트여 있는 마을이다. 옛 지명은 장연(長淵)이다. 장연(長淵)이라고 부른 것은 옛날에 북천(北川)이 마을 앞으로 통과하여 금천리(琴川里)에서 동천(東川)과 만나서 응천강(凝川江)으로 흘러 갔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래가 쌓여 마을 앞에는 긴늪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긴늪 혹은 장연(長淵)이라고 한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밀성박씨(密城朴氏) 일파와 아산장씨(牙山蔣氏) 일파가 입촌(入村)하여 세거(世居)해 왔다고 한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姓氏)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밀주승람(密州勝覽)에도 진사(進士) 손석좌(孫碩佐)가 구거(舊居)했다고 하며, 사과(司果) 박상우(朴尙宇), 군수(郡守) 박상일(朴尙鎰), 박돈영(朴敦永), 참서(參書) 박춘영(朴春永), 박종필(朴琮弼) 등이 소거(所居)했다고 한다.
■ 비학산(飛鶴山)
남기리(南沂里)의 뒷산으로 산세가 마치 학(鶴)이 나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산에 있는 묘소(墓所)에는 무거운 석물(石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학의 날개에 무거운 짐을 실을 수 없다는 속설(俗說)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한다.
■ 송림(松林)
기회(沂回) 마을의 서북쪽에서 북천수(北川水)를 따라 형성된 소나무 숲을 가리킨다. 소나무 숲이 길게 늘어선 숲이라고 하여 긴늪숲이라고 부른다. 100여년 전부터 일부 개인 소유의 땅과 하천부지(河川敷地)를 이용하여 방풍(防風)과 경관(景觀)을 위해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 날을 식목일(植木日)로 정하여 연례행사(年例行事)처럼 육림(育林)을 해왔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송림회(松林會)를 조직하여 선인(先人)들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오늘날은 밀양(密陽)의 관광명소(觀光名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긴늪보(장연보(長淵洑))
비학산(飛鶴山)의 서쪽 산 모롱이에 있는 보(洑)로 긴늪들에 관개(灌漑)를 한다. 보(洑)의 머리는 상동면(上東面) 가곡리(佳谷里)에서 시작된다.
■ 긴늪들
기회(沂回) 마을 앞에서 정문(貞門) 마을까지 걸쳐져 있다. 원래는 북천수(北川水)의 흐름에 의해 생겨난 늪지였는데, 지금은 다 들로 개발되었다.
■ 긴늪나루(북천진(北川津))
밀양시(密陽市) 교동(校洞) 춘복(春福)과 산외면(山外面) 남기리(南沂里) 기회동(沂回洞)을 연결하는 나루터였다. 일제(日帝) 말기에 밀산교(密山橋)의 시공(施工)됨으로써 없어졌다고 한다.
(2) 남가곡(남가(南佳), 南佳谷)
비학산(飛鶴山)의 동록(東麓)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봉(天峰)이 이 마을의 주봉(主峰)이다. 엄남천(嚴南川)을 끼고 있으며, 東쪽으로 양덕(陽德)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 지명(地名)은 남가곡(南佳谷)으로 남기리(南沂里)의 본동(本洞)이다. 남가곡(南佳谷)이라는 말은 상동면(上東面) 가곡리(佳谷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밀주지(密州誌)에 남가곡(南佳谷)은 일명(一名) 엄광(嚴光)이라고 하며 府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한 때 엄광리(嚴光里)와 함께 한 마을로 파악되었던 것 같다.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남원양씨(南原梁氏) 일파(一派)가 입촌(入村)한 후 지금까지 세거(世居)해 오고 있다. 지금은 여러 姓氏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운산정(雲山亭)과 안동권씨(安東權氏)의 학남서당(鶴南書堂)이 보존되고 있다.
■ 굴던방우
비학산(飛鶴山)의 정상 부분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에 굴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 불썬방우
비학산(飛鶴山)의 정상 부분에 있는 바위로서 탕건바우의 위쪽에 있다. 옛날 이 곳에서 불을 쓰고 공을 드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일자산, 이자산, 삼자산(一字山, 二字山, 三字山)
비학산(飛鶴山)의 정상에서 동편으로 있는 산이다. 이 곳에는 山主가 여러 명이 있는데, 그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서 일련 번호를 붙여서 표시했다고 한다. 일자산(一字山)은 비학산(飛鶴山)의 정상봉에서 굴던방우 사이에 있는 산이고, 二字山은 굴던방우에서 불썬방우 사이에 있는 산이다. 三字山은 불썬방우에서 딱밭고개 사이에 있는 산이다.
■ 엄남천(嚴南川, 남계(南溪))
엄광리(嚴光里)에서 남기리(南沂里)쪽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을 가리킨다. 이 지명은 해방 후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옛 지명은 남계(南溪)이다.
■ 엄남천제방(嚴南川堤防)
엄광리(嚴光里)에서 내려오는 엄남천에 쌓아둔 제방이다. 남가 마을 앞에 있다.
■ 소탯골보(洑)
남가(南佳) 마을 앞에 있는 조그마한 보(洑)를 말하는데 다물배기에 물을 관개한다.
■ 해말들
남가 마을 앞에 있는 엄남천 넘어에 있는 들이다. 딱밭들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 탕건방우(탕건암(宕巾岩))
불썬바우의 아래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습이 탕건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치분골
남가 마을과 엄광리(嚴光里) 숲촌 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딱밭고개의 아래쪽에 있다. 옛날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은 아기들을 소쿠리에 담아 나무에 달아 놓으면 깨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쿠리에 담아 놓는 것을 치분이라고 하는데, 치분을 했던 장소였다고 해서 치분골이라고 한다.
■ 딱밭들
남가 마을의 북쪽에 있는 들인데, 이 곳에는 옛날에 닥나무밭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들이 되었다.
■ 불당골(佛堂谷)
남가 마을의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비학산(飛鶴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 옛날에 불당(佛堂)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불당(佛堂)이 없어지고 지명만 남아 있다.
■ 삼밭골(麻田谷)
남가 마을 북쪽 불당골의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삼밭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소방우골
덕거리보(洑)의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 소방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소방우(우암(牛岩))
소방우골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습이 소를 닮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남계(남계(南溪), 맥산(麥山), 부리미(浮鯉尾))
남가의 동쪽 부리미산(浮鯉尾山) 기슭에 있는 마을로 일명 맥산(麥山)이라고 한다. 맥산 또는 보리뫼라고 부른 것은 마을의 뒷산인 부리미산의 봉우리 모습이 마치 보리섬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부리미라고 한 것은 남계 마을 뒷산의 형세가 마치 잉어 꼬리가 물에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후기(朝鮮後期)에 월성이씨(月城李氏) 일파(一派)가 입촌(入村)한 후 지금까지 세거(世居)해 오고 있다.
■ 부리미산(浮鯉尾山)
남계 마을의 뒷산이다. 산의 형세가 마치 잉어 꼬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방탯골
남계 마을의 동북쪽 산기슭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민가(民家) 수호(數戶)가 살고 있다. 지금은 감나무, 밤나무 등 유실수의 과수원이 있다.
■ 방탯골못
부리미산 옆에 있는 연못으로 백수십 년 전에 이 곳으로 이거(移居)한 김씨(金氏)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라서 만든 못이라고 한다. 부리미산의 모습이 잉어 꼬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이어서 잉어에게는 물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 덕거리보(덕근보(德斤洑))
엄광리(嚴光里) 숲촌 마을에서 500m 아래쪽 엄남천(嚴南川) 가에 있는데, 덕거리들과 딱밭들에 물을 댄다.
■ 귀밭골(계전곡(桂田谷))
남계 마을의 북쪽 숫톨골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는 옛날부터 세 성씨(姓氏)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 숫톨골
방탯골의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서 숫돌이 많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양덕(陽德)
남가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양덕(陽德)이라고 한 것은 꾀꼬리봉에서 내려온 산기슭에 위치하여 양지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약 400여 년 전에 현감(縣監) 권응생(權應生)이 입촌(入村)한 후 지금까지 안동(安東) 權氏 일파(一派)가 세거(世居)해 오고 있다. 또 이 곳에 조제(助堤)도 있었다고 한다.
■ 다원고개(다덕고개, 양덕고개)
양덕(陽德) 마을에서 다죽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지도에는 다덕고개로 표기되어 있는데, 다죽리에서는 양덕고개라고 한다.
■ 왜우고개
양덕(陽德)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왜우(금천리 대촌)로 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 굴밑
양덕(陽德) 마을의 동북쪽 산기슭에 있는 암굴(岩窟)이다. 이 굴 속에는 샘물이 있는데, 샘이 깊어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피난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 당등(堂嶝)
양덕(陽德) 마을의 북쪽에 있다. 이 곳에 큰 당산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에 민가(民家) 수호(數戶)가 살고 있는데, 마을 이름도 당동(堂洞)이라고 부른다.
■ 재애굴(기와굴)
양덕(陽德)에서 남가로 가는 길목을 가리킨다. 이 곳에는 해방 전에 기와굴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없어지고 모두 들로 바뀌었다.
■ 황새등
양덕(陽德) 마을의 앞산인 화지산(花枝山)의 정상에서 마을 쪽으로 길게 내려온 산등성이이다. 이 곳에는 옛날에 노송(老松)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황새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후에 노송(老松)을 다 베고 나니 황새도 사라졌다고 하며, 지금은 지명만 전한다.
■ 양덕제(陽德堤, 조제(助堤))
양덕(陽德) 마을 앞에 있는 연못이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마을 앞에 조제(助堤)가 있었다고 하며, 길이가 264척이고 넓이가 30척이라고 한다. 약 400여년 전에 이 마을에 이거(移居)한 권씨(權氏) 일족(一族)이 마을의 운치(韻致)를 돋우기 위해서 만든 못이라고 하는데 일명 조제(助堤)라고 한다.
■ 못밑들
양덕(陽德)못의 아래쪽에 있는 들을 가리킨다. 못 밑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새못밑들
양덕(陽德)못의 아래쪽에 일제말기(日帝末期)에 새로 축조한 관개용(灌漑用) 저수지(貯水池)를 새못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쪽에 있는 들을 가리킨다. 새못 밑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고래샘(古來泉)
양덕(陽德) 마을 옆에 있는 샘이다. 옛날부터 이 마을 사람들의 식수원(食水源)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 고래들(古來坪)
양덕(陽德) 마을 옆에 있는 들이다. 고래샘의 아래쪽에 있어서 늘 물이 괴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못안샘
양덕(陽德) 마을과 양덕(陽德)못의 사이에 있는 작은 샘이다. 못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고래샘과 함께 이 마을의 식수원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 말무덤산
양덕(陽德)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이다. 이 곳에 말무덤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산 안에 굴밑, 당등이 있다.
■ 회말리(回末里)
금천리 화동에서 대촌으로 가는 길목에 소로(小路)가 있는데, 화지산(花枝山)의 끝 부분에 해당된다. 이 곳에 있는 길을 회말리길이라고 하고, 이 주위에 있는 논밭을 회말리논밭이라고 한다.
■ 다물배기
양덕(陽德) 마을과 금천리 화동 마을 사이에 있는 들이다. 이 곳에는 옛날부터 돌담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5) 정문(貞門, 정문(旌門), 아래긴늪)
비학산(飛鶴山)의 남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기회(沂回)에 포함되었다. 정문(旌門)이라고 한 것은 이 마을 내에 정려각(旌閭閣)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장씨(張氏) 부인(夫人)이 친정인 창원에 가 있는 동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급히 시가(媤家)로 돌아오는 도중에 적을 만났는데,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해서 월영대(月影臺) 아래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했다고 한다. 난(亂)이 끝난 후에 창원군에 새로 부임한 군수(郡守)가 이 사실을 듣고 장씨(張氏) 부인(夫人)의 생장지(生長地)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고 정절을 표창했다. 그 후 후손들이 정려각을 이 곳 시가(媤家)가 있는 곳으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 곳을 정문(旌門)이라고 부르다가 정자(貞字)로 바꾸어 정문(貞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래긴늪이라고 한 것은 옛날 기회(沂回) 마을 앞에 긴늪이 있었는데, 긴늪의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원래는 기회(沂回)와 정문(貞門)은 같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기회(沂回)에서 정문(貞門)까지 마을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에 중간 지점에 있던 마을이 없어지면서 정문(貞門)은 별도로 분동(分洞)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비학산(飛鶴山) 기슭에 있는 마을을 아래긴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밀성손씨(密城孫氏) 일파가 입촌하여 세거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성씨(姓氏)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또 장씨(張氏) 부인(夫人)의 정여각(旌閭閣)이 보존되고 있다.
■ 초혼장(초혼장등(招魂葬嶝))
정문(貞門) 마을의 뒷산에 있다. 비학산(飛鶴山)의 정상에서 마을 뒤에까지 길게 내려온 산등성이이다. 이 곳에서 옛날 장씨(張氏) 부인(夫人)의 초혼장(招魂葬)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등(嶝)의 아래쪽에 장씨(張氏) 부인(夫人)의 정여각(旌閭閣)이 있다.
■ 활용나루(활용진(活龍津))
정문(貞門) 마을의 서남쪽 북천(北川) 가에 있었던 나루터였다. 이 곳에는 옛날에 밀양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지명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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