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38,중도中道,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갓(邊)의 뜻이니라. 지금 중도를 물었는데, 무엇 때문에 갓(邊)의 뜻이라고 답을 하십니까? 갓(邊)은 가운데(中)로 말미암아 서고 가운데(中)는 갓(邊)으로 말미암아 서니라. 만약 본래 갓(邊)이 없으면 가운데(中)가 무엇을 따라 서겠는가? 지금 가운데(中)라 하는 것은 갓(邊)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있는 것이므로 가운데(中)와 갓(邊)이 서로 인하여 서 있음을 알라. 모두가 항상 함이 없음이니 색, 수, 상, 행, 식도 이와 같으니라. <問 何者是中道義 答邊義是 問 今問中道 因何答邊義是 答 邊因中立 中因邊生 本若無邊 中從何有 今言中道 因邊始有故 知中之與邊 相因而立 悉是無常 色受想行識 亦復如是>
*해설
*이장에서는 불교의 중도를 묻고 있다. 답은 중도는 갓(邊)이 그대로 중도라는 말씀이다. 역설적인 답이다. 변(邊) 갓은 관점을 말한다. 있다는 관점(邊), 없다는 관점(邊)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비유를 들면 어떤 것이 중도의 우측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네가 묻는 우측이 중도라고 답을 한 것이다. 선사님들은 이렇게 생각의 관념을 타파를 해버린다. 중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불교의 중도는 중생의 집착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교설이다. 불교의 중도론은 여여법당 초기불교 교리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해 놓았다.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붓다는 범동경에서 사견(邪見)의 종류가 62종이 있다고 하셨다. 사견(邪見)도 나름대로 논리적(論理的)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견이 진리(眞理)가 아니다. 진리는 실천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 논리나 관념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붓다 사상은 중도사상(中道思想)이다. 중도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도(中道)는 극단적(極端的)인 양변(兩邊)을 떠나 중간에 서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중도는 중간 입장은 아니다. 세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하는 두 주장의 중간 입장이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이렇게 모순 대립하는 두 주장은 허망한 생각 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임으로 그러한 사견의 입장을 떠나 있는 입장이다. 붓다의 침묵은 중도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사상(思想)이니, 종교니, 철학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삼라만상의 근원에 대한 이론이다. 철학서는 이것을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한다. 유신론(有神論) 종교에서는 신(神)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신(神)이 삼라만상의 근원(根源)이 된다. 이때 신(神)은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존재(存在)이고, 제일의 (第一義)적 존재(存在)이다. 과학자는 원소(元素)가 모여서 이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원소(元素)가 제일의(第一義的) 존재(存在)가 된다. 이들 이론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론이 옳다고 증명(證明)할 수단을 필요로 한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인식론(認識論)이라고 한다. 유신론(有神論) 종교에서는 신(神)이 세상을 창조(創造)했다는 이론이 옳다고 경전으로 증명(證明)을 한다. 베다 경전에 적혀져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소(元素)가 모여서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현미경을 통해서 증명한다. 모든 물질은 쪼개보면 원자(原子)와 원소(元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눈으로 보아서 확인할 수 있다고 증명한다. 사문(沙門) 사상(思想)은 과학자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듯이 똑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인식론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도 논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현량(現量)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진위(眞僞) 여부(與否)를 판단한다. 바라문교에서는 베다성전에 의한 진위여부를 판단한다. 이런 것을 성언량(聖言量)이라고 한다. 성스런 말씀에 의해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현량과 성언량과 함께 비량(比量)도 폭 넓게 사용한다. 비량은 논리적 추론(推論)이다. 비량은 산 넘어 연기를 보고 불이 있다는 것을 추론하여 아는 인식이다. 눈앞에 불을 보고 아는 것은 현량이다. 불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책을 통해 아는 것이 성언량이다. 인도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은 현실적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현량의 지식만 인정하였다. 그래서 브라흐만이 변해서 삼라만상이 생겼다는 전변설(轉變說)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변설을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눈으로 직접 보고 인식하는 가운데 찾았다. 그 결과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가운데, 변치 않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벽돌은 생겨서 부서진다(地). 그러나 벽돌을 이루고 있는 흙은 생기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벽돌로 있을 때도 흙이고, 부서져도 흙이다. 물은 네모 그릇에 넣으면 네모이고, 세모 그릇에 넣으면 세모이다. 그릇 따라 모양이 달라져도 물은 물이다(水). 불은 장작불이든 촛불이든 밝고 뜨겁고 그 성질은 변함없는 불이다(火). 바람은 강 바람이든 산 바람이든 이름은 달라도 변함없는 바람이다(風). 이렇게 생기지도 변하지도 않는 근본 성질 요소를 대(大)라고 하여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이 네 가지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근본요소(根本要素)라는 의미로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사문사상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우주의 근본 요소라고 하여서 바라문의 유신(有神) 사상(思想)에서 유물(唯物) 사상(思想)으로 전환(轉換)한 사상이다.
인간과 세계를 요소(要素)의 집합(集合)으로만 본다면 세상과 인간은 요소의 기계적인 결합체(結合體)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내세(來世)도 부정하고, 선악과 윤회도 부정을 했다.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체인 인간이 죽은 다는 것은 요소가 흩어지는 것이므로 선악이 있을 수도 없고,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칼로 베어 죽인다고 해도 칼이 요소 사이를 지나갔을 뿐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윤리적 도덕적인 생각을 말고, 살아있는 동안 감각적 쾌락만 누리면 된다는 쾌락주의에 빠졌다. 이런 무인(無因) 무연론(無緣論)을 극복하려고 칠요소설(七要素說)에다 다섯 가지를 더 해서12(要素說)을 주장한 사람이 막칼리 고살라였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 죽은 것은 생(生)이라는 요소와 사라지는 요소가 결합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득(得)과 실(失)이라는 요소가 결합(結合)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붓다 당시 인도에는 전통 바라문의 범아일여론(梵我一如論)과 유물론(唯物論)과 도덕부정론(道德否定論)과 기계적 불멸론 숙명론회의론(懷疑論)등 다양한 사상이 대립하고 있었다. 중도(中道)에는 고락중도(苦樂中道)와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일이중도(一異中道), 유무중도(有無中道)가 있다. 그 가운데 고락중도(苦樂中道)는 실천적 중도이고, 나머지는 이론적(理論的) 중도(中道)이다. 고락중도(苦樂中道)는 쾌락주의(快樂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에 대한 붓다의 입장이다. 중아함 사문이십억이경( 沙門二十億耳經)에 보면 붓다의 제자 가운데 소나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붓다 제자 중에 자기가 제일 열심히 수행을 했는데도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함을 개탄하고, 수행을 포기하고 세상에 나아가 보시(布施)나 하면서 복업(福業)이나 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붓다는 소냐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그를 불러 물었다. 소냐야!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네! 부처님이시여! 그렇다면 거문고 줄이 급하게 조이면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 느슨하게 풀리면 듣기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 이에 소냐는 둘이 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거문고 줄을 적절하게 조이면 듣기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 소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 사문이여! 지나친 정진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정진을 게으르게 하면 마음이 해태해 진다. 그대는 정진을 할 때인지 아닌지 시기를 분별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잘 관찰하여 방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냐는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수행정진 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 고락중도(苦樂中道)는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선정(禪定)은 사견(邪見)을 가지고 할 수도 있고, 정견(正見)을 가지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고락중도가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해서 우파니삿드의 수정주의(修正主義)와 동일(同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견(正見)은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緣起法)이다. 우파니삿드의 견해(見解)는 전변설(轉變說)이다. 그들은 전변설을 의지하므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찾는다. 연기법(緣起法)으로 보면 우리 몸 안에 아트만과 같은 불변(不變)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實體)는 무명(無明) 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허망(虛妄)한 생각이다. 유무중도有無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고락중도苦樂中道, 일이중도一異中道,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로 주제를 잡아서 올려놓았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설하신 것은 인도 종교와 철학 사상의 잘 못된 것을 타파하신 교설이다. 대주선사의 중도론도 부처님 사상을 근거로 이른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