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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아리엘이여
이사야 29:1~4
이사야 29장 말씀은 남 유다와 그 성읍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1절로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신앙을 돌아보는 성찰과 깨달음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절로부터 4절까지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서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이렇게 애가를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이 장차 비참한 고난을 겪을 것을 미리 보기 때문입니다. ‘아리엘’은 예루살렘에 대한 별명으로서, 그 뜻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리’는 최고의 포식 동물인 사자를 말하고, ‘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자’로 불러주신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부르시는 별명입니다. 사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별명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5:5 말씀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고 한 말씀에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 지파의 깃발 상징도 사자입니다. 창세기 49:9 말씀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베푸는 예언 중에 유다 지파를 향하여 이르기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찟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가 주류이며 다윗이 직접 정복하여 수도로 정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의 아리엘로 불리워지는 것은 잘 어울리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을 향하여 선지자는 슬프다고 비가를 부름은 어떤 까닭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고 친히 공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먹이를 움키고 큰 소리로 승리의 표효를 해야 어울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둘러 진치고 대를 쌓고 공격하시므로 그들은 슬퍼하며 애곡하는 신음소리나 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2절에 선지자는 다시금 ‘언어의 희롱’의 문학적 수법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선지자는 뒤에 나오는 ‘아리엘’이란 단어도 앞에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진 동일 단어를 사용했지만, 사실은 뒤에 나오는 ‘아리엘’이란 단어는 동일한 발음을 가진 ‘번제단의 바닥’이라는 뜻의 ‘아리엘’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난하주에서는 “하나님의 제단의 면”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번제단의 바닥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성전 안 뜰에 있는 번제단의 바닥 위에 제물인 소와 양과 염소들이 올려져서 뜨거운 불 가운데 완전히 태워져 연기만 가득히 피워 올라가는 것처럼, 머잖아 예루살렘 성읍은 번제단처럼 되어 그 바닥 위에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희생 제물인 소와 양과 염소처럼 다 불타 죽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 그 안에 있는 주민과 유다 백성들이 도륙을 당할 때에 그들이 지극히 낮아져서 땅 바닥에 엎드리고 먼지 구더기 속에서 뒹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들처럼 땅에서 말하고 그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그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처럼 큰 소리로 표효하며 드높이 솟은 시온 산처럼 온 세상을 향하여 기상을 떨치며 모든 이방인들을 압도하며 달려나가 움키고 아무도 덤벼들 자 없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이 본문 말씀에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교만했음을 말해줍니다. 4절에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겠다”는 말씀이 그러한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앞장인 이사야 28장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은 오만했습니다. 이사야 28:14 말씀에 보면,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였고, 28:22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오만함은 비웃고 무시하고 남을 깔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켜보시는데도 악을 행하는 것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안전과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뒷전으로 따돌리고 인간적인 수단과 술수를 도모했습니다. 이렇게 오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철저히 낮추시되 땅 바닥 먼지 구더기에 뒹글고 땅 속까지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주시고 은혜 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방패와 도움이 되어주시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계속하여 높여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말씀 속에서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거짓 선지자를 신뢰하고 신접한 자, 박수 무당들을 의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장차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할 때 조롱이 담긴 심판 내용을 말합니다. 그들이 심판당하여 땅에 엎드려졌을 때에 그들의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처럼 땅에서 나고 그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동안 신접한 자 곧 여자 무당을 신뢰하여 늘 그들의 길흉을 묻곤 했던 것을 질타하며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접한 여인들이 점을 칠 때 음산하고 어두운 말투 곧 죽은 자가 땅속에서 내는 듯한 음령의 소리를 뱉어내는 것을 그렇게 신령한 것처럼 좋아서 쫓아다녔으니, 이제 그들 신세가 그렇게 죽은 자처럼 땅속에서 티끌 속에서 그들이 내는 그 음산한 말들을 지껄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접한 자들의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요?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드리기 위하여 한 전도 집회, 기도회에 초대받은 안재우라는 복화술 강사가 말하는 것을 잠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준비한 영상 잠시 보겠습니다.
~영상 시청~
이 장면에서 우리가 잠시 보고 놀랐지만, 이 인형 아주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 검은 옷을 입은 안재우라는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소리 말고 또 전혀 다른 목소리 음색을 가진 여자분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인데 마치 두 사람이 하는 것으로 완전히 속지 않습니까? 이것이 애굽과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신접한 여인들이 사용하던 복화술입니다. 하나는 그 여인 자신의 말로 하면서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로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올려서 말하는 것처럼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은 완전히 죽은 자기 남편, 죽은 자기 어머니가 혼령이 되어 이 여자 무당에게, 남자 무당에게 나타나 자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 다 혼이 나가 버리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신접한 자들은 실제로 죽은 자의 영 곧 악한 귀신들과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이렇게 신접한 여인들을 추종하고 그 복화술을 쓰면서 나는 그 음산하고 쇳소리 나는 소리들을 좋아하며 복채를 주면서 그 말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심판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죽은 자들처럼 이제 그들이 티끌에 자빠지고 땅속에 묻혀져서 나직한 죽은 혼령의 목소리처럼 슬피 울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레위기 19:31 말씀에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접한 자는 여자 무당이요 박수는 남자 무당입니다. 그들이 음산하고 어두운 영들과 교제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영혼은 몹시 더럽고 악하고 음산합니다. 그런 자들을 믿고 그런 자들을 따르면 그 일로 인하여 그 사람도 영혼과 몸이 더럽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몸과 생활이 거룩하여 하나님께만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악한 영과 교제하는 일체의 모든 잡신 숭배, 일체의 점치는 행위, 손금 보는 것, 서양식 타로 점술, 카드 점 등을 일체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미신 행위에 관련되어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8:19 이하에서 이미 선지자가 이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쳐준 바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이사야 8:19~22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고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우리들은 미신적인 악한 영들과 점술, 복술 등을 추구하지 말고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율법의 여러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행해야 할 바를 상당 부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취할 길을 알 수 있도록 많은 지침을 이미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릴진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마음의 감동으로, 혹은 환경의 증거로써, 혹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통하여 적절한 해답을 얻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른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도 조급하게 서둘러서 족집게처럼 육신적인 유익과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미워하는 길로 달려가다가 망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구약의 이스라엘 왕 사울을 생각해봅시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 부족함을 깨우쳐주시고 잘못할 때면 언제나 강력하게 책망도 해주는 그 귀한 선지자를 주셨으면, 자기를 돌아보고 그 선지자 말씀대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가 자기 잘못을 책망하는 것을 싫어하여 선지자가 자기 고향 라마도 돌아간 후에 한번도 찾아와 조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국사의 문제가 있을 때 기도부탁을 한 적도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윗에게 빵을 좀 주고 칼 한 자루 주었다고 제사장 가족들을 다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중에 전쟁이 터졌을 때에 급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답답하니까 변장하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이미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급할 때 여자 무당에게 찾아가서 자기가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일을 하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역대상 10:13,14 말씀은 사울이 결정적으로 패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쓰믈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는 사울 왕의 결정적인 패망 원인이 그가 신접한 자에게 가르쳐주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모두 오늘 본문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의 패망을 반면 교사로 삼읍시다. 그렇게 아름다웠고 당당하여 온 세상 가운데 표효하던 하나님의 사자 예루살렘 성과 유다 백성들이 그처럼 처참하게 함락되고 백성들이 비참하게 낮아지고 또 그 아름다웠던 찬송의 도시가 사람들이 다 죽고 티끌과 땅 속에 묻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죽은 자의 소리처럼 황폐화되고 섬찟하게 변한 이유는 그들이 교만하였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거짓 선지자, 거짓 영들을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길흉을 묻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의 혼돈이 가득한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 속에 우리들은 역사의 대주재가 되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에게 범사에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그 말씀 가운데 교훈을 얻고 우리 삶의 길잡이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더욱 겸손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신뢰하는 모든 자들을 친히 하나님의 사자처럼 높이시고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