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싸와 므리바의 물 2: 탈출 17,1-7
성경에 보면 민수 33,5 부터 이스라엘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º 민수 33,5-14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에 진을 쳤다.
수콧을 떠나서는 광야 언저리에 있는
예탐에 진을 쳤고,
에탐을 떠나서는 바알 츠폰 앞
피 하히롯으로 돌아가 믹돌 앞에 진을 쳤다.(여기까지는 갈대 바다 건너기 전)
피 하히롯을 떠나서는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서 광야로 나가,(갈대 바다를 지나 간겁니다)
에탐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가
마라에 진을 쳤다.(마라에서 쓴 물을 단물로 바꾼이야기)
그리고 마라를 떠나 엘림으로 갔다.(엘림에는 샘이 있었고 야자나무도 있었다)
엘림에는 샘이 열두 개가 있고 야자나무가
일흔 그루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 진을 쳤다.
엘림을 떠나서는
갈대 바다 가에 진을 쳤다.(좀 받아들이기 어려움,탈출기에 부합하지 않음)
갈대 바다를 떠나서는
신 광야에 진을 쳤고,
(우리가 알고 있는 17장의 이야기)
↓
신 광야를 떠나서는 돕카에 진을 쳤다.
그리고 돕카를 떠나서는 알루스에 진을 쳤다.
알루스를 떠나서는 르피딤에 진을 쳤는데,
그곳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우리가 생략된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야영지는? 돕카, 알루스
한 야영지가 아니라 야영지들, 이라는 복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야훼의 입에 따라,
야훼가 가라고 하니까 가는 겁니다.
요즘 이스라엘의 모습이 말 잘듣는 아이입니다. 우리들이 주일학교에서도 어떤 주일에 와서는 정말 협조적입니다.
미사, 강론 시간에 질문을 하시면 대답도 잘하고, 그런데 어느 주일에 오면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화가나 있어요( ㅎㅎㅎ)
그래서 신부님 강론하시는데 막 방해를 하고 ...그건 어떤 뜻일까요??
자기가 화가났다는 뜻이에요. 자기를 봐달라는 뜻이에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순간이 있었죠? 라고 물어보시는데..도대체 얘가 왜 이럴까? 라는 순간.
특히 언제 그렇습니까?사춘기 때 그렇습니다. 사춘기 때는 누구나 힘이 드는 시기입니다. 몸도 마음도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 변화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앞에서 두려움과 체력적으로도 힘이 듭니다. 그랬을 때 그것을 밖에다 표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말을 잘 듣는 어린이처럼, 야훼의 입에 따라 그렇게 떠나고 진을 치고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이 없는 겁니다.
물이 없었다. 앞에서는 쓴 물이 나왔다가 문제였고 배가 고팠다가 나왔는데, 배고픈 것보다는 목마름이 더 힘듭니다.
탈출 17,2 직역
그러자 그 백성은 모세와 시비했다.
여기서 시비했다는 말이 갖고 있는 가장 1차적인 뜻은?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시비했다 ⇒ 옳고 그름을 따짐( A와 B가 시비를 가렸다)
탈출 17,2 직역
'물을 우리에게 달라.
그리하여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시비의 내용은 '당신이 우리에게 광야로 가자고 했으면 적어도 먹을 물은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옳은 일 아닙니까?' 라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겁니다.
탈출 17,2 직역
"왜 너희들은 나와 시비하는가?"
내가 가자고 그랬냐? 야훼 하느님이 가라고 해서 전한 것 밖에 없어(모세)
탈출 17,2 직역
"왜 너희들은 야훼를 시험하는가?'
모세와는 시비하고 야훼는 시험합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시험하듯이 ‘얘네들이 약속의 땅에 가서 내가 준 율법을 잘 지키는지 ...' 반면에 백성은 '야훼 하느님도 우리에게 한 약속을 잘 지킬까? 정말 그 땅을 주실까? 우리가 땅에 들어가서 잘 살수 있게 우리를 보호해 줄까?' 이런 것들을 시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
=>나중에는 신학적으로 보면 신관이 바뀌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시험한다. 라는 시험의 주체가 신관이 바뀌면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뀐 신관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누군가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할때, 우리들이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게 하시고 그와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와는 시비하고, 하지만 하느님은 시험하는, 약간 다른 동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나중에 마싸와 므리바라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물을 우리에게 달라' 라고 했는데 '달라' 라는 명령형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우리 말에는 한명이든, 여러명이든 '달라' 라고 하지만 히브리 말에서는 한사람이 나한테 물을 주는 경우와 두명 이상일 경우와 다릅니다. 동사가,
명령형도 단수가 있고 복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복수가 쓰였습니다.
따라서 주석학자들은 설명을 해야 합니다.
물을 달라 (복수형) ⇒ 모세와 아론, 모세의 뒤에 계신 하느님
탈출 17,3 (2절과 3절이 반복되는 겁니다)
탈출 17,3 직역
그리고 거기에서 그 백성은 물에 목말랐다.
그리고 그 백성은 모세를 거슬러 불평했다.
처음에는 시비했다, 시험했다, 불평했다.
마싸와 므리바의 물 ⇒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거스름, 불평하다의 동사를 사용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17,2절의 시비했다 : 마싸와 므리바 지역의 이름과 연결됨
하지만 갈대 바다를 지나고 나서 본래 이스라엘 백성의 그릇된 태도를 일관성있게 엮어내는 그 동사는 불평하다. 라는 동사입니다. 본래의 흐름으로 되돌아 온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탈출 17,3 직역
"그리고 그는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를 올라오게 하였는가? 이집트로부터."
앞에 있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이집트에 있는 것이 더 나았을 뻔 했다. 똑같은 흐름입니다.
탈출 17,3 직역
"나와 나의 아들들과 나의 가축들을
목마름 속에서 죽이려고"
차라리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이 낫다 , 앞선 내용을 연관시키자면 칼에 맞아서 죽는게 낫지 이렇게 배고파서 죽고 목말라서 죽는 것은 비참한 거다. 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17장 2절과 3절에서 3절이 더 흥분하고 강도가 더 높은 겁니다. 2절은 차분하게 따지는 겁니다. ("당신이 데리고 왔으면 물은 줘야지, 물 줘..")라 하는 것이고 3절에서는 고함을 치는 겁니다.("우리를 목말라 죽이려는 거냐?")
여기까지가 그 백성이 시비하고 불평을 한 내용입니다.
그러자 4절 모세가 야훼 하느님께 시비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지만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고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억압에 눌려서 자신의 고통을 부르짖자, 그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올라서 하늘에 있던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셨다.(탈출 1-2장) 라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모세가 야훼에게 부르짖습니다.
탈출 17,4 직역
"무엇을 내가 할까요? 이 백성에게
조금만 더 있으면 그들은 내게 돌 던질 것입니다."
우리 말로는 돌 던지다. 라는 동사가 한 동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돌 던지다'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건 정말 돌을 자주 던진겁니다.
이스라엘은 돌말고 던질 만한 다른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군가의 돌을 던질때는,
우리는 돌던지다는 것이 불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돌을 던지는 것이 합법적일때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간음한 여인, 율법에 따르면 그렇게 간음한 여인은 돌을 던져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형제도의 한 방법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내게 돌 던질 것입니다.' 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직 율법은 없었지만 모세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고 모세를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로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단지 흥분한 군중이 모세에게 돌을 던지는 내용을 넘어선 겁니다.
그러자 야훼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탈출 17,5 직역
"지나가라 그 백성들의 면전에서
그리고 데려가라
너와 함께 이스라엘의 원로들 중에서
그리고 너의 지팡이를 내가 그것으로 나일 강을
쳤던 가져가라
내 손에 그리고 걸어가라.
동사가 4개가 나옵니다. 동사라는 것은 움직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한 문장 안에 4개의 동사가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템포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가라 - 데려가라 - 가져가라- 걸어가라, 를 바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지나가라'는 표현입니다.
'지나가라 그 백성들의 면전에서' ⇒ 흥분한 사람들이 앞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지나가는 것을 의미함 (젊은이들 표현에 '쌩깐다" 는 표현만큼 뻔뻔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화가나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섭지 않은 겁니다.
나중에 복음에서도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절벽에서 밀어뜨려서 죽일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는,
두려워하지말고 그 백성들 앞을 지나가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나일 강을 쳤던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합니다. 나일강을 치자 피로 변했던,
이것이 주석학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중에 하나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일어났던 가장 놀라운 기적은 갈대 바다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억하지 않고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썼다면 "너의 지팡이를 가져가라, 그것으로 갈대 바다를 갈랐던" 라고 썼을 겁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다. 왜? 일까?
그리고 '걸어가라'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원로들과 함께 너가 그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라. 문제는 어디로 걸어가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가라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라는 이야기가 6절에 가서 특정됩니다.
탈출 17,6 직역
"보라, 내가 너의 면전에서 서 있을 것이다.
거기 호렙에 그 바위 위에
그리고 그 바위에(향해서) 쳐라.
그러면 그곳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물이
그러면 그 백성은 마실 것이다."
걸어가라 , 그러면 너의 면전에 서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분사형 동사가 사용이 됐습니다. 따라서 과거인지 미래인지 부정확한데 아마 걸어가고 난 이후에 미래인데 어느 정도의 미래인지에 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호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앞에서는 '신 광야'라고 불렀습니다. 신 광야라고 불렀다는 것은 신명기적 편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나이 산이라고 하지 않고 호렙이라고 부르는, 호렙은 신명기적 표현
따라서 두 층이 교차하고 있는데, 똑같은 장소를 놓고 신, 호렙, 이라는 단어가 같이 쓰였는데 호렙은 나중에 한참 있다가 도착합니다. 아직 시나이 계약 맺으려면 한참 남았습니다.(탈출 19~ 20장) ㅡ거기까지 안갔는데 호렙 애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르피딤에 있습니다.
그런데 호렙 얘기까지 나오는, 그리고 호렙 얘기가 나오면은 당연히 등장해야 할 것은 산 용어인데, 여기서는 바위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일군의 주석가들은 호렙의 해석
① 거기 호렙에 그 바위 위에 ⇒ 바위를 산으로 해석
신부님과 일군의 학자들은,
② 후대의 편집적 첨가로 해석 해서 빼서 읽자.
왜 신명기 학파는 스토리 라인을 무너뜨리면서 호렙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을까? 이것만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됩니다. 왜 그러냐면 신명기 학파에서는 하느님이 아무곳에서나 현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때는 불기둥, 구름 기둥의 모습으로 상징적인 표징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만, 호렙산에서는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때 또는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그때는 하느님이 거기 현존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산은 하느님의 산이니까,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느님이 그 바위 위에 있다면, 하느님이 계신 그곳은 호렙이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논리입니다.
하지만 본래의 전승은 그런 신명기 학파에 신학을 갖고 있진 않은 전승입니다.
하느님이 어디서나 이스라엘과 함께 할 수 있는, 따라서 르피딤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 있었고 르피딤에서 인접한 어느 바위 위에 하느님이 계실텐데 그 바위를 내가 그 지팡이를 가지고 치면 거기에서 물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백성들이 모세와 시비하고 야훼 하느님을 시험했기 때문에 그곳을 마싸와 므리바 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고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필 문장의 위치도 맨 뒤쪽입니다. 호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문장의 맨 뒤입니다.
탈출 17,6 직역
"보라, 내가 너의 면전에서 서 있을 것이다.
거기 호렙에 그 바위 위에
그리고 그 바위에(향해서) 쳐라."
이런 내용으로 호렙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편집적인 첨가로 보고 빼는 것이 스토리 라인에 맞겠다.
시비하다 (히브리어, רב 립)이라는 동사에서 ⇒ 므리바 라는 지명이 나왔다.
시험하다 (히브리어,נסה 니싸)라는 ?동사에서 ⇒ 마싸 라는 지명이 나왔다
마싸, 는 시험하다 이고 므리바는 시비하다 입니다. 모세와는 시비하고 야훼는 시험한 그 장소의 두 이름입니다.
탈출 17,6 직역
그리고 모세는 그렇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양 눈을 향해
따라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그곳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백성을 대표해서 볼수 있는 겁니다.
신부님이 모세, 신자들이 이스라엘 백성,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을 하고 시비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데,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원로들 몇명 나오십시오. 한 10m~ 20m 를 가서 서 계신곳의 지팡이를 치니까 거기에서 물이 나오게 되는 그런데 그곳에 하느님이 계셨다. 그래서 그곳을 호렙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어떤 신명기의 신학적인 당혹스러움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탈출 17,7 직역
그리고 그는 불렀다.
그 장소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고
왜냐? 거기서 시비하고 거기에서 시험했으니까
그러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고
야훼를 시험하였다. 해서
야훼는 과연 있는가?
우리들 사이에 또는 없는가."
이게 야훼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 질문이 앞선 스토리 안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는(탈출 17,2 직역 부분, 물을 우리에게 달라, 그리하여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그리고 아마 스토리 라인으로 생각한다면 야훼가 과연 우리들 사이에 있는가? 또는 없는가? 이게 한 문장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 첫 문장에서
탈출 17,2 왜 너희들은 나와 시비하는가?
왜 너희들은 야훼를 시험하는가?"
이 질문과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시비와 시험의 언어들이 딱 맞닿아 있는데, 문학적인 기법일 것 같습니다.
야훼는 우리를 사이에 있는 가? 또는 없는가?
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언사는 탈출 17,7 맨 마지막에 위치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문하는 내용은 뭘까요? ⇒ 탈출 17,7 직역의 "야훼는 과연 있는가? 우리들 사이에 또 없는가." 이 질문은 야훼의 현존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고, 야훼의 권능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질문만 보면 야훼의 현존에 관한 질문같지만 권능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구약에서 야훼의 함께 있음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하느님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라는 내용인데,
현존 : 민수 14,14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 과 함께 하고 있는 야훼의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듣고 그들이 두려워 하는 겁니다.
현존 ; 신명 7,21
º 위대하고 두려운 하느님이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너희는 그들을 겁내지 마라.
구약성경에서 가장 익숙한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나중에 신약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있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마태 28,20 "보라, 내가 세상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현존 : 여호 3,10
º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 족, 히타이트 족, 히위족, 프리즈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여부스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구약에서도 마찬가지고 신약에서도 마찬가지고 하느님이 현존하는 장소는? 실존적인 의미에서의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
신약에서도 마태 28,20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을 들으면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야 합니다."그러면 혼자 있을 때는 안돠는 거에요?" "예 ,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계약의 당사자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입니다.
계약의 당사자- 공동체 : 구약 - 이스라엘, 신약- 교회
이스라엘에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들 신약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길을 지키면서 그렇게 수고로운 삶을 살아 갈때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그게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거 아니면은 개별적으로 신앙생활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싸안고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공동체를 구원하신다.
신부님이 신부되신지 일년 좀 넘으셨을때, 하늘 나라에 관해서 애기하다가 외국 수녀님이 "신부님 하늘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게 딱 한가지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하늘 나라에는 아무도 혼자서는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공동체가 함께 가는 곳이고 그 공동체가 함께 모여 형제 자매적인 형제애를 나누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이다. 라는게 하늘 나라의 정체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야훼의 부재를 체험 할때도 있습니다.
민수 14,42 ; 신명 1,42 : 신명 31,17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라크와 미국과의 갈등의 상황에, 오바마 대통령에게 어느 신앙심 깊은 기자가 지금 하느님께서 미국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미국과 함께 있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국이 지금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이미 자신의 시기에 한말,
'신은 우리의 편' 이라는 이기주의 적인, 국가주의 적인, 민족주의 적인 해석, 이제는 더이상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의 편인가?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편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가톨릭 교회의 편인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뜻인가? 라는 질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잘 따라가 살고 있나?
가끔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서로가 정말 예수그리스도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책임을 갖고있는 지도자라면, 사람들을 가르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가끔 우리 지도자들은 그런 복잡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에 도움이 된다면 남북으로 나누고, 전라도 경상도로 나누고, 지연과 혈연으로 나누고, 그러면서 사람들을 편갈라 놓는, 옳지 못한 모습을…
이럴때 우리 가톨릭 교회는,
누군가가 상처낸 것들을 치유하면서 , 아니야 우리는 하나야!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의미에서의 한반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일본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동북아이사, 모든 인류, 모든 생태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적인 시선이 우리가 시작하면서 기도했던 그 찬미받으소서, 기도의 내용입니다.
나중에 탈출 33,3 에서 이문제가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릅니다.
탈출 33,3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거라. 그건 내가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 하느님이 삐진 겁니다.
그리고
탈출 33,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내가 한순간이라도 너희와 함께 올라갔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
도 똑갈은 내용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설득하고 설득해서 하느님의 마음이 바뀝니다.
탈출 33,1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네가 청한 이 일도 내가 해 주겠다.네가 내 눈에 들고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함께 이동하는 자신의 본래의 근거지였던 호렙산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구름기둥, 불기둥의 현존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여행을 떠나야 해서 성막이 필요한겁니다.
그래서 계약 궤를 받고 나중에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만, 호렙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그 기본적인 설계도에 따라 백성들과 함께 성막을 만들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성막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짓는 성전에 전형이 됩니다.
중림동의 약현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을 지은 목적도 조선의 기술로 조선의 능력으로 명동 성당을 정말 지을 수 있을까? 라는 시험해 보기 위해서 약현 성당을 지은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짓고나서 명동성당을 지은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전에 성막을 가지고 한번 하느님이 사실 곳을 미리 준비하는 그런 연습하는 과정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테마는 나중에 대림의 시기에 마태오 복음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이제 아들을 낳을터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되어 오신 그 예수 사건에 근본적인 목적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그러므로 이런 대림 시기를 가장 잘 보내기 위해서는 우리 삶 안에 자꾸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초대해야 합니다.하느님을 자꾸밀어내지 말고, 하느님 없듯이 살지 말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내 삶의 가운데에서 모시면서 살아가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싸와 므리바의 이야기를 하면서 강의를 마무리 하시려 합니다.
마싸와 므리바에 관해서는 한 20가지 정도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하시기에는 그렇고 단지 성경을 보면 몇몇 군데에서는 마싸 이야기만 나오고 몇몇 군데에서는 므리바 이야기만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 물이 없어서, 하느님을 통해서 물을 주었다. 라는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독립적으로 있었는지 또는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에서 독립적으로 있었는지 각 지역 전승에서 독립적으로 있다가 야훼계의 문헌이 합쳐질때 그때 이미 하나로 모여졌었는지, 아니면 하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 내려오다가 신명기계 편집이 되면서 신명기가 알고 있던 므리바 얘기가 함께 들어온 건지 여기에 관해서는 너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짐작하기 어려운 대목을 갖고 있는데 신부님은 마싸와 므리바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야훼계 전승안에서 이미 합쳐졌을거라고 보는, 누가 오늘 신부님에게 물어본다면,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일 마음이 변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과 함께, 정확하게 얘기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 방에 노트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물어볼 것들' 에 하나 더 추가된 것 같습니다.
민수기 20,1-13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거기에서 다루는 장소의 이름은 므리바입니다.마싸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재밌는 것은 여기서 기본적으로 베이스가 되는 위치는 르피딤입니다. 그런데 민수 20장에서는, 민수기의 므리바와 연관된 지리적 장소 '카데스'입니다. 르피딤이 아니라, 따라서 하나의 전승이 여러군데 가서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전승이 약간은 모세 오경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고 오늘날 텍스트를 읽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조금 혼란스럽게 다갈 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여기서 전체적으로 오경의 편집자, 탈출기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은 여기서 세 가지 동사를 강조하고 있다.
시비하다, 시험하다, 불평하다의 동사를 강조.
불평하다는 것은? 야훼와 모세를 통해 쓰인 무차별적인 동사라면,
시비하는 것은? 모세와 옳고 그름을 따짐
시험하다는 것은 ? 하느님을 시험함
이 세가지 동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한편으로는 야훼 하느님과 갖게되는 갈등의 관계가 그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신앙의 여정 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점점점 더 알아가고 있는 그와 같은 계단식 배열로 탈출기의 흐름을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겠다. 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