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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에 가톨릭대학교 신한대학 진리관에서 성서 백주간 연수를 하셨어요.
신부님께서는 사제로 살아가시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이 있는데 사회적인 사건도 이처럼 영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근래의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사건에 대해서 질문해 보시거나 기도해 보신 분이 있는지 물으셨고, 몇몇 분들이 계시지만 대부분은 그런 것들에 우리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아!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 이것은? 신앙의 문제라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세상도 세속적인(육적인)측면에서와 영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죠?
어떤 분이 식당을 하거나 기업을 한다고 생각할 때 돈을 벌려고 하는 목적이 있을 것인데, 신부님께서 학생 때 경영학 수업을 들으면 인간이 기업의 목적은 이익 창출이라고 배우셨다고..
하지만 요즘의 경역학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식당을 하시는 분이 돈을 벌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좋은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드시는 분들에게 하루를 살아가는데 좋은 양식을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그것은 영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꿈이겠죠?
신부님은 선거때가 되면은 신자분들에게 "여러분, 기도하고 선거하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고 하셨어요. 어떤 후보가 내 집값을 올려줄까?로 판단하지 마시고 어떤 후보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분이실까?를 생각하시면서.. 백 점짜리 후보는 없을테지만 어떤 후보가 내 영적인 잣대를 들이댔을 때 가장 적합한지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투표를 대하는 태도일 것 같다고.
신부님은 20대 때 민주주의는 내 신앙이다! 라는 말을 하고 다니셨는데 30대가 되고 나서 후회하셨다고 해요. 20대 후반에 신학대에 가서 기도도 하고 공부도 하셨는데 복음, 내지는 하느님의 나라의 가치는 그것보다 더 초월적인 것이었다고, 그래서 민주주의를 신앙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셨는데..
요즘 누가 다시 물어본다면, "민주주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라고 말하시는데 그 민주주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때 그 선물은 더 큰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일 우려스러운 것은 지금 대통령이 탄핵이 될꺼다. 심판을 받을 거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도 우리 역사의 관점에서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신부님과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적 갈등인 것 같다고... 이어서 물으셨어요.
사람들이 더이상 대화하지 않으려 하죠? 여러분들 집에서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까? 이야기하려 않으려 합니다. 왜냐면 싸우니까요.
그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정치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여당, 야당 모두 자기 표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어요. 전라도와 경상도, 노인과 청년이 갈라졌고 요즘에 젠더, 남녀로 갈라져서 서로 대화를 안 해요.
심지어 집안에서 조차도...
집안 모임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아, 오늘은 정치 얘기하지 말자!"
하지만 신부님은 그럴수록 우리들이 얘기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낮은 목소리로."
성서 백주간이 갖고 있는 좋은 면이 바로 우리가 묵상 나눔을 할 때 상대방의 묵상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서로 '저 사람이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데?'라고 생각할지라도 "당신이 틀렸어요." 하고 이야기해서는 안되고, 정말 이단이라면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는 게 맞지만,
판단하지 않는다.입니다
정치 이야기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나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생각해. 너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해?"라고, 서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서로 존중해주는 거기까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존중하는 태도로 출발하는 게 옳지 않을까?라는
성장한 자녀들에게도 "너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하고 질문을 하고는 들어주는 것으로..
그리고 혹시 자녀들이 나에게 물어본다면, "어, 나는 그런 것을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라고
또 교우분들에게 여당 야당 지지와 상관없이 유튜브를 보실 땐 골고루 ~~~~ 보시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한쪽편의 방송만 본다면 세상이 그런 줄 알게 된다고.... 세상은 양면을 다 갖고 있는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라고!
로마에서 공부하실 때 교수님과 산책을 하면서 공부하는데 힘들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서, 많은 학자들의 의견을 공부하면서 의심을 하는 게 힘들었다는 말에 교수님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의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의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하셨다고 해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메타인지도 자기 객관화라는 의미인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질문하는 거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옳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신을 관찰하는 메타인지인 것이죠.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편안한 이유도 신앙 안에서 늘 '하느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느님 앞에서 나는 어떤 인간인가? 이처럼 자기 객관화 내지 메타인지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인지라 보통의 사람들보다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여 내면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
프로젝터를 기다리다.... 강의 말씀으로 시작하시면서....^^
오늘 읽게 될 다니엘서라는 책자체가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처한 정치적인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하느님의 도움과 개입을 종말적으로 요청하는 책이라고 하셨어요.
다니엘?
히브리어로 단은 재판한다,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
따라서, 하느님이 재판하실 것이다.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다.라는 의미로 그 심판은 공정합니다. 그리고 지혜롭습니다.
Al가 유행인데 미국인들에게 그 AI를 통해서 대체되어야 할 직업이 있다면 무엇이 좋을지 물었다고 해요. 가장 많이 나온 직업이 바로 판사라고 해요.
우리도 또한 소송이나 판결에 처했을 때 불만을 가질 수 있겠죠. 대통령도 판사들까지 잡아오라고.... 했다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심판해 주시기를, 그렇게 해주셨으면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다니엘이라는 이름 안에도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묵시 문학인데요,
일단 그 묵시라는 말부터,
우리 말로는 묵시라는 말과 계시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말에 묵시는 영어로 apocalypse
계시는 영어로 revelation 말에 번역입니다.
아포칼립스, 묵시라는 영어 단어는 그리스말 아포칼립시스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레벨레이션이라는 영어 단어는 라틴말인 레벨라시오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 레벨라시오라는 말이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라는 말의 번역이에요.
아포칼립시스 = 그리스말
레벨라시오 =라틴말
그 두 개가 같은 뜻.
우리 말로는 묵시 = 계시
그래서 신약 성경의 마지막을 요한 묵시록이라고 해요.
제목은 요한 묵시라고 하고선 1장 1절에서는 "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다."(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쓰였어요.
묵시와 계시.
아포칼립시스라는 말이 무어냐?
무언가 감추어 놓았던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인데, 이 안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숨겨져 있대요. 천상적인 세계와 지상적인 세계가 있는데 천상의 세계는 초월적이다 보니까, 시간과 공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초월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관해서도 천상에서는 미리 알 수 있어요. 그런 사실을 지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천상적인 존재가 그것을 알려주는데 환시나 환청을 통해서 알려줘요.
환청은 쉽지만 환시는 우리가 더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오늘날처럼 스마트 폰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장면, 장면으로 환시를 해요.(슬라이드처럼), 그런데 각각의 장면들은 논리적으로 연관될 필요가 없어요.
따라서 묵시 문학을 읽을 때 제일 헷갈리는 것은 앞에서 읽은 것과 연결이 되지 않을 때(앞에서는 독수리라고 해놓고 갑자기 사자가 나와?)
그런데 묵시문학을 한 사람들은 그게 너무나 당연해요. 첫 장면에서 독수리가 나왔고 둘째 장면에서는 사자가 나와도 본 대로만 이야기하니까.
따라서 묵시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서 장면을 끊을 것이냐~~
묵시 문학에서 제일 중요한 단락 나누기.
첫 장면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 둘째 장면도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가? 그렇게 묵시가들(신비가들)은 장면을 보고 기록하는데, 문제는 천상의 초월적인 그들이 지상에 우리들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을 보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 환시나 환청을 다시 한번 해석해 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예언서를 보면,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고요. 그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는 존재가 등장할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요. 그 말씀을 알아듣는 예언자들의 주석이 뒤따라 붙을 때가 있어요. 따라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을 때 어떤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이 천상적인 해석이고? 어떤 부분이 예언자의 해석인가? 이런 부분을 구분해서 읽기 시작하면 조금더 명확하게 이해하실 수도 있어요.
시편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가?라는 것을 단락단락 구분해서 읽기 시작하면 시편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우리에게 들릴 수도 있어요.
묵시 문학에서는 따라서 그것을 해석해 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그 묵시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만든 유행어'앙겔루스 인터프레스‘ 바로 해석 천사, 무언가를 환시하고 그 환시에 대해서 해석해 주는 천사의 도움에 의해서 그 신비를 본 신비가는 비로서 자신이 본 것을 알아듣게 되더라..
이러한 일반적인 묵시 문학을 바탕으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묵시 문학이 종말론과 만나요.
그냥 묵시 문학은 인간이 알아듣기 어려운 상징적인 언어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서 인간이 비로서 알아듣게 되었는데, 그 묵시 문학이 종종 종말론과 만나게 된다고 해요.
그런 경우에는 천상적인 질서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질서가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불완전한 질서가 있는데, 이 천상적인 질서가 지상에서 실현되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시간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는 하는 것이 바로 묵시 문학이 종말론과 만났을 때에요.
따라서 묵시 문학에서는 지상의 질서가 역전돼요.(뒤집혀 버려요)
우리 가운데에서 뒤집힌 질서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 묵시 문학적 종말론=> 그리스도적인 종말론에 영향을 미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그날이 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넌 꼴찌해야 해. 일등을 하면 큰일 나." 하고 말하지 않죠?
그 말씀의 의미는? "모든 것이 뒤집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질서가 아닌 전혀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세상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도 있죠. 예를 들어 중세나 혹은 이조 시대 때의 누군가를 만나서 민주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당시의 임금은 하느님이 뽑은 자였어요.
중세의 대관식은 주교님이나 교황님이 했어요. 당시에는 임금이 틀렸다 할 수도 없었고 끌어내릴 수도 없었어요.
당시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나라님'이라고 했어요. 대통령이 며칠 전 신문에서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대통령은 국민이 뽑은 거죠.
따라서 다른 법 같은 경우와 달리 헌법을 대통령이 어겼을 경우에는, 탄핵을 당하는 거예요. 대통령의 권력은 절대 권력이 아니에요. 요즘의 우리들은 사회적인 틀 안에서 중요한 체험을 하나 했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최종적인 권위는 누가 갖는다??"
헌법이 갖는다. 누구도 헌법을 위배할 수는 없다. 물론 국민들이 마음을 모아서 헌법을 고칠 수는 있어요.
대한민국 국민이 정말 기억해야 할 사건은 1987년 국민에 힘으로 헌법을 바꾼 사건입니다. 대통령 직선제로 뽑는다. 그 한 줄을 바꾸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섰어요.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그리스도적인 종말론의 가장 단적으로 표현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 세상의 질서가 전혀 새로운 질서로..
루카는 이를 단순하게 이해해서, 가난한 사람은 넉넉해지고, 넉넉한 사람은 가난해진다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부자와 라자오의 비유"를 잘 읽어보면 부자가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하늘나라에 가니까 벌 받더라~~ 예전에 주석가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이 나쁜 짓을 했을 거 아니야? 그는 라자로를 도와주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벌 받은 거야." 하는 해석을 합니다만, 이런 의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은 종말론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았던 이 세상의 질서와 이제 우리에게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다르다.
오늘날 윤리신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천국과 지옥은 다른 장소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모두 하느님 나라인데 그 나라를 어떤 사람은 천국처럼 느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처럼 느낄 거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혜택과 권력을 누리며, 교통질서를 어겨도 "나 누군데?!"라는 말로 모든 특혜를 받던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그때부터는 지옥이겠죠?
본당 신부 직무를 하셨을 때 여느 신자가 "신부님, 이분이 누구누구 신데요...." 하고 말하면 겉으로는 아무말도 안 하시지만, 속으로는 '그런데요???'🧐
그런데 "저 백주간 식구입니다." 하면 😄가족이니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서 신부님들은 편할까요? 고생할까요? 특히 성당 안이라는 영역 내에서는 대우를 많이 받으셨기에,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서 하느님 나라에 가서는 많이 힘들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보신다고...
묵시 문학은 천상과 지상의 것이 나뉘어, 천상의 것이 지상에 무엇을 알려주는데, 그 내용이 종말일 경우에
"천상의 이상적인 질서가 이제 지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지상의 질서가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라는 그림을 묵시 문학의 종말론은 갖고 있더라.
다니엘서는 특별해요.
개신교 성경에도 다니엘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하고 말해도 정답이고 "없어요." 하고 말해도 정답이에요.
다니엘서가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다니엘서는 1장부터~ 14장이고
개신교가 갖고 있는 다니엘서는 1장~12장이에요. 13장, 14장이 빠져있어요.
그리고 3장의 뒷부분도 개신교 성경은 갖고 있지 않아요.(아자르야의 노래, 세 젊은이의 노래→ 시문학이라고 함)
왜 빠져있을까요?
다니엘서 13장과 14장, 그리고 3장의 뒷부분은 그리스말로 쓰여 있어요. 따라서 히브리말과 아람어로 된 텍스트에는 전해져 있지 않아요. 부분적으로만 개신교 성경에 다니엘서가 들어가 있고 가톨릭 성경에는 그 분량이 훨씬 많아요.
그렇다면 그 나머지인 다니엘서 1장~12장은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있느냐? 아니에요^^
성서 공부를 하실 때 한 일 년 동안 히브리어 공부를 죽어라 열심히 하시는데.. 잠꼬대를 히브리말로 할 정도로...
외국어를 배울 때 꿈을 외국어로 꾸게 되면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른 거라고...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음으로 아람어를 배워야 하셨다고 해요.
왜냐면? 구약 성경의 몇 부분이 아람어로 쓰여 있어서고 그중에 대표적인 게 다니엘서예요.
다니엘서 2장 4절 뒷부분~ 7장까지가 아람어.
그런데도 다행히 히브리말과 아람어가 가까워서( 우리가 일본 영화를 볼 때 아는 단어가 등장하듯이),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정도로 가깝다고 해요.
신부님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공부하실 때, 전 세계의 신부들이 다 모였는데 이탈리아어를 가장 못하는 신부들은 스페인 신부들이셨다고.... 다 알아들으셔서 따로 배우질 않았다고 해요.(그리고 로마에서 교수님들이 스페인어로 적어도 다 받아주셔서 어렵지 않으셨을 거라고)
우리가 서양 사람들에 비해서 일본어를 빨리 배우는 것처럼 히브리어를 배우면 아람어도 빠르게, 히브리말 1년 정도면 아람어는 두 달 정도면 책을 읽을 정도로 가능하셨다고 합니다.
다니엘서 1장 1절~ 2장 4절, 8장~12장은 히브리말.
오늘날 다니엘서를 연구한 주석가들은 13장과 14장은 나중에 붙어온 것이고, 1장~12장이 본래 아람어로 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람어가 쓰여있다면은 그 문헌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가치가 약해지는 것으로 보아 부분적으로 히브리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아마도 두 사람이 하면서, 한 사람은 앞에서부터 하고 다른 사람은 뒤에서부터 하는 것으로)
그 말이 꽤 일리가 있는 게, 이스라엘이 유배를 가고, 주전 587년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 50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런 그들이 히브리말을 할 줄 알았을까요? 아마도 히브리말을 못 했을 겁니다.
당시에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람어였어요.(자기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와 그리고 아람어)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에 가보면은 그 나라에 공용어는 영어인데, 각각의 지역지역들의 부족들은 자기 부락의 언어(방언)를 써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서도 소아시아부터 팔레스타인 전체의 지역의 공용어는 아람어였고,
아람(오늘날의 시리아)
또 요즘 시리아는 약간 언어가 다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고대 근동(셈족)의 바탕언어는 아람어였어요.
신부님이 아람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그쪽 사람들이 대개 반가워했다고 해요. 왜냐면 그들도 학교에서 우리가 고문을 배우듯이 공부하니까.. 자신들이 공부한 아람어 문장을 보여주면 "어? 이거 무슨 뜻이네!"라고 하면 엄청 기뻐했다고.
따라서 제2 성전시대에, 587년 이후 유배에서 돌아온 그들은 히브리말을 할 줄 몰랐어요.
그런데 히브리말이 성전에서는 사용이 되었어요.(제사를 지낼 때: 제의적 언어였던 히브리어)
일상적인 언어였던 아람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도 멜깁슨이 원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대사가 아람어와 라틴말로 되었어요.(히브리어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성모님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부를 때 "요수아"라고 불러요.(예수님의 히브리말 이름은 "여호수아"인데, 아람어로"요 수아")
당시에 히브리말은 지식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언어.(그 당시 히브리말은 한다는 것은 읽고 쓸 줄을 안다, 약 1%의 사람들)
신부님 어릴 적만 해도 읽고 쓰는 걸 못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부모님도 일제강점기 때 중고등학교를 다니셔서 우리말 맞춤법이 엉망이셨다고.. 어머님의 경우에는 글을 쓰실 때 신부님이 맞춤법을 가끔 도와주셨다고 해요.
그런데 나중에는 신부님도 그렇게 되셨다고 해요. 유학 후에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 맞춤법이 바뀌어서....
맞춤법 책을 사다가 다시 열공하시고... 또 몇 년 전에는 독일로 공부하러 갔는데 그곳이 맞춤법이 또 바뀌어서...
'야.. 사람이 산다는 건, 참 힘든 거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니엘서는 아람어로 쓰였는데 그들이 어떤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 같다. 원본은 아람어일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원본이 아람어일 것이다고 짐작되는 성경이 있어요.(발견되지 않아서 가설로 남았는데, 바로 마태오복음은 본래 아람어로 쓰였다가 그리스말로 번역되었던 것 같다. 일반적인 그리스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억지로 번역한 듯해서)
마태오복음과 루카 복음에 예수님 말씀이 나와있는데 다릅니다.(그리스말 문장일 때는 다른데, 역으로 히브리말로 번역하면 같은 말 문장이에요)
아마도 마태오복음도 아람어 원본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다니엘서 1장
다니엘이 바빌론으로 가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의 신분에 대해서 나와요. 바빌론으로 가서 포로 생활을 하는데 느부갓네살(네부카드 네자르)임금이 이 포로들 중에서 똑똑한 이들을 교육을 시키게 했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교육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 교육생들에게 식사가 제공되는데 유다 율법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을 먹으라고 하는 거죠.(예를 들어 돼지고기)
다니엘은 이것을 못 먹겠다고 하자, 시종장은 그것을 안 먹으면 임금에게 혼난다고 말하였지만 다니엘은 물과 채소(요즘의 말로 비건)만 달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일주일이나 한 달 후에 자신들의 모습을 보라고 말했죠.
나중에 그들의 모습과 능력은 출중하였고 바빌론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내용
1,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다니엘은 율법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그런 그들을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궁중에서 좋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질문
다니엘서 1장은 묵시문학입니까? 아니에요. 다니엘서 1장은 지혜문학적 역사설화예요
다니엘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왔고, 구약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을 경외함이다."
그런 지혜로움이 돋보여서 바빌론의 왕실에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어요.
2장 네부카드네자르가 꿈을 꾸어요(유다를 멸망시킨 바로 그 임금)
마치 요셉이 끌려간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꿈을 꾸었듯이, 임금은 바빌론에 있던 꿈을 해몽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고대 시대에서 무언가가 풀리지 않았을 때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찾아가는 현인들이 있는데, 그 현인들이 주로 하는 일은 천체를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우리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매일 쓰는 달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역사적으로 고대로 고대로 가다 보면은 이집트의 현인들이 나옵니다.(아! 별모양이 바뀌고 바뀌는데 결국은 같은 위치로 돌아오네! 이것을 연구하는 이들은 자기가 발견한 별자리에 이름을 붙여요. 결국 동일한 모양을 유지하면서 움직이는)
그리고 그들은 주술을 해요, 고대 근동에서는 점을 치는 것은 집짐승을 죽여서 그 내장을 보고서 점을 쳤다고 해요. 이 전통을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너무도 잘 지켜서...
신부님도 점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주로 변호사들이 개업할 때 점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여러분이 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사제인 신부님에게로 오라고~~~~~신부님들도 그런 능력이 꽤 있으시다고^^
고백소에서 열 분 중에 한 분은 이런 말을 하신다고 해요.
"신부님, 저 안 가려고 했는데요. 옆집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해서... 또는 재미로 봤어요."
하지만 재미로 안 끝나요.
인간이 그런 것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고, 교육 수준과도 관계없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확증 편향이 있어서...
미국인들 중에도 아직 0.3%는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고 있다고 해요.
서울대 의과 교수님 중에 한 분은 코로나 백신에 마이크로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다고 믿고, 신천지에 대학 교수가 많이 있고,,, 서울대학교에 원리연구회가 있는데 그 동아리는 통일교 신자들...
사람들의 지능과는 상관이 없는 듯해요.
무언가 하나에 집착과 확증 편향이 생기면 다른 게 보이지 않아요. 신부님도 가끔 사회를 보는 면에서 때론 확증 편향적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신다고.... 왜냐하면 신부님에게도 상처가 있고(군사독재 시절에 보낸 학창 시절을 보내셔서, 그런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확증 편향이 있으시다고),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와 6,25를 체험하신 분들도 또한 그런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으실 거예요.
늘 자신을 검증해 보신다고 해요. '내가 확증 편향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예를 들어 군사독재와 관련된 당에 대해 선거 때 무조건 X표 하지는 않은가?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리고 그러한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드린다고.
주술에 빠진다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에요.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현인들을 찾아서 현인들이 와요.
"야! 내가 이런 꿈을 꿨는데 무슨 뜻이야?"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포악했는지...."내가 꾼 꿈을 너희가 해몽해야겠어. 그런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려주지 않을 거야!!"(꿈까지 맞추라고??? 난감한 현인들 ㅜㅜ)
이탈리아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 점쟁이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자신의 사무실 입구에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란 없다!" 하고 써 놓았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서 사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점쟁이가 "누구세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 하고 말하고 돌아갔대요. ㅎㅎㅎㅎ
그런데 현인들이 모르겠다고 말하니, 느부갓네살이(네부카드네자르) 모든 현인들을 죽이라고 지시를 해요. 결국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자. 근위대장이 오고 다니엘과 근위대장이 잘 이야기를 하고 다니엘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가서 꿈도 맞추고 그 해몽도 해줘요.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큰 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꿈에 대한 해몽이 다니엘서 안에서 이어질 세상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니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자, 다니엘의 해몽을 다시 요약해 보면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아! 임금님! 하느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을 좋게 보셔서 당신의 나라는 굳건합니다. 그런데 당신 다음에 조금 그렇지 못한 나라가 나타날 것이고, 또 그보다 못한 나라가 나타날 것이고, 또 그보다 못한 나라가 나타나다 결국엔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 나라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면서 영원 무궁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살짝 운을 뛰우는데, 결국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더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반전: 죽지 않고 더 놓은 위치에 오르고)
3장에서는 다니엘이 등장하지는 않아요. 세 친구만 등장하고
네부카드네자르가 누군가의 상을 만드는데 신상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그 금상은 네부카드네자르의 자신의 상. 바빌론의 많은 기록 중에 자신의 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이것은 후에 헬레니스트 제국에서 발견!!
유다를 멸망시킨 것은 바빌로니아 -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에서 멸망 - 페르시아(이란)는 알렉산더 제국(그리스)에 의해 멸망-
따라서 바빌로니아 -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스트 제국- 로마 제국으로.
이 헬레니스트 제국의 황제들은 자기의 상을 만드는데 그 상을 섬기게 하였어요. 자신을 신격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권력가들의 꿈(한반도에서는 김일성과 박정희)
루마니아에 차후세스쿠라는 독재자는 끊임없이 한반도를 연구했다고 해요. 박정희를 추앙하는 이들은 "박정희는 반신반인이었다고..."
신부님도 그와 관련해서 영향을 받으셨는데 박정희가 시해될 무렵인 고3 학생 때, 굉장히 불안해했다고.... 당시 대한민국 70~80%가 그와 같았을 거라고... 박정희 대통령이 없으면 우리가 공산당을 어떻게 막지? 그러한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셨기에.
그리고 대학에 가 한국사나 다른 기록을 공부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이상한 반공 교육을 받았구나.' 알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금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게 한 다니엘서에서 그 친구들은 그것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죠. 하난야와 미사엘, 그리고 아자르야는 결국 고발을 당해요. 그들은 불가마에 들어가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죠.
그러자 아자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세 젊은이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요. 그 모습을 본 네부카드네자르도 그들(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에게
3,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칙령을 내립니다.
3,96 어떠한 민족이나 나라나 언어권에서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 욕되는 말을 하는 자는 사지가 찢겨 나가고 그의 집은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이처럼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신은 다시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자신이 믿고 있던 마르둑을 버리고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신적인 상황에서 다른 민족의 신을 존중하는 모습.
예를 들어 엘리사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구출하자, 나아만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향에 돌아간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유다 땅에서 흙을 가져가 아마도 제단을 쌓았을 거고, 자신을 고쳐준 이스라엘 신에게 재물을 바쳤을 거예요.
다신적인 신관에서는 자기가 믿는 주신이 있었고, 각 가정마다 자그마한 제단이 있었는데도(가정신들=주신) 감기를 낫게 해 준 신에게 절을 했다고 해요.
"여러분은 그러면 안 됩니다!!"
신부님 아시는 분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분도 천주교 신자인데 형제들 중에 개신교 신자, 불교 신자도 있어서 어머니를 위해서 다 넣었어요. 그분께서 신부님과 친하셨기에 "어디 한 군데는 걸리겠죠?"라고 말하셨다고 ㅎㅎㅎ
파스칼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있든 없든 믿는 게 손해 볼 것은 없다. 없으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고, 있으면 잘 걸린 거고..."
가끔가다가 어느 신부님들이 파스칼을 인용하시는데, 신부님은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신다고!
"아! 믿져야 본전이라." 라는 파스칼의 말이 오늘날에는 효력이 없어요. 믿져야 본전이니 믿고 보자면 천주교 성당에 가야 하고 개신교 예배당에도 가야하고 절에도 가야 하고, 이슬람 모스크에도 가야하고, 신천지에도 가야 해요. 보험 드는 기분으로 말이죠.
우상 숭배의 시작인 거죠.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런 신을 말한 게 아니죠.
비슷한 일이 예수의 죽음에서 일어납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로마의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보면서 "아, 저분이야 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하였지만 그 백인 대장이 개종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초대 교회의 역사 설화를 보면 다 개종했지만.
요한을 죽이라고 했던 살로메도 그리스도교 신자로,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 병사도 개종하고, 백인 대장도 다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해요(역사 기록들을 보면, 하지만 그리스도 교의사가 들은 거기에 역사적인 정확성을 부여하진 않아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더라... 고백의 정도로... 기록
자, 지금까지 본 1장~3장이 첫 번째 묶음입니다.
1장~ 3장
4장~6장
7장~9장
10장~12장 네 묶음으로 묶습니다.
4장은 오롯이 다니엘의 이야기. 다니엘이 임금의 꿈에 대해 해몽을 합니다.
4,21 임금님, 꿈의 뜻은 이러합니다. 그것은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 내리신 가장 높으신 분의 결정입니다.
22 임금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쫓겨나 들짐승들과 함께 사시겠습니다. 그래서 소처럼 풀을 드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젖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 해를 지내시고 나서야, 임금님께서는 비로소 가장 높으신 분께 인간들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그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겠습니다.
23 또 그 나무의 뿌리등걸을 남겨 주라고 한 것은, 하늘이 세상을 다스림을 임금님께서 깨달으신 다음에야, 임금님의 나라가 임금님께 되돌려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24 그러니 임금님,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니엘의 이야기는 네부카드네자르가 당시 왕좌에서 쫓겨날 것이고, 그랬다가 다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왕좌로 되돌아올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다음, 다음번 왕에게 일어납니다.(이름의 착오가 있는 것이고, 이런 착오가 성경에는 많이 있어요)
바빌론의 역사를 보면 나보니두스라는 임금이 등장하는 데, 그가 바빌론에 있는 종교 권력과 갈등을 빚어요. 왜냐면? 나보니두스의 어머니가 "신"이라고 불리는 달의 신을 섬기는데 본래 바빌론은 마르둑이라는 주신을 섬기는데, 그 마르둑 주신을 신으로 바꾸고 싶어 해요.(국교로 바꾸고 싶어하니 바빌론의 제관들이 싫어하게 되고)
나보니두스는 그 마르둑의 제관들을 보지 않으려고 바빌론을 떠나고,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차르가 통치를 해요(임금이라는 칭호 없이 통치). 그리고 후에 나보니두스가 돌아옴.
바빌론의 임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사가 신년 행사였는데, 벨사차르는 그것을 한 번도 못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어요. 그리고 나보니두스가 돌아오고 바빌론이 애매한 상황(마르둑과 신을 섬기는 그 사이)이 돼요.
나보니두스가 섬기는 신이라는 이름과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나이라는 이름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서 신명기 학파는 시나이 산을 호렙산이라고 불렀어요.(신명기학파가 생길 무렵에 바빌론으로 유배를 갈 무렵이어서 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나보니두스의 이야기가 4장에 녹아있더라~
5장 벨사차르(나보니두스의 아들)가 등장
벨사차르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을 하죠? 시종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식기들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잡신들에게 영광을 찬미하기 시작하는데!! 그때 벽에 손가락이 하나 나타나서 글씨를 써요.
그 글씨가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고 고민에 빠진 벨사차르. 그때 등장하는 다니엘은 글자를 읽어요.
5,25 그렇게 쓰인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당신의 왕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해석해 줍니다. 그런데 벨사차르도 다니엘을 벌하기보다는 약속한 대로 칭찬하고 상을 내립니다. 다니엘의 말대로 5장의 마지막 내용엔 벨사차르가 죽었고, 벨사차르의 죽음은 바빌론 왕국의 멸망을 의미. 다니엘서의 역사적 사건이 역으로 투영된 것.
그리고
6장 다리우스가 등장하는데 다리우스는 메데와 페르시아
다리우스는 메데의 임금으로 등장하는데, 바빌론을 멸망시킨 메데와 페르시아의 임금이에요. 다리우스가 다니엘을 총애하고 사람들은 다니엘을 시기하고 임금에게는 이런 금령을 발표하게 해요. 금령의 내용은 앞으로 한 달 동안 다리우스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다니엘은 아침저녁으로 하느님께 예배하고, 이에 사람들은 임금에게 다니엘을 고발하고 임금은 다니엘을 할 수 없이 사자굴에 집에 넣었고, 사자굴에서 살아난 다니엘은.... 말합니다.
6,23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고발한 사람들을 사자굴에 집어넣고, 그들이 죽게 됩니다.(고대 재판의 방식: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고발하고 그 죄를 꾸며서 고발한 무고죄의 경우, 그 벌을 A라는 사람이 받게 된다)
4장~6장이 한 묶음.
3장에서 세 젊은이들을 하느님께서 불가마에서 보호해 주시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임금은 하느님을 찬미.
여기서도 다니엘의 모습을 보고 임금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같은 사이클이 두 번 돌아갔어요. 그렇다면 묵시문학입니까?
아니에요. 묵시문학적이긴 해요.(임금들의 꿈과 벽에 쓰인 글씨들.. 다니엘이 해석했으니, 그렇지만 묵시문학적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해석할 수 없어야 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인 6장까지는 지혜문학적 역사 설화!!
7장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져요. 다시 등장하는 벨사차르
시간도 다시 역으로 회전.(벨사차르에서 다리우스 그리고 다시 벨사차르로)
벨사차르 제 일년의 이야기예요.
다니엘이 환시를 하고 그 환시에서 동물들이 나타나고, 그 환시를 다니엘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7장에서 유명한 13절~14절의 내용이 등장
7,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독서예요.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사람의 아들 같은 형상을 한 누군가가 나타나, 누군가가 하늘에서 천상적인 존재가 내려오는 데, 그 천상적인 존재가 사람의 형상이었다.라는 이야기
다니엘서의 전체의 이야기를 잠깐 보게 되면,
종말 때는 하느님 나라 질서가 지상에서 시작되는 데, 그 질서를 유지, 혹은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 형상의 누군가가 내려와요. 그리고 그 밑으로 천사들이 배치되고, 각각의 천사들이 각각의 지역들을 다스리는데 바빌론,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데 그 이스라엘을 담당하는 천사가 미카엘이에요.
그 천사들 간에 싸움도 일어나고, 그 전체를 관장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 형상을 한 존재.
그런데 이 다니엘서의 내용이 굉장히 인상적이라, 이 부분을 조금 더 발전시키게 되고...
"사람의 형상을 갖고 있는 자"를 그 묵시문학에서는 그냥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러요.(신약성경에서도 인용되는 구약 묵시문학 :에녹서, 바룩, 마카베오 4서, 에즈라 4서에서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태초에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인데 하느님이 계속 감추어 놓았던 존재였어요. 살짝살짝 한 번씩 드러낸 존재, 그 태초에 있었던 존재가 종말에 지상에 이상적인 질서로 바로잡기 위해서 내려오는 사람의 아들이 있다. 아주 이상적인 인간이다이라고 구약의 외경인 에녹서에서 사람의 아들을 언급함.
이게 신약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자신에 관해서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부를 때 유일하게 부르는 경우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에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러요.
여기서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레벨에는 여러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차원에는 예수가 "로마의 황제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부르겠다."라고 했을 때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다니엘서뿐만 아니라 에제키엘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나는 예언자다!라는 의미.
두 번째 차원은 종말론적인 지배자, 주권자라는 의미로,
오늘날 주석가들은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나는 로마의 황제같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고 그런 에제키엘 예언자의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주권자라는 의미는 예수 자신이 한 것인가? 아니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부여한 추가적인 의미냐? 가 주석가들의 의견이 반으로 나뉘어요.
오늘날 신약성경의 저자들에게 가장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중에 하나였다가 요즘에는 아무도 해결하려 않는 문제에는 예수의 자의식이에요.
역사적 예수는 과연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어떤 자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자기 자신을 실제로 신적인 존재로 생각했겠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겠는가? 딱 반으로 나뉘어 이백 년 동안 싸웠는데, 오늘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아요.
언제가 되면 알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가면 예수님께 물어보실 거라고^^
"예수님~~! 자기 스스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스스로 신성에 대해서 인식했어요? 아니면 예수님은 워낙 겸허한 분이라서, 하느님께 충실한 인간으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요.(다섯 가지 질문 중에 하나라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신학적으로 발전했거나,
에제키엘의 단계가 있고 그다음에는 다니엘의 단계가 있고, 다음에는 에녹서와 같은 외경인 묵시문학의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신약성경의 단계가 있더라!!!
결국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예수님 자신에게 쓰는 특별한 상황을 신약 성경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
7장까지는 아람어, 8장부터는 히브리말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오면서 1인칭으로 바뀝니다. 다니엘이 "나"에 관해서 이야기해요.
히브리어 1인칭으로 다니엘이 환시를 이야기하는데 숫양과 숫염소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환시를 알아듣지 못하자, 가브리엘 천사가 해석천사로 등장~~
8,17 그러자 가브리엘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깜짝 놀라 엎드렸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사람의 아들아, 깨달아라. 환시는 종말의 때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다니엘이 현재에서 겪고 있는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제국에 대한 것들이 숫양과 숫염소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결국 사라지고 하느님 왕국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라고 해석을 해줍니다.
일흔 주간의 해석을 하면서, 마케베오 항쟁, 하스모니아 왕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9장은 다니엘이 성경을 펴고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다가 거기에서 나오는 70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가브리엘이 나와서 70주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석을 해줍니다. 이 일흔 주간 동안 이스라엘이 겪게 되는 일.
7장, 8장, 9장을 한 묶음으로 보고 그것은 모두 묵시문학인데 8장과 9장에서 동일한 해석천사가 등장(가브리엘)
마지막 묶음인 10장~12장에 등장하는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백성들을 위해서 3주 동안 삼베옷을 입고 고행하는데 그에게 환시가 보여지고 그 환시에 대해서 다시 등장한 해석천사.
10,20 "너는 내가 왜 너에게 왔는지 아느냐? 나는 이제 돌아가서 페르시아의 제후 천사와 싸워야 한다. 내가 그 일을 마치면 그리스의 제후 천사가 올 것이다.
각각의 천사들이 있는 거죠^^
10,21 이제 나는 진리의 책에 적힌 것을 너에게 일러 주려고 한다. 너희의 제후 천사 미카엘 말고는 나를 도와 그들을 대적할 이가 없다.
따라서 다니엘에게 내려온 해석천사와 이스라엘에 배정된 미카엘 천사가 이제 그리스나 페르시아의 제후 천사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11,1 나는 이미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제 일 년에 미카엘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를 뒷받침해 주려고 나선적이 있다.
따라서 10장, 11장, 12장에서는 앞선 7장, 8장, 9장에서 등장한 가브리엘이 아닌 미카엘 천사가 등장.
12,1 그때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내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12,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12,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 다니엘서가 마무리됩니다.(11장, 12장)
12,12 행복하여라, 천백삼십오 일이 될 때까지 견디어 내는 이들!
12,13 그러니 너는 끝까지 가거라. 너는 잠들어 쉬겠지만 끝 날에 일어나 네 몫을 받을 것이다."
천삼백삼십오일! 여기에 관해서 다니엘서 연구가들이 무지 많이 연구를 했어요.
연구의 결과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가설들이 있긴 한데, 오늘날 다니엘서는 연구한 주석서를 읽어 보면, 모르겠다.
하지만 천삼백삼십오일은 긴 시간이지만, 견뎌봐!!
너는 죽겠지만 끝날에 일어나 네 몫을 받을 것이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안 나왔지만(부활은 마카베오기서에 가야 등장)
다니엘에서도 부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더라.
하지만 다니엘서가 말하는 부활은 고대의 사상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하면 복을 받게 되어있는데, 하느님께 충실하다가 순교한 이들은 복을 못 받아요. 죽었으니까..
그래서 마카베오기서나 다니엘서에서 부활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거예요.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죽어서 복을 못 받은 이들이 죽었다가도 종말이 되면 다시 일어나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게된다고 말하는데 다니엘서나 마카베오기에서 말하는 부활은 회생입니다. 회생해서 못받은 복을 받고 다시 죽게 돼!!라는 의미.
신약에서도 죽었던 라자로를 예수님이 살리셨는데, 그것은 회생이에요.
신약에서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호칭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죽은 이들의 맏이" 바로 죽었다가 부활한 첫 번째 사람이라는 뜻.
묵시록에 보면 나오는 표현인데요. 죽은 이들의 맏이, 그런데 그 뜻은 다른 사람들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의미.
예수님은 맏이고 둘째, 셋째가 있을 것이다.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을 통해서 그들이 살았던 역사의 현장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으면서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굉장히 힘들지만, 종말에 관해서 희망을 갖고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에 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역사적으로 다니엘서는 악용된 책입니다.
다니엘서가 얘기한 천년 왕국을 실제로 이루겠다고 사람들에게, 이 성경의 말씀이 나에 독재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한 독재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 히틀러가 천년왕국을 이야기했죠.
다니엘서를 인용하면서 자기들이 파시스트 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많은 나라들이 자기들에게 굴복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천년 왕국이고 우리는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이었듯이 우리 독일 아리안민족은 선택된 민족이고, 다른 민족들은 열등해서 우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똑같은 말로 일본은 황국시민이고 조선 너희는 이등이야!!(왜? 이등이라고 했을까요?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혐중 사상은 일제강점기 때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불어넣은 중국을 혐오하는 사상. 그러면서 만주국을 세움)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포장하는, 다니엘서의 잘못된 해석으로 파시스트 제국이 있었던 것은 백 년도 안된 일이에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올바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궁극적으로 모든 하느님의 말씀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복음이라는 정점을 향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타인을 존중하면서 함께 형제·자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도전인가에 대해서 알게 되고 오늘날 2025년을 살아가면서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다니엘서가 얘기하는 지혜로움과 그런 종말에 관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우리 안에서 키워나가고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렇게 힘든 시기를 살았던 사람에게, 종말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망해버려라. 넷플릭스에서 삼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 출발은 중국에서 과학자가 외계인들과 소통하는데 성고하고, 그 외계인들에게 "너희 이런 신호를 자꾸 우리에게 보내지 마! 우리가 지구에 가면 너희는 다 망해!!" 그러니까 그 중국 과학자가 다시 외계인들에게 "지금 지구에는 희망이 없어! 차라리 너희가 와서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겠어."
이 중국 과학자는 공산당에 의해서 아버지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이에요. 그 상황에서 차라리 종말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니엘서의 종말도 지금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희망이 없으니까, 하느님! 이 세상을 노아의 홍수처럼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합시다! 그게 종말에 관한 성서의 첫 번째 단계예요.
조금 전에 부활에 관해서 첫 번째 단계가 있었지만 신약에서 그 부활에 대한 개념이 한번 더 상승하게 되었고, 종말도 마찬가지로 종말도 첫번째 단계를 넘어, 오늘날 그리스도 종교에서는 종말에 관해 세상아, 망해라가 아닌....
지금 우리는 분명히 초월적인 사건이긴 한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종말론적인 묵시문학은 천상의 이상적인 질서가 지상에 실현되는 것!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정말 커다란 축복!!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