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25,13ㄴ-21; 요한 21,15-19
성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16세기 성인이신데요, 젊은 시절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쳤고, 3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13년간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시다가 고해 사제의 권유로 36살에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언제나 친절하고 유머도 있으셔서 거지부터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친구들이 성인의 주위에 모였다고 합니다. 유명한 음악가인 팔레스트리나도 성인을 따르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추종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사제가 되어 공동체에서 성인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구 사제들로 구성되어 영적 독서와 노래, 자선에 전념하는 오라토리오회의 시작입니다.
성인께서 하신 말씀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생에서 지옥에까지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다음에 그곳에 갈 위험성이 크다.” “진정한 하느님의 종에게는 시련이 없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시련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 마라. 나중에 더 무거운 십자가를 발견하리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이에 베드로도 세 번 대답을 드립니다. 대화에서 두 가지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아가판’과 ‘필레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판’하느냐고 두 번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필레인’한다고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를 ‘필레인’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필레인’한다고 대답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에로스(육체적 사랑), 필로스(우정), 아가페(이타적 사랑)로 구분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적인 이타적 사랑을 물으셨으나 베드로가 이에 못 미치게 ‘우정’(필로스)으로만 답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춰 ‘필로스’로 질문을 바꾸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오리게네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틀린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요한복음에서 아가판과 필레인은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요한 5,20)에도 필레인 동사가 사용됩니다. 둘째,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한 가지 동사로 다양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람어에는 '이타적으로 사랑하느냐'와 '우정으로 사랑하느냐'로 구분할 두 종류의 동사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것이고 베드로는 이에 세 번 답한 것입니다.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하게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참회예절을 하면서 ‘제 탓이오’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은 내 삶의 허물과 과오를 하느님 탓이나 주위 환경, 혹은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탓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은 하느님 홀로 전적으로, 완전히 거룩하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정말로 그분을 모른다고, 그분과 나는 상관이 없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수장이 되기 위하여, 이미 배반은 용서 받았지만 형제들 앞에서 그 배반이 극복되었다는 것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너의 죄를 뉘우치느냐?’ ‘앞으로는 잘할 수 있느냐?’ 등등의 질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신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할 때, 붓글씨 쓰시는 분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을 써 달라고 부탁드려 경당 앞에 걸어 놓았습니다. 경당에 드나들면서, 미사를 드리는 이유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면 좋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할 때에, 특히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때, 직무를 맡기기 전에 이 질문을 하셨음을 기억하며 말씀을 되뇌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