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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6
창조적 고통
우리 말에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일부러 자초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매년 마라톤 대회에 출전을 합니다. 전문 육상선수가 아닌데도 매년 출전을 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입상할 정도 실력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된 상을 타본 일이 없습니다. 고작 완주 메달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매년 출전합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생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얻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만히 있으면 고생하지 않을 텐데 괜히 일을 저질러서 고생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고생이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 올 때 후회하기도 합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일을 저질러서 이 고생을 하네!” 그런데 그 고생 을 잘 견뎌낸 후에 달콤한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내가 참 잘했지 고생스러워도 하고나니 이렇게 좋은 것을...”
저명한 크리스챤 상담심리학자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고통보다 깊은(Face La Souffrance)]이라는 책에서 ‘창조적 고통’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고통이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보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는 뜻으로 이 말을 쓴 것입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을 만들어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고통’이다. 그러나 단지 고통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반응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이분은 바로 이 고통이 창조적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빚어가실 때 고통을 도구로 쓰십니다. 그래서 대부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고통의 자리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요셉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생활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또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 생활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런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요셉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요셉의 겪었던 이 고통이 바로 창조적 고통입니다. 원치 않던 고통이지만 이 고통이 나를 빚어갑니다. 마치 볼품없던 원석이 석공의 정을 맞아서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거듭 나듯이 형편이 없던 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바로 이 창조적 고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 7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무너진 성전 재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감격과 찬양 속에서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들이 포로 귀환에 나선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70년 간 터전을 닦고 살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폐허처럼 버려졌던 땅에 와서 살 터전도 일구어야 했고 그리고 성전도 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먼저 저들은 성전재건을 돕겠다고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하자 성전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겁박을 해왔습니다. 그래도 성전 건축이 진행되자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성전 건축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끝에 결국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맙니다.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이 진행되지 못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귀환 후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전건축에 나섰다가 긴 세월 동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귀환에 나서지 않고 페르시아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도 성전 재건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원하여 벌였다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괜히 일을 벌였다고 후회하기도 하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벌였다가 고생할까봐 머뭇거리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겪어내야 할 고통이 너무 커 보이기 때문에 두려워 주저앉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빌 2: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소원으로 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무엇인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인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면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벌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고통의 시간을 갖게 하신 것일까요? 결단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만도 가상한데 바로 성전을 짓고 기쁨으로 신앙생활하게 하시지 않고, 왜 긴 세월을 고통 가운데 인내하게 하신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 짓는 것만으로 끝내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재건된 성전에서 예배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자로 세우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긴 고통의 세월 속에서 새로 지어진 성전에서 예배할 거룩한 백성으로 빚어져 갔던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이 고통은 바로 창조적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이 고통이 저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빚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이 저들을 새로 지은 성전에서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예배자로 새롭게 빚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조적 고통을 주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 고통을 받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통과 맞서십시오. 그 고통이 여러분을 더 멋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고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떤 고통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예배자답게 빚어갔을까요?
1. 선택의 고민
오늘 본문 1-2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포로귀환 후 여호와의 성전 재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적들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적들이 이렇게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자기들도 성전 건축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자기들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들의 제안은 솔깃한 측면이 있습니다. 저들과 함께 성전을 짓는다면 인력 면이나 재정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방해 때문에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훨씬 공사 기간도 단축될 것이고 또한 성전도 더 멋있고 튼튼하게 지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참여시킬 경우 하나님의 뜻대로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사마리아 인으로 혈통적으로 혼혈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우상도 섬기며 하나님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종교혼합주의에 오염될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들은 타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방해를 무릎 쓰고 자기들만의 힘으로 성전 건축을 강행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당연히 저들의 제안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저들의 제안을 뿌리치기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이런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이상의 길로 나갈 것인가? 힘든 선택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선택의 순간에 치열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을 너무 쉽게 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운 고민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차분하게 이상적인 측면을 따져보십시오. 그리고 냉정하게 현실적인 측면도 살펴보십시오.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결정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면밀하게 챙겨보십시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도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고민하면서 깨닫게 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여쭈어보십시오. 그리고 응답을 기다려 보십시오.
이런 과정을 치열하게 밟아가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빚어가실 것입니다.
2. 심리적 압박
오늘 본문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건축 참여를 거절당하자 본격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손을 약하게 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데 “낙담하게 만들다”, “사기를 꺾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기를 꺾어주고 겁을 주어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는 한편” 그리고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땅 백성은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여, 유다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왔는지 소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가 꺾이고 겁을 먹어서 적극적으로 성전 건축에 나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피겨 선수들 가운데 김연아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는 어려서부터 라이벌이었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선수의 실력차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사다 마오는 큰 대회에 나갈 때마다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네티즌들의 악플이 쏟아져서 더 큰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도 실력에 맞는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손을 약하게 하여”라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압박이 또 하나의 큰 고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때 심리적 압박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남들이 반대하는 길로 나갈 때 심리적 압박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제 때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심리적 압박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강한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 손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3. 일의 중단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바사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6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저들이 법적으로 고발하여 일이 중단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축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 채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뜻을 세우고 그 일을 추진하다가 중단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저들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육상선수 칼 루이스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한 뒤 초등학교 축구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코치가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본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축구선수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네가 선수가 된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테고 너는 손가락질과 창피를 당할 거야."
어린 칼 루이스는 깊은 좌절감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육상선수가 돼보라는 권유를 받고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육상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큰 좌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 예수를 영접하게 됐고, 주 안에서 좌절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의 길로 나서게 되었고, 끝내 전설적인 육상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차례 시도하던 것이 무산되고 추진하던 일들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 때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감내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인내하게 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따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좌절을 넘어서 새로운 꿈을 향해 나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우선 선택의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일을 추진해 가는 동안 심리적인 압박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일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것들이 우리에게는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창조적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통을 잘 이겨낼 때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이겨낼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