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다윗 ⅩⅤ (삼상 29:1-11)
영적적용 : 두 종류의 잠재론
요약
블레셋 군대에 포함된 다윗의 군대는 육신에 속한 성도에게 영육간의 생각이 공존함을 의미한다. 블레셋 군대의 위용은 육신 본능의 막강한 기질을 보여준다.
다섯 방백들의 권세가 보장된 블레셋의 통치방식은 마음을 사로잡는 육신의 욕망들을 암시한다. 다윗군대의 가능성은 성도 안에 잠재한 막강한 중생의 생명을 가리킨다.
아벡에 진친 블레셋과 이스르엘 샘 곁에 진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이 전쟁이 진리 전쟁임을 시사한다.
설명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으로 육신에 속한 자의 영적상태이다.
1. 육신에 속한 자에게는 육신이 그 주권을 발휘한다.
2절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1) 두 종류의 군대 - 영혼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의 공존을 가리킨다.
2) 영적 침체시 - 육신이 그 주권을 발휘한다.
2. 육신은 강력한 조직과 힘이 있다.
2절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이처럼 육신적 성향은 강하고 능동적이어서 잘 훈련된 군대보다 더 뛰어나
다.
3. 육신은 단일성 속에 다양성, 다양성 속에 단일성이 있다.
4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의 독특한 통치체제는 본능을 통해 움직이는 육신의 원리를 보여준다.
4. 중생한 성도는 놀라운 잠재력이 가졌다.
5절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방백들이 간파한 대로 아직 육신에 속했을지라도 신자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다.
5. 영적전쟁이란 진리전쟁이다.
1절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곁에 진쳤더라"
1) 아백 - 하천의 더러운 물이듯 마귀는 비진리를 거점으로 진을 친다.
2) 이스르엘 샘곁 - 이 샘물은 진리의 상징이다.
강해
본문은 블레셋의 다섯 방백이 모두 모여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입니다. 블레셋의 일차 집결지는 아벡이었고 이스라엘은 이스르엘 샘곁에 모여 있었습니다.
2절을 볼 때 블레셋은 군대도 많을 뿐 아니라 조직적인 규모가 잘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군대 속에 다윗의 군대가 포함되어 있어 충성을 약속하지 않을 수도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얼마나 후회하고 애통하며 기도했겠습니까?
그래도 조금도 내색조차 할 수없었던 다윗의 입장을 우리는 연상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섭리하셔서 동족과 싸우는 일을 막아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인간의 생각을 따르다가는 이렇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올무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영적 비유는 육신에 속한 자의 영적상태입니다.
1. 육신에 속한 자에게는 육신이 그 주권을 발휘합니다.
2절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지금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까지 나왔고 아기스는 다윗이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군대는 블레셋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혼합된 혼합군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나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칠리 만무합니다.
이 본질이 다른 두 종류의 군대는 우리 성도들의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 종류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영혼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공존해 있어도 본질은 결코 다릅니다. 이 둘은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다만 아직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거나 영적으로 침체상태에 있을 때 육신이 그 주권을 발휘하는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의 이 군대의 조직은 바로 육신에 속한 자의 영적상태입니다.
2. 육신은 강력한 조직과 힘이 있습니다.
2절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이 구절은 그들의 수효의 많음과 아울러 그 조직의 규모가 잘 잡혀 있음을 나타냅니다. 군대는 개인의 용맹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군대는 조직력이 강해야 그 힘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육신적 성향은 블레셋과 같이 얼마나 강하고 그 조직이 능동적이고 강력한지 군대를 훈련시켜도 그렇게는 훈련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주 기계와도 같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나 있듯이 인간의 탐욕적인 본능은 일곱머리와 열뿔입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다 알아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그 힘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3. 육신은 단일성 속에 다양성, 다양성 속에 단일성의 속성이 있습니다.
4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다윗의 전쟁의 출전을 두고 본 블레셋 방백들의 아기스왕과 견해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아기스에게 노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의 방백들은 그 권세가 막강했습니다. 왕은 상징일뿐 나라의 일은 이 방백들이 결의하여 처리합니다. 이것이 블레셋의 독특한 통치체제였습니다.
이 방백은 모두 다섯이었는데 이것은 인간의 오각을 통한 탐욕의 상징입니다. 육신의 탐욕의 지배력을 보면 상황에 따라 순간 순간 달라집니다. 어떤 때는 이 욕망이 지배하고 어떤 때는 저 욕망이 지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서로 갈라지지 않고 연합되어 한 목표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몸입니다.
성경은 이 독특한 나라의 통치체제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육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영혼이 육신을 지배하는 방법은 영적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방백들은 다윗에 대하여 그가 지금은 고분고분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그는 결코 돕지 않을뿐더러 전에 사울을 위하여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200이나 바친 것처럽 자신들의 목까지도 베어 사울 왕에게 바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방백들이 다윗을 잘 간파한 것입니다. 실재로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인 그가 이스라엘을 칠리 만무합니다. 전에도 이스라엘을 친다하고서 아말렉을 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신자에게는 속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 영의 새생명이 있습니다. 다만 전쟁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할 뿐 전쟁만하면 그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활기 있는 신앙생활의 영적인 전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의 육신적인 생각을 이길 뿐 아니라 이 죄악과 사단과 환경을 이기고 나아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전도의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5. 영적전쟁이란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진리전쟁입니다.
1절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여러분 아백이 어디입니까? 삼상 4장에 아벡전투 혹은 에벤에셀 전투에서 배운 것처럼 아벡은 '하천바닥, 요새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강바닥으로 건기에만 진침이 가능한 곳으로 물은 물이되 고인 물입니다.
마귀는 물없는 곳에서는 쉴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 뜻은 마귀는 비진리를 거점으로 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10:4에 강력한 진을 파한다고 했을 때 그 진은 바로 인간의 사상과 이론과 생각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선지식 등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을 파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의 새 자화상이 아닌 아담 안의 옛 자화상에 사로잡혀 생각을 복음화시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얼마나 영광스럽고 찬란합니까? 그런데 누추한 현실만 바라보고 실망하고 있다면 사단은 그러한 자를 아주 좋은 거점으로 생각하여 점령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복음화시켜 날마다 마음을 밝게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그곳에 존재할 수가 없고 도리어 성령께서 임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갑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생각을 복음화시키지 못하여 사단에 사로잡혀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는 어디에 진을 칩니까? 이스르엘 샘 곁에 진을 칩니다. 그 물은 세상의 하천물이 아니라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리는 깨끗한 이스르엘의 샘물이었습니다. 이 샘물은 진리의 상징입니다.그러니까 두 군대는 지금 물을 중심으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무엇이다 해도 결국은 성도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스르엘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집니다. 길보아산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스르엘이 어디입니까? 그리고 왜 그들은 서로 남부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북방에 올라와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이 오묘합니다. 무엇인가 암시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르엘은 사사기에서 야빈과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곳으로 야빈은 비진리의 상징이요 구백승의 병거를 몰고 이스르엘 들판을 종횡무진하던 시스라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즉 이 블레셋의 전쟁은 육신의 생각과 싸우는 비진리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에 서서 사단의 모든 시험을 이기심 같이 말씀에 굳게 서서 온전히 승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육신의 다섯 방백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압했다가도 다시 방심하면 또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윗처럼 일시적인 무기력한 상황에 있는지 살펴 보십시다.
확신할 것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이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이 이김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에 서서 생각을 바꾸고 활기있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