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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된 고창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이 영광 불갑사 스님과 군수 꿈에 나타나 불갑사를 외호할테니 갈대숲에 버려진 자신들을 꺼내달라해서 모셨다는 영광 불갑사 사천왕 이야기가 내려온다. 사진 제공 불갑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는 명당자리 찾아 삼만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절을 불태우고 스님을 끓는 물에 튀기면서까지 폐사시킨 비운의 절도 있다.
화재나 전란이 아닌 명당으로 알려진 절의 스님들을 몰살시키고 불을 질러 묘를 쓴 만행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산 149-3 연기사(烟起寺) 외에도 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을 모시기 위해 충청도 가야사를 불태우고 남연군 묘를 썼다고 한다. 전국의 주요 명당이라고 알려진 절터가 그 표적이 된 것이다.
조선 시대 민사소송 사건의 60%가 묫자리 소송(山訟)일 만큼 명당찾기에 혈안이 된 세력가들이 심지어 절까지 묫자리화했던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전라북도 선운사 입구 맞은편 산인 소요산 연기사 터는 방화와 함께 스님들을 끓는 물로 몰살시킨 비운의 절이다. 명당이라는 이유가 남긴 야만의 기록이다.
옛 지도에 흥덕 현에 속하는 연기사는 나오지만, 지금의 선운사는 나오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연기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지레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고창의 동쪽에는 도솔산 선운사가 있고 서쪽으로 소요산 연기사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도에는 연기사만 표기돼 있기 때문이다.
연기사(烟起寺)는 백제 위덕왕 때 소요 대사가 처음으로 산문을 열고 신라 경덕왕 때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소요산 연기사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38개의 암자를 둘만큼 규모가 컸지만, 폐사된 이유는 명당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절이 수많은 전란과 6·25 때 빈터로 폐허가 됐지만, 연기사는 명당이라는 소문 때문에 이를 탐낸 전라 관찰사의 만행으로 폐허가 된 경우다.
당시 전라 관찰사는 자기 부친 장성부사를 위해 집안의 선산 명당자리로 연기사를 주목하고 관군을 동원, 야밤을 틈타 연기사를 불 지르고 이에 놀란 스님들을 미리 준비한 큰 가마솥에다 튀겨 죽이는 상상하기도 벅찬 비극을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연기사는 절의 규모가 100여 칸이 넘는 대찰로 수백 명의 스님이 상주했다고 한다.
절을 불태우고 스님들을 끓여 죽여 폐허가 된 절터에 전라 관찰사 아버지와 그의 집안들이 묘를 썼지만 아버지인 장성부사 묘에는 구멍으로 커다란 구렁이 한 쌍이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사람이 아닌 구렁이로 환생해 약장수에게 오히려 돈 벌어주는 뱀 역할을 했다는 것이 구전으로 내려온다.
뱀 잡는 땅꾼이 장성부사가 뱀으로 환생한 구렁이를 잡아 한 마리는 떠돌이 약장수에게 팔았고, 약장수는 구렁이 쇼를 통해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약을 팔기 전에 구렁이를 사람들에게 한번 구경시키고 이 약을 먹으면 구렁이 먹은 것처럼 몸이 좋아진다고 하니 약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약장수는 이 구렁이가 연기사의 처절한 사연과 관련 있는 구렁이라는 소문들 듣고 번 돈으로 절을 짓고 복을 빌었다고 한다.
연기 마을 사람들은 그 구렁이를 장성부사의 혼이 아들(전라 관찰사)의 죗값을 갚기 위해 금사망보(金絲蟒報)로 변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살생의 죄업을 쌓은 관찰사가 금사망보를 받아 구렁이로 환생해서 업보를 갚기 위해 약장수에게 팔려가 돈을 벌게 해 주었고, 그 약장수는 그 돈으로 절을 지어서 다시 구렁이의 업보를 갚아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사망보는 누런 금줄을 두른 구렁이로 태어나는 인과응보라는 뜻으로 구렁이의 몸에 체크 무늬 형태의 누런 금줄이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불가에서는 죄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다음 생에 구렁이로 환생하는 인과응보를 받는다는 설로 죄업 가운데에서도 특히 탐욕이 많은 사람이 금사망보를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이는 욕심 많은 사람은 지상에 남겨 놓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임종의 순간에도 그 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으로 붙기가 십상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재 연기사 터는 연기재 댐 건설로 절터 대부분이 수몰됐다.
다행히 경내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왕이 모셔진 천왕문은 불에 타지 않고 수년 동안 방치됐다가 고창과 마주하고 있는 인근 영광 불갑사를 중창 중이었던 설두스님의 꿈에 나타나 온전히 불갑사를 수호하고 있다.
설두 스님의 어느 날 꿈에 사천왕이 나타나 “나는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인데 지금은 나 혼자만 남아 장연강 갈대 숲속에 버려져 있다. 나를 구해 주면 도량을 보호하고 삼보를 잘 받들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날에 영광군수 꿈에도 사천왕이 나타나 영광군수와 설두스님이 사천왕이 일러준 고창 장연강을 찾아 가보니 과연 사천왕이 갈대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
불갑사의 설두스님과 영광군수는 사람들과 배를 동원해서 사천왕을 장연강 갈대숲에서 건져 올려 큰 배에 싣고 서해로 나가 법성포구를 거쳐 영광 불갑사로 옮겼다. 고종 7년째인 1870년에 천왕문을 짓고 사천왕을 정중히 모셨다고 한다. 영광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 첫 번째로 마주하는 사천왕이 바로 그 연기사 사천왕으로 불갑사를 수호하고 있다.
<사천왕상을 옮기게 된 꿈이야기>
현장스님의 역사 속의 불교 여행 7 출처 : 미디어 붓다
석현장 | | 2018-03-06 (화) 08:16
"나는 지금 흥덕 풍천강가에 서있다. 내가 모시던 부처님과 스님들은 사라지고 연기사는 폐사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비를 맞고 있다. 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옮겨주면 보은하겠다."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는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불타고 다시 재건한 사찰이다. 불갑사 재건에 가장 큰 공을 세운이가 설두스님이다.
하루는 꿈에 사천왕이 나타나 위의 말을 하였다.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고 난 설두스님은 고창 흥덕에 연기사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일단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설두스님은 법성포에서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 포구로 나갔다. 그때 네 척의 배가 포구에 닿았다. 배 한척마다 커다란 사천왕이 실려 있었다.
거대한 사천왕을 싣고 온 배에는 고창군수가 타고 있었다. 설두스님과 고창군수는 고향동무이고 함께 서당에서 글을 읽히던 친구였다. 두 사람은 뜻밖의 만남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설두스님이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들은 고창군수는 놀라며 자기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흥덕사의 사천왕이 꿈에 나타나서 자신들이 비 맞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배 네 척에다 사천왕을 나눠 싣고 법성포까지 가서 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법성포에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흥덕이 고창면 관내이고 너무 생생한 꿈이라서 면민을 동원해서 사천왕을 배에 싣고 지금 법성포에 도착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사천왕상을 법성포에서 달구지 네 대에 옮겨 싣고 불갑사까지 옮겨 모셨다. 1876년의 일이다. 연기사가 폐사로 변하고 수십 년 동안 버려진 채로 있던 사천왕상이 불갑사로 옮겨져 상처를 치료받고 새로운 호법신장으로 태어나게 된 신비한 이야기이다.
불갑사 사천왕상은 목조로 만들어진 작품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보통 사천왕상은 큰 나무를 구하기 어렵고 목조각에 너무 큰 공이 들기 때문에 소조상으로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조상은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으로 형상을 만들고 채색을 해서 마무리 하는 기법이다.
정유재란 때도 불타지 않고 보존된 고창 흥덕의 연기사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창건해서 연기사란 이름을 얻었다. 연기사 유물에서 화엄사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화엄사를 짓고 남은 자재를 가지고 연기사를 지었다는 구전이 사실로 확인되는 소중한 유물이다.
왜군에 의해서도 불타지 않은 연기사는 전라감사 이씨가 장성군수를 지낸 자기 선친 묘를 쓰기위해 한밤중에 무리들을 끌고 들어와 대웅전을 불태웠다. 놀라 일어나 불을 끄는 연기사의 승려들을 장정들이 가마솥에 집어넣어 산채로 끓여 죽였다고 한다.
이후 연기사는 폐사되고 사천왕만 남아 있다가 설두스님과 고창군수의 현몽으로 불갑사로 옮겨지게 된 기막힌 이야기이다.
불갑사는 초가을에 상사화축제를 거창하게 열고 있다. 그때 법성포에서 불갑사까지 소수레에 사천왕 모형을 만들어 옮기면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사천왕 왔데이.‥"역사를 재현해서 사천왕 거리축제를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역사는 기억되고 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