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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9장 1-11절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빌라도의 심문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겠지만,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18:36).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사도 베드로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사건이 있었지만, 그때도 자신의 왕 됨이 칼의 방식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왕이라고 하실 때 왕이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드러내셨던 겁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방식이 칼의 방식이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신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한 나라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목적인 나라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의와 평강과 희락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8장 37절에서 “네가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답하시면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시고자 하신 목적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할 때 그것이 진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깊이 새겨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냥 맺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 안에서만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별강화에서 성령이 곧 진리의 영,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요14:17, 15:26, 16:13).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늘 그분의 뜻, 그가 가르치신 진리를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것이고, 칼의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칼을 빼 들 수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칼을 칼집에 꽂아 넣고 칼에 배인 자들을 치료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보는 것처럼 우리는 칼을 빼 들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는 베드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주께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처럼 빌라도의 심문과 예수님의 답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드러냈지만,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로마에 위협될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 빌라도는 마태복음 27장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시기로 넘겨준 줄 알고(마27:18)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명한 강도인 바라바와 예수님을 저울질하도록 하였는데, 빌라도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강도보다는 예수님을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그 결과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그 과정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죄가 없다는 것 때문에 놓아주려고 하고, 그러한 모습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19장 1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것은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지금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찾지 못하여 놓아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대가 심합니다. 강도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를 놓아 주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저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저들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기 위해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가 없다면 놓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재판 과정에서 죄가 없다고 판단되면 죄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 빌라도는 죄인 아닌 예수님을 놓아줄 용기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유대인들의 협조를 구해서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여 이런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이런 자세에서 그나마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계속해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죄 없는 예수님을 유대인들 때문에 죄인 취급하고 있다는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빌라도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강도 바나바와 예수님을 저울질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아무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죄를 찾아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빌라도의 판단이 좋기 때문인가? 그런 면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좀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판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곧바로 놓아주질 않습니다. 뭔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강도된 자와 비교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의 잘못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채찍질까지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데도 채찍질까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유대인들이 자리하였던 겁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풀어주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눈치를 살피느라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채찍질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모습입니까?
심지어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2절과 3절입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머리에 관을 씌운 것, 자색 옷을 입힌 것은 다 왕의 증표들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왕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조롱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왕은 가시나무가 아닌 금으로 된 관을 쓰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게 했다는 내용도 있는데(마27:29), 세상 왕이 금으로 된 규를 드는 것처럼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갈대로 만든 규일 뿐입니다. 세상 왕과 비교하도록 하는 모습으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한 말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마27:29). 그래서 손으로 때린 것입니다.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진실 된 마음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거짓되게 꿇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손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손에 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는 것으로(마27:30)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빌라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채찍질합니다. 군인들을 시켜 왕처럼 꾸미지만 조롱하고 희롱하듯 그렇게 꾸밀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대인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하면 불쌍해서라도 놓아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데도 죄인 취급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고통을, 죄인이 받는 조롱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마음이 그의 외적 행동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성, 이것이 지금 빌라도의 잘못입니다.
그럼 이런 이중성이 빌라도만의 모습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우리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10)는 교훈 앞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교훈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런 교훈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이중성과 같은 모습이 사실은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압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다른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그런 외적 모습이 익숙해지면 마음까지도 무뎌지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익숙해집니다. 외적인 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그 죄가 익숙해져서 죄라는 인식조차 무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야고보서를 통해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 그것은 신자에게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신다면, 그 말씀과 일치되도록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빌라도의 이런 이중성은 우리와 어울린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하는데, 보통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표현되는 말입니다. 물론 좋은 마음, 선한 마음도 중요합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새겨지고, 그 말씀의 역사로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변화가 시작이지만, 시작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전인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이 좋은 모습, 선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지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믿음에 합당한 행실은 어디 있느냐? 행실이 없는데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참된 믿음인데도 그 행실에 있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믿음에 함당한 행실로 나타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행실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행실이 없다는 것은 참된 신자에게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빌라도의 모습보다 더 심각한 것은 종교지도자들이요, 유대인들입니다. 먼저 6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미 빌라도로부터 죄를 찾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찍에 맞은 예수 그리스도, 조롱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소리를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청할 뿐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적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아랫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그런 만큼 저들은 메시아에 대한 고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오셨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씀에 거짓된 것이 있는가? 그의 행하심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당시 누구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풍성하게 드러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전통으로 말씀을 폐할 뿐이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자가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자, 그것도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한다면 그것보다 더 강퍅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진리를 편들어야 할 자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강퍅합니까?
그런데 빌라도의 이중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강퍅함 또한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만큼 진리를 따라야 할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강퍅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진리만을 따라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분의 긍휼, 그분의 온유함을 따라야 합니다. 조롱한다고 해서,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다고 해서 세상 방식으로 맞서서는 안 됩니다. 저들처럼 칼의 방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5장 마지막에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마5:48).
대제사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의 경우 계속해서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합니다. 너희가 나를 통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너희가 원한다면 너희가 데려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 입장은 빌라도의 말대로 하게 될 때 그것이 더 좋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민란 때문에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마26:5 참고). 그래서 다시금 반대합니다. 대제사장들만이 아니라 이제는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반대합니다. 7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우리의 법대로 하면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신18:20) 이런 측면에서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면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이 자칭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요,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것으로 구약 방식으로 하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때문에 지금 저들의 고소는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고소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확신을 가지고 고소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 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알면서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서 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저들이 모르는가?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철저히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성경의 무지는 곧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무지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무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몰라서 그런 것에 대해 괜찮은 것처럼 하지만, 무지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지로 행한 것도 사실은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랐다고 하면 죄가 감해지는 것처럼, 죄가 없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지로 행한 것도 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자들처럼 무지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주의 말씀에 따라서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적어도 유대 사회 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계속해서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열면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스스로 닫아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는데, 지금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자세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배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엉뚱하게 적용합니다. 알고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마치 신성모독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소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작은 예이지만 지난 4월에 이단 사이비 세미나를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 강사 중 어느 집사님께서 강의를 맡으셨는데, 어느 한 이단과 관련해 실제적인 접촉이 있었던 분이라서 초청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분이 쓴 책을 주시면서 그 책으로 강의를 했는데, 그 책의 많은 성경 해석이 틀린 것입니다. 이단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정작 집사님의 해석이 많은 부분 틀리더란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책을 내도록 권한 것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러나 읽고 묵상하는 것이 ‘내가복음’, 즉 내 마음대로의 복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때문에 건전한 주석, 예를 들어 칼빈주석 정도는 여러분 서재에 두고 읽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성경 전체의 안목을 줄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꾸준히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 것 없이 나 혼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해석한다면 대부분 잘못된 해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역사가 사실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교리가 그러한 것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 지금 유대인들이 이런 오류 가운데 있는 겁니다. 자신들은 확신합니다. 율법에 따르자면 예수는 죽여야 할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성경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한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저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말에 대하여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라고 반응합니다.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하자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두려움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이 빌라도 마음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잠시 주셨는데, 칼빈은 빌라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에 신앙심의 동요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에게 손을 댈 경우 신성모독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갑자기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 앞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신성의 모습은 아닙니다. 온갖 조롱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관정으로 들어가 묻습니다. 9절을 보시면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유대인들은 네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처한다고 하는데, 너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말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주고 받은 말이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말을 통해서도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빌라도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 빌라도에게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야 할 때가 더욱 가까이 왔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정하셨고, 정하신 바는 불변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말로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해야 할 말씀만 하실 뿐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빌라도는 굉장히 무례한 말을 덧붙이는데, 10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하여 빌라도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묻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두려워했던 마음이 언제 있었는지 자신의 권세를 말함으로 협박합니다. 내가 너를 놓은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데, 왜 아무런 대답도 없느냐?
이런 빌라도의 자세는 불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로 인하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다가도 결국 인간은 자기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결국 인간은 자기 본성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때 그들의 본성은 정확하게 빌라도가 말한 부분에 있습니다. 즉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늘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그런 독립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높이게 됩니다. 단순히 권력자라는 의미로서도 볼 수 있지만, 보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높일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교만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이런 교만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물론 권세를 가지지 못한 자에 비해 권세를 가지고 있는 빌라도의 이 말은 거짓이 아닌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권세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모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빠뜨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 안에서는 늘 논쟁 꺼리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도 피조물이라는 것이고, 피조물인 만큼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어서 무지한 자로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결국 죽으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의 말이 맞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치고 그 일을 이루어보고자 하더라도 사실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내 의지로 뭔가를 했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실 때 주신 것이 그 사람의 것이 되도록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둑질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주신 것이 그의 것이 되도록 주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리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주신 것을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거두시기까지 주신 바 되었다고 할 때 주신 바 된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도둑질해 간다면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빼앗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신 분이 거두어 가실 때는 도둑질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욥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은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면 주신 것을 언제든지 거두실 수 있는 겁니다. 의지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의지로 무엇을 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라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나의 악조차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더욱 큰 악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본성인 우리로부터 선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결코 나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빼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빠뜨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빌라도가 자기에게 권한이 있다고 말하는 부분,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의 의지도, 그의 권한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빠뜨린 참은 사실은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참은 무엇인가?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무엇 하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1원인, 제2원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떤 면에서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빌라도는 제2원인을 따라 한 말입니다. 그러나 1원인이 없는 2원인은 없습니다. 11절이 없는 10절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실은 우리가 제1원인이라고 말하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일한 원인이시라고 해서 죄조차 하나님께 돌아가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속성에 죄가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죄를 스스로 내어놓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대한 매튜 풀 주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부분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나눠서 읽어드리면, 일단 빌라도가 재판장인 자기에게는 주님을 무죄방면할 수도 있고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고 자랑하자, 주님께서는 그가 가진 모든 권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이 일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서 작정하신 대로 일어나는 것이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주님은 그의 그런 자랑은 가당치 않다고 완곡하게 나무라시고 바로잡아 주고 계신 겁니다. 아울러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들이 되어서, 주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관여하게 된 빌라도도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도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1절 후반부에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작정대로 되지만 작정대로 된다고 해서 죄를 짓는 그 도구들의 죄가 하나님 탓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데도 결국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빌라도의 죄도 크지만, 그렇게 몰아간 유대인들의 죄는 더 크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빌라도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또한 유대인들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죄의 저자 혹은 죄의 승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을 뜻을 위하여 유기자, 시간의 역사 속에서는 악인을 사용하여 합력함으로 선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빌라도의 이중성도 있고, 당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의 강퍅함도 있지만, 다시 말해 저들은 저들의 것을 내어놓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시면서 그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원수 된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위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위에서 작정하신 바가 없다면 이 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결과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작정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 그리고 빌라도를 사용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그리하여 자기 백성에게 선한 것을 주고자 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정하신 바를 실행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과정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욥에게 주신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주셨던 축복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영적인 것만큼은 주고 또 주고자 하시는 마음으로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신다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주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만큼은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것만큼은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진리로 살펴가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주께서 맺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로 우리를 몰아가야 합니다. 그런 훈련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늘 있도록 자신을 살펴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