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8)
선대의 문벌(門閥)을 이어온 이삼구(李參耈) 선생의 경보재(景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상당마을에 위치한 경보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처사공 이삼구(李參耈, 1681〜1742) 선생이다.
공은 통훈대부 안기도찰방(通訓大夫 安奇道察訪)을 지낸 고성이씨 입청도 선조 모헌공 육(慕軒公 育)의 6세손이다. 5대조는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된 교(郊)이며 고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매전면 동창의 운수정(雲水亭)을 감독하여 건립한 반(礬)이다. 증조는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지낸 수(洙)이며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광시(光時)이다.
공은 대대로 내려오는 문벌(門閥)의 가업을 이어받아 고상한 품격과 덕행을 갖추어 향당(鄕黨)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나 세상에 이름 떨치기를 바라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 재덕을 감추고 살았다. 그러나 그 거룩한 덕행은 음으로 양으로 후대에 전하여져 자손들의 정신적 근본이 되어 집집마다 검소하고 사람마다 성실하며 신의가 있고 선조를 독실하게 받들며 인정이 두터웠다.
후손들은 선대를 받들 재실을 마련하기 위해 합심 단결하여 노력했다. 그 결과 1972년에 목조와가 팔작지붕 4칸을 마을 가운데 마련하여 ‘景報齋(경보재)’라 현액하고 묘향을 차려 올리고 손님과 종친들이 재숙(齋宿)을 할 수 있게 했다.
공의 묘소는 청도읍 사기점 당등 계좌(沙器店 堂嶝 癸坐)에 있고 배위 청도 김씨도 같이 모셨다.
족후손(族後孫) 우기(宇基)는 ‘경보재 기문’에 “근원이 깊으면 넓게 퍼져서 함께 모여 화목하고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함에 이처럼 간절하고 경건하게 되었다. 다만 묘소와 재실이 거리가 떨어져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한편 고향 마을에 있으니 후손들이 추념의 공간으로 삼아 정성을 드리기 좋은 점도 있다.”고 했다.
많은 후예들이 공의 뜻을 받들어 사회 각계 각층에 이름을 올려 공헌했는데 종억(鐘億)은 청도향교 전교를 역임했으며 승석(承石)은 현 전교이다. 승두는 6.25 참전 장교로 전역한 뒤 이서면장을 역임했으며 종계(鐘桂)는 청도군 축산 협동조합장을, 종박(鐘璞)은 대구시의 사무장을, 승천(承千)은 서울시내 구청 사무과장을 역임했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 의하면 신촌리 상당 마을에 성당제(聖堂堤)가 있었다. 성당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저수지로 마을이 못안골에 자리잡고 있기에 상당(上塘)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웃땅’으로 부르고 ‘상당(上堂)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마을 뒤편에는 오래된 절터가 있는데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다.
행적구역이 통폐합할 때까지 차북면 소재지가 있었던 곳으로 고성 이씨들의 집성촌이다.
이날 경보재를 방문했을 때 전교인 승석, 종도(鍾道), 종득(鍾得), 태동(台東), 전임이서면장인 희태(羲泰) 씨등이 재실을 안내하며 가문의 내력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경보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문벌 높은 가문의 거룩한 어진 덕행
그 자취 받들어 뜻을 이은 후대들
오늘도 선대의 은덕 느꺼워 기린다
첫댓글 고성 이씨 가문의 내력을 조금은 배워 갑니다~~^^
더운 날씨에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항상 관심있게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