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春雪)
新年都未有芳華신년도미유방화平平平仄仄平韻
二月初驚見草芽이월초경견초아仄仄平平仄仄韻
白雪卻嫌春色晩백설각혐춘색만仄仄仄平平仄仄
故穿庭樹作飛花고천정수작비화仄平平仄仄平韻
한유(韓愈)
새해가 왔건만 꽃은 아직 없다 보니
이월 초에 놀랍게도 풀의 싹이 보이네
흰 눈이 오히려 봄이 더디게 옴을 미워하여
뜰나무 사이로 눈꽃을 날리고 있네.
이 시(詩)는 당송(唐宋) 팔대가(八大家) 중 한사람인 한유(韓愈)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화(華), 아(芽), 화(花)다. 화(華), 아(芽), 화(花)의 운목(韻目)은 하평성(下平聲) 마통(麻統) 운족(韻族)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은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대로 작시(作詩)하였다. 압운(押韻) 운통(韻統)도 하평성(下平聲) 한 운통(韻統)으로 작시(作詩)하여 당풍(唐風)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을 따른 시(詩)다. 오랜만에 보는 한유(韓愈)의 춘설(春雪) 시(詩)는 시격(詩格)을 갖춘 시라 그동안 여러, 시(詩)들을 평측운을 맞추어 보았던 감회가 남다르다. 새해가 되어서 이월이 되자 새싹이 돋아나는데 꽃은 볼 수가 없는데, 고향 뜰에 와서 보니, 나무가지 위에 백설 하얀 눈꽃이 꽃 대신 피었다는 춘설시(春雪詩)다. 한유(韓愈)는 가도(賈島)에게 퇴고(推敲)를 알려준 일자사(一字師)로 유명(有名)하다. 韓愈(한유)는 당(唐)을 대표(代表)하는 문장가(文章家)이고 정치가(政治家)이며, 사상가(思想家)이다. 당송(唐宋) 팔대가(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호(號)는 창려(昌黎)이며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 등주(鄧主)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출신(出身)이다. 한유(韓愈)는 불교를 배척(排斥)하는 배불론(排佛論)으로 불교(佛敎)와인연(因緣)이 깊은 사람이다. 그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중화사상(中華思想)과 도통론(道通論)의 관점에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이단시(異端視)했다. 그의 원도론(原道論)을 보면 널리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라 하고, 인(仁)을 행하여 이치에 마땅하게 하는 것을 의(義)라 한다. 이 인의(仁義)로 말미암아 따라가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이 인의도(仁義道)를 자신(自身)에게 충족(充足)이 되어서 밖에 기대함이 없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인의(仁義)는 고정(固定)된 이름이고, 도(道)와 덕(德)은 빈자리다. 그러므로 도(道)에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있고, 덕(德)에는 길흉(吉凶)이 있는 것이다.<博愛之謂仁 行而宜之之謂義 由是而之焉之謂道 足乎己無待於外之謂德 仁與義爲定名 道與德爲虛位 故道有君子小人 而德有凶有吉> 또 말하기를 노자(老子) 인의(仁義)를 하잖게 여기는 것은 그것(仁義)를 헐뜯는 것이 아니요, 그의 견식(見識)이 작았던 까닭이다. 우물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하늘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이 실재로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그마한 은혜를 인(仁)으로 여기고 자그마한 지조(志操)를 의(義)라 여겼다. 그러니 그가 하잖게 보는 것은 마땅하다.<老子之小仁義 非毁之也 其見者小也 坐井而觀天曰天小者 非天小也 彼以煦煦爲仁 子子爲義 其小之也則宜>
한유(韓愈)는 불교(佛)나 도교(道敎)를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보는 피상적(皮相的) 논리규정(論理規定)이다. 한유(韓愈)는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4년(819)에 황제(皇帝)가 봉상(鳳翔) 법문사(法門寺)에 가서 불골(佛骨) 사리(舍利)를 모셔오도록 명령(命令)하자, 형부시랑(刑部侍郞) 한유(韓愈)는 논불골표(論佛骨表) 을 올려 강력(强力)하게 그 부당성(不當性)을 주장(主張)하여 논쟁(論爭)을 야기(惹起)했다. 중국불교사상사(中國佛敎思想史)에서 유명한 사건(事件)이다. 헌종(憲宗)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보고 극도로 분노하여 한유(韓愈)를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左遷)시킨다. 그는 불로(佛, 老)의 도를 막지 않으면 유가(儒家) 도(道)가 전파(傳播)되지 않고, 실행(實行)되지도 못할 것이니, 도사(道士)나 승려(僧侶)를 모두 환속(還俗)시켜서 사원(寺院)이나 도관(道館)을 폐쇄(閉鎖)시키고 책이나 경들도 다 불살라 버리라는 것이었다. 불교는 오랑캐 가르침인 만큼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줄 뿐이고, 불교를 신봉(信奉)한 천자(天子)는 모두 요절(夭折)하였으니, 유교(儒敎)의 권위(權威)를 회복(回復)시키라는 논조(論調)였다. 황제(皇帝)를 분노(憤怒)케 한 한유(韓愈)는 조주(潮州)의 자사로 쫓겨난 후에 조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謝上表)를 올려서 신이 분별이 없고 우직(愚直)하여 예의를 알지 못하고 불골(佛骨)에 대한 표를 올렸던바, 말이 불경(不敬)에 이르렀나이다. 정(定)해진 죄(罪)의 명분(名分)을 바로 잡으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겠나이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불교교리(佛敎敎理)에 대한 피상적(皮相的) 논리(論理)라 나중에는 배불교(排佛敎)를 접고 호불교(好佛敎)로 귀착(歸着)한다. 하루는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조주 고을에서 고승(高僧)이라는 말을 듣고 홍련(紅蓮)이라는 기생(妓生)을 시켜서 파계(破戒)시키라는 명(命)을, 내렸다. 태전선사가 아무리 덕이 높은 고승이라고 하더라도 저 미모(美貌)의 홍련(紅蓮)이 백일간(百日間) 파계(破戒) 타락(墮落)시키고 온다면 불교는 그야말로 하잖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조주 자사로 좌천(左遷)된 울분(鬱憤)을, 삭힐 심사였다. 홍련이 별의별 아양을 떨고 유혹(誘惑)을 해도 태전선사의 도심(道心)은 흔들리지를 않자, 홍련(紅蓮)은 눈물을 흘리면서 삼배를 올리고 자초지종(自初至終) 절에 오게 된 사유 목적(目的)을 이실직고(以實直告)하게 된다.
제가 여기온 것은 한유(韓愈) 자사(刺史) 명을 받고 큰 스님을 파계(破戒)시키려고 왔으나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저는 돌아가면 죽을 것입니다. 큰 스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태전선사(太顚禪師)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고, 네가 입고 있는 하얀 속 치마를 펼쳐라. 홍련이 속 치마를 태전선사 앞에 펼치니, 붓을 들고 칠언절구(七言絶句) 게송(偈頌)을 써 주셨다. 십년 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았고,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 곧 공일뿐이네, 어찌 조계(曹溪)의 한 방울 물을 홍련(紅蓮)의 한 잎새에 떨어뜨리겠는가? 이 게송을 한유 자사에게 보이면 그대는 죽이지 못할 것이다. <十年不下鷲融峰 觀色觀空卽色空 如何曹溪一適水 肯墮紅蓮一葉中> 홍련이 돌아와서 한퇴지 자사를 만나서 태전선사(太顚禪師)께서 써준 게송을 보고 감탄(感歎)을 하면서 하는 말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구나! 내가 친히 가서 뵐 것이다. 했다는 선화(禪話)다. 그 후로 한유(韓愈)가 태전선사(太顚禪師) 찾아뵙자, 선사가 묻기를 어떤 불교경전(佛敎經典)을 읽어보았소? 한유가 특별히 읽어본 경전이 없다고 대답하자, 문장(文章)이 높은 자사(刺史)께서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불교(佛敎)를 비난비판(非難批判) 한단 말인가? 그대는 불서(佛書)도 읽지 않고 선왕의 법언(法言)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안다는 말인가? 그것은 공자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의 잘못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남들이 그릇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지 아니한가? 만약 공자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잘못이라고 의심한다면, 그것은 순(舜)임금의 개(犬)라 할 것이다. 옛날 순임금이 개를 길렀는데, 하루는 요(堯) 임금님이 지나가자 개가 마구 짖었다. 그것은 순임금을 좋아하고, 요임금이 미워서가 아니라, 늘 보아온 것은 순(舜)임금이고, 요(堯)임금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소? 태전선사(太顚禪師)의 법문(法門)을 듣고 한유(韓愈)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태전선사(太顚禪師)에게 귀의(歸依) 독실(篤實) 불교신자(佛敎信者)가 되었다는 선화(禪話)다. 오늘은 한유(韓)의 시제(詩題) 춘설(春雪)로 근체시(近體詩) 평측운통(平仄韻統)를 맞추어 반추(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