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2장 통일교가 세상에 태어나다 2. 피난지 부산에서 새로운 날을 시작하다 흥남을 벗어난 문선명은 평양으로 갔다. 예전 신도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으나 일주일 동안 고작 서너 명밖에 찾지 못했다. 평양에서 40일을 머문 뒤 12월 2일 밤, 신도들을 모아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러진 신도는 자전거에 태워 데려갔다. 얼어붙은 논바닥 위를 걷고 걸어 피난길을 재촉했는데 뒤에서는 중공군이 쫓아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강 근처에 당도하자 한시라도 급하게 강을 건너야 한다는 예감이 들어 김원필을 재촉해 자전거를 끌고 밤새 80리 길을 걸어 임진강에 닿았다. 강물이 꽝꽝 얼어 있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 건너자마자 유엔군이 더 이상 임진강을 못 건너게 길을 차단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쪽에서 피살당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때 김원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은 임진강이 막힐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
"알고 말고지. 하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네. 한 고개만 넘으면 살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네.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이라 여차하면 자네 멱살이라도 잡고 건널 참이었네."
임진강을 건너 서울, 원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1년 1월 27일이었다(이 날을 기념하여 통일교 부산교구는 매해 부림절(釜臨節)을 연다. 문선명이 부산에 내려온 것을 기념하는 날로 2014년에 63주년을 맞았다). 부산은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문선명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에는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낮이면 밥을 얻으러 시내로 내려왔다. 옷차림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거지 중의 상거지였으며 동냥 밥을 얻어먹고 다녔다. 얻어온 밥을 양지바른 곳에 빙 둘러앉아 수십 명이 나눠 먹었다. 그 거지들 속에서 훗날 세계에 이름을 떨친 문선명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곽노필을 만났으나 그가 장교로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졌는데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1월 31일 오후 3시경 40계단 근처 은행 앞에서 일본 유학시절의 엄덕문을 만난 것이다(그런 연유로 통일교 신도들이 부산에 가면 40계단에 들른다). 그의 단칸 셋방으로 가서 엄씨 가족들(아내와 6살 딸, 4살 아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후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문선명의 말에 따르면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3월 6일 엄씨 집을 나온 문선명은 부산 3부두(혹은 4부두)에서 밤에만 하는 막노동 일자리를 얻었다. 품삯을 받으면 초량역에서 팥죽을 사먹었으며 노무자 수용소에 숙소도 잡았다. 대각선으로 누워도 벽에 발이 닿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지만 연필을 깎아 정성스레 「원리원본」 초고를 썼다.
20살을 갓 넘긴 김원필도 온갖 일을 다 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남은 누룽지를 얻어오면 같이 끓여먹었고 미군부대에 취직해 페인트칠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범냇골로 올라가 집을 지었다. 공동묘지 근처라 돌투성이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원필과 함께 돌을 쪼개고 땅을 파고 자갈을 나른 뒤 미군부대에서 얻은 레이션박스로 지붕을 얹고 방바닥에는 검은 비닐을 깔았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잣집의 전형이었으나 안온하고 아담한 집이자 교회였고, 기업이었고, 창작실이었다(이곳은 현재 통일교 성지이자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김원필이 미군부대에 출근하면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원리원본」을 썼다. 김원필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고 4달러를 받았는데 두 사람은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렸고 생긴 돈은 전부 교회를 위해 썼다. 범냇골에 토담집을 짓고 교회를 시작했을 때 문선명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단 3명뿐이었다. 집 앞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물을 길러 오는 사람들 사이에 토담집에 미친 남자가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 문선명의 외모는 실로 초래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얼굴은 검었고(문선명은 그때뿐만이 아니라 평생 얼굴이 검었는데 바다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퍼런 물을 들인 한복 겹바지에 미군 작업복을 입었고, 일본 운동화를 신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미친 남자를 보려고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혼자 오기도 했고, 신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오기도 했고 이화여대 교수들(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이 세워져 이화여대도 합류했다). 「원리원본」을 탈고하던 날 기도를 올리자 한 젊은 여자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올라왔다. 그녀는 고려신학교(지금의 고신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2학년) 강현실(범천교회 시무전도사)이었는데 통일교의 첫 번째 전도사가 되었다. 그때 아내가 7살된 아들 성진을 데리고 왔지만 우여곡절 끝에 돌아가고 말았다.
평양에서 교회를 시작했을 때 공격과 핍박이 심했는데 부산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토담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신도가 차츰 늘어가자 기성 교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신도들은 이요한(1916~), 옥세현, 김재산, 이기완, 백희수, 송기주, 송효숙, 송문규, 박윤염, 박경도, 크리이톤 워즈워드, 문승룡, 지승도, 정달옥, 정득은, 오영춘 등이었다. 어느 종교든 마찬가지만 초창기에 신흥종교 개척자들은 눈물의 고행을 했다. 통일교 초기 신도들과 전도자들은 온갖 박해와 비난, 공격을 받으며 전도를 했는데 가히 눈물의 드라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도가 늘어가자 1953년 1월 수정동으로 이사를 하고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옮겼다. 문선명은 수정동 세 번째 집에서 성가(聖歌) 「복귀의 동산」과 「성원의 은사」를 지었고, 대구로도 개척전도를 나갔다. 그럴수록 기성교회의 공격이 거세졌다. 그때부터 붙기 시작한 '이단, 사이비'가 평생 문선명을 따라다니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