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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홀로 충만한 뒤에 행동 개시>의 줄거리:
충만함이나, 만족함을 얻으려고 행동하는 한 충만함도 만족함도 없습니다. 애당초 행위라는 것으로는 내 마음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만함과 만족함을 향한 모든 행위는 다 거짓이고 헛됩니다. 거꾸로 오직 충만하고 만족한 상태에서만 참 행위가 나올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먼저 충만하세요. 참 행동이 나옵니다.
홀로 충만한 뒤에 행동 개시
(누가복음 14장 1절~6절)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홀로 충만한 뒤에 행동 개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홀로 충만한 뒤에 행동 개시’
누가는 세 번에 걸쳐 안식일 논쟁을 기록하였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소개된 마지막 안식일 논쟁입니다. 다른 논쟁 때와 마찬가지로 본문 또한 앞선 말씀의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선민들 전체가 가지고 있었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행위를 떠나서는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행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이천 년 전의 선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행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행위와 만족의 연관성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만족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 행위의 결과로 만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행위는 만족을 지향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행위는 만족함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만족함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일의 대가를 얻어서 마음이 만족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게 됨으로써 노동이나 근로를 비롯한 모든 행위의 의미는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래 행위란 만족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족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자면 모든 행위의 근본이 바뀌게 됨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었고 붙잡고 있었던 행위원칙이나 행동강령과의 결별이 이루어지고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가끔 정치적 참여에 대한 신앙적 견해를 물으시는 성도님이나 동료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중에서 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시는 분에 대해서는 저는 비판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결정과 생각을 존중할 뿐입니다. 다만 신앙적으로 정치참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 분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대답을 드립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에게 “지금 하나님으로 충만하신가요?”라고 되묻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으로 충만한 성도 갑과 을이 있다고 해봅니다. 성도 갑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기에 정치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을 드러내시며 갑으로 하여금 정치에 참여하고 관여하도록 하십니다. 한편 성도 을도 하나님으로 충만하지만 정치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갑도 옳은 것이고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는 을도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삶의 모든 문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해 물으신다면 사업을 하는 것이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을 안 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의 옳고 그름은 행위를 개시하기 전에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한가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하게 되는 일이라면 서로의 행위의 결과가 다를지라도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 대해서는 수용하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당부하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거룩하게 여겼던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채찍으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유하신 분이라고 할 때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용서하신 상황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특정한 사람을 만나실 때 나타난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심에 저항하지 않으셨음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자에게는 온유하셨고 성전에서 장사하던 무리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이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드럽고 따듯하게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원칙으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때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셨기에 예수님께는 일원화되거나 획일적이거나 틀에 박힌 원칙이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상황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할 때 나타나는 행위는 세상의 어떠한 원칙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행위의 원칙으로도 나의 행위를 붙잡아 가두고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셨다면 기존에 따르던 세상의 모든 행위원칙과 행동강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세상의 원칙과 강령이 마음 안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행위의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결정됩니다. 사업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사업을 한다면 어떤 아이템을 골라야 하는가, 냉장고를 새로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여행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이사를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코로나 상황에서 예배당 출석을 중단해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이처럼 어떤 행동도 그 자체로는 맞는 것도 없고 틀리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사업을 하게 하신다면 옳은 일이고, 사업을 하지 않게 하신다면 그것도 옳은 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업을 해도 틀린 일이고 안 해도 틀린 일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이고 예배당 출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행위원칙에 관한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애당초 행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에 발생한 질문입니다. 행위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행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십계명이나 율법 혹은 산상수훈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도 율법도 산상수훈도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을 때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증거로 십계명도 율법도 산상수훈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행위의 리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처지와 인격과 성격이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대로 행동하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이 행위 리스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리스트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므로 충만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타인에게 묻지 않습니다.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누구의 인정과 동조와 공감을 목말라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예외가 있다면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 갑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 을에게 권면의 말씀이나 도움의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때 말을 하는 행위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 모두를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갑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하며 나갈 때 동조자를 구하지 않고, 사람의 인정에 목말라하지 않고, 아무도 몰라주는 가운데 홀로 행동하여도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는 본문의 맥락은 앞선 말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통해 헤롯의 살해위협을 받으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죽였던 실권자인 헤롯왕의 살해위협의 변수에도 반응하지 않으시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 가실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으시고 소화해 가시는 일정의 내용이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났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환경에 상관없이 샘물을 뿜어내시는 옹달샘과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진기처럼 외부의 상을 받아들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필름 안에 들어있는 영상을 밖으로 투사하는 영사기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한편 이러한 일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게끔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로운 장치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과 왕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전과 왕궁의 존재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듯이 선민 각자가 성전과 왕궁의 의미를 실현시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선민은 누구나 복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옹달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옹달샘은 전쟁이 일어나든 소풍 온 사람이 있든 변함없이 샘을 분출합니다. 주변 환경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가득한 것을 분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분출하시는 복의 근원이셨습니다. 그리고 선민들 또한 본래 예루살렘 성의 존재 의미와 취지를 받아들이고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나’라는 현상 속에서 성전과 왕궁의 의미를 충족시킴으로써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하늘 기운을 샘솟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이라는 특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행위에 대한 오해에 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행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안식일 논쟁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취지는 결코 일의 중단에 있지 않았습니다. 행위의 의미를 몰랐기에 안식일도 표면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 대한 오해로 인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축복의 가능성 또한 무효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외부의 변수나 자극이나 도발에 상관없이 하늘의 기운을 뿜어내는 옹달샘이 될 수 없다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과 다름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행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움직임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면 복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며 안식일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으십니다. 5절을 보면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그 누구도 안식일을 이유로 기다렸다가 구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위급함을 판단한다면 안식일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에 빠진 아들을 꺼낼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시면 그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행동하게 하신다면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만 이 본문도 오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지만, 생명의 위협이라는 상황에 대해서는 규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이러한 뜻이 아닙니다.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짐승은 비교를 위한 가정입니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판단을 따라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생명을 구할 것인데, 하물며 안식일의 주인이시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시고 만나시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판단으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으시다면 그 일을 하심에 무엇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 충만하심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보고 계시고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안식일의 의미란 행위를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의 본래 취지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보물로 여겨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해 집중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뒤에 행위를 개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하나님만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몰두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행위를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진정한 행위를 위해 준비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취지는 충만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모든 행위가 올바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식일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안식일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선민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하루의 시작이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가로등이 없던 시절에 해가 지면 거리는 완전히 깜깜해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깜깜한 상황이 하루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해가 지면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별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녁 무렵부터 하루가 시작될 때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게 됩니다. 깜깜한 하루의 시작은 하나님을 앙망하며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을 나의 최고의 보물로써 인정하고 하나님을 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 우선적 현실감의 대상으로 붙잡고 모셔 들이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을 잡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해가 뜨면 일어나서 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선민들이 안식일의 취지를 몰랐던 것처럼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규정을 지키고 살면서도 안식일의 근본취지를 알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식일의 취지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대한 관심은 끊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일을 멈춤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이 세상 모든 행동원칙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동원칙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선민들에게는 율법이 있었듯이 시대나 사회마다 요구되는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행동강령입니다. 또 우리의 행동을 주장하는 원칙에는 목적지향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성취를 기대하며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취직을 하려면 열심히 공부하라, 결혼하려면 먼저 집을 장만하라는 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와는 상관없이 습관적이고 일상에서 반복되는 행동도 있습니다. 밥을 먹고 회사에 나가서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외부적인 변수나 자극이나 도발에 반응하면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행위에 앞서 먼저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요구됩니다. 그럴 때 심지어 세끼 밥 먹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밥을 먹는 것과 습관적으로 밥을 먹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영혼의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대답을 하면 “참 영혼 없이 대답을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똑같이 보이는 행동이라도 그 일은 습관적인 행동일 수도 있으나 감사할 수 있는 특별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 분으로서 지금 나로 하여금 그 행동을 하게 하실 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끼니조차도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에 모든 행동에 영혼이 담기고 의미가 담기고 감사가 담김으로써 살아있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거짓입니다. 오직 충만한 상태에서만 우리의 행위는 진리의 기준에 합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합당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위에 결실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행위는 충만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충만함의 열매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놓은 것이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이 충만함은 예배당이나 기도원에 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함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기도하게 되었다면 그곳에서 충만함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박해받던 교인들이 카타콤 즉 무덤에 들어가서도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좁은 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화장실에서도 카타콤에서도 마음을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집니다. 불만이 사라지고 결핍이 사라집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행동을 개시하시게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하나님으로 충만하다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당신의 뜻을 나의 몸과 의식을 통하여 행동개시하실 것입니다. 다시 강조 드립니다. 행위는 충만함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충만함의 열매입니다. 충만함으로부터 행위는 나오게 됩니다. 행위가 샘물이라면 마음은 옹달샘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목회자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기보다는 행동지침을 강요해왔습니다. 충만함을 이야기할 때에도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능력을 받아서 이루자’는 말들이 이와 같습니다. 행위의 의미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충만함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그 결과 행동원칙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 출석하라, 성수주일 하라, 봉사하라,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 저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마른 옹달샘에 수로를 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물이 말라서 나오지 않고 있는데 수로를 낸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니 예배당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슴은 답답하고 목마름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행위는 모두 죄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설령 구제를 해도 죄이고 사랑을 해도 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해서 하나님으로 충만함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구제도 죄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구제는 나의 마음을 채우기 위한 자기만족의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구제와 같을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가서 하는 봉사활동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나를 위해 이웃을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남의 돈을 도둑질해서 만족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은 도둑질이고 똑같은 죄악입니다. 사랑이든 구제든 동정이든 자비든 어떤 형태로 보이든지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행위라면 도둑질과 강도질과 살인과 간음과 거짓말과 똑같은 죄악입니다.
충만하지 않을 바에는 사랑도 하지 말고 구제도 하지 말고 자비도 베풀지 마십시오. 오직 충만함으로부터 행위는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을 해도 자비를 베풀어도 구제를 해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하시는 일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행위의 오해는 풀릴 수 없습니다. 이 충만함의 의미를 모른다면 우리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결과만 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붙잡고 예루살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더라도 충만하기를 소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소원하는 가운데 삶은 바뀌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겁니다. 내 몸으로 대표되는 ‘나’라는 현상 안에서 예루살렘의 취지가 완성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으로 충만함으로써 내 모든 행위가 샘물이 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으로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