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거리, 시간) 남파랑길을 마치며,
오늘이 가면 두번 다시 오늘은 없다. 우린 늘 내일을 이야기 하지만 내일은
언제나 불확실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없고 다른 이가 누릴 수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 누릴 수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오늘,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아껴야하는 이유다.
2016년 정년퇴직 후 무언가 뜻있는 삶의 발자국을 남길 수 없을까 생각하다, 아름다운 우리 국토를 순례하는 길을 잇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처음 긴 도보길인 해파랑길을 준비했다.
부산 오륙도에서 동해안을 따라 걷는 해파랑길은 내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볼 것을 기대하니 가슴에 묘한 설렘까지 일었다.
770km(지금은 공식거리가 750km이다), 전 세계 도보 여행가들이 너도나도 찾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거의 거리가 비슷한 길이다. 산티아고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주요코스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르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약 800km를 걷는 길이 메인 길이다.
산맥을 넘고 들판을 따라서 작은 마을과 중소도시를 거쳐 가는 산티아고 길은 중간중간에 알베르게(숙소)가 잘 갖춰져 있고 또 주변엔 음식점과 마트가 있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매일 일정 시간을 걷고 휴식을 취하며 걸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도보객들이 특히 산티아고 길을 유난히 좋아하는데, 우리와 다른 새로운 유럽풍의 거리, 풍경 그리고 현지인 및 세계에서 온 도보객들과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지금도 선호하고 그 길을 걷고 그 결과물을 유튜브와 블로그 그리고 책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을 계획을 세워 실행하게 된다면 약 40여 일의 날짜와 비용 등에 충분한 준비를 하여야 하고 특히 언어문제로 젊은 층에서 주로 참여하고 있는 실정으로 연륜이 있는 중장년층들은 체력은 준비되어 있으나 제반장애 요인(준비 시간, 특히 언어 등)으로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미완의 숙제처럼 남겨진 길이기도 하다.
본인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남겨놓았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
해파랑길 완보는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꼭 1년의 세월이 걸렸다. 부산에서 해파랑길의 중간지점인 경북 울진까지는 그리고 수월하게 진행하였으나 울진을 넘어서 강원도부터는 당일치기 운영이 불가하여
이때부터는 1박 2일 그리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2박 3일의 일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거리 길을 걷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한구간씩 걷다 보니 어느 사이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무난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해파랑길을 끝내고 또다시 장거리 도보 길을 택한 곳이 바로 남파랑길이었다. 남파랑길도 부산 오륙도에서 출발하여 남해의 수려한 섬을 돌고 돌아가는 남파랑길은 해파랑길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오는 길이었다.
남해안의 섬들을 돌고 돌았는데 다시 원점 회귀한듯한 코스가 이어지고, 때론 육지의 길도 따르며 걷고 산을 넘어가는 어려운 구간도 있는 남파랑길은 전남 해남군 땅끝 탑까지 장장 1,470km의 장도인 것이다.
2020년 5월 부산 오륙도에서 출발한 남파랑길 팀은 처음엔 호기롭게 5명이 참여하여 첫발을 내디뎠다. 1코스에서 90코스까지라 처음엔 90코스의 숫자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은 아득한 길이었다.
5명이 승용차를 타고 코스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는데 그중 한 분은 창원 구간부터 몸이 불편하여 뒤처지다 고성 땅에서는 아예 참석하지 못했고 2년 후엔 말없이 세상을 떠나는 아픈 시간도 있었다.
이제 4명이 남아 남파랑길을 이어가는데, 또 한 분이 남해구간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중도에 하차하고 유일하게 3명이 남아 남파랑길을 이어갔다. 창원- 고성-통영-거제-남해-여수-고흥을 돌아 나오는 길, 섬길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4명일때는 2명씩 2개조로 나누어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나누어 걸었는데 남해를 지나고 나니 3명이 되면서 다시 2대 1로 나눌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군내버스의 배차시간을 맞출 수 없어 행할 수 밖에 없는 고육책이었다.
점심조달이 가장 큰 애로점이었다, 대부분 점심은 김밥으로 대체하였고
때론 점심을 제때 먹지 못해 배고픈 시간을 견디며 길을 걷기도 했다.
난 언제나 홀로 길을 걸으며 혼자서 걷는 외로운 길을 선택했는데 조용히 걷는 맛도 있지만, 함께 걷는 길이 더 좋다는 것도 몸소 느낀 시간이었다.
특히 고흥의 고흥방조제구간(3km직선거리)을 건널땐 홀로 방조제위에 서서
가슴에 담아주었던 스트레스를 고함으로 지루함을 달래며 걷기도 했다.
그 긴 여정 끝에 우린 어렵게 어렵게 23. 12월 마침내 해남 땅끝 탑 앞에 서게 되었다. 이야기하자면 긴 겨울밤에 화로의 노담(爐談)으로 이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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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길 위에서의 시간은 또 하나의 여행이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즐기는가, 내가 카페에서 글을 쓸 때마다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여행은 여행을 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여행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며 차편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과 또 근래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자전거를 이용한 여행도 꽤 의미있는 여행이지만 이는 지역 곳곳에 작은 숨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또 여행을 하는 동안 현지인과 교감이 너무나 제한적이라는데 있다.
여행은 현지인과 교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듣고 배우고 나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있다.
바로 두 발로 걷는 도보여행은 한발 한발 걷는 길 아래로 기어가는 작은 벌레에서 부터 숲속에서 합창하는 수많은 생명의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골짝과 굽이굽이 도는 모퉁이에 서 있는 단독 작은 가옥에 거처하는 할머니의 숨결까지 느끼며 간다….
인간이 외롭지 않은 것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들과의 대화 속에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짐을 느껴보았는가?
다리는 아프고 발가락의 물집도 생기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지나고 나면 다 순간이고 그리고 찰나에 불과하다.
살아가면서 풍부한 삶의 대화거리가 있고 오감이 동원된 풍부한 여정의 맛은 걸음을 통해 느껴지는 전율의 순간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가 없다.
프랑스의 기자출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데
그는 실코로드의 12,000km를 걸으면서 세운 원칙은 첫째 걸어서 갈 것, 둘째 서두리지 말고 느리게 갈 것, 셋째 화려한 경치 소개대신 자신의 느낌을 꼼꼼히 담아 낼 것, 즉 달팽이 걸음으로 4년에 걸쳐 실크로드 답사를 완성하며
길을 걷는 이들의 주옥같은 가르침이 되는 명저을 남겼는데 난 과연 그가 지향하는 걷기의 방식이 제대로 되었는지 자문해 보고 부족부분이 많음을 느낀다.
이제 긴 걸음을 잠시 내려 놓으려 한다. 휴식과 정리가 필요한 시간이다.
재도전의 남파랑길을 잇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시간 나는 대로 구간 구간을 끊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그 길을 가보고 또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이 된다면 나에게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다시 그 길 위에 서고 싶다.
아 아름다운 남파랑길이여, 그리고 어느 해 보다 뜻깊은 2023년이 저물어 간다..
2023. 12. 8
잎새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