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로 번뇌 단절시켜 열반 얻어
불교흥성 시기 민간서 걸던 대련
대나무·소나무를 불교와 연관
부처님은 자비의 배로 중생 구제
문경 대승사 응진전. 글씨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 1925~1975).
觀音竹繞菩提路 先超苦海有慈航
관음죽요보리로 선초고해유자항
羅漢松圍般若臺 立絶俗塵憑慧劍
나한송위반야대 입절속진빙혜검
경북 문경 대승사 응진전에 걸린 주련이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고 볼 수있다. 위의 문장에서 상련은 ‘관음죽요보리로’이고, 하련으로는 ‘나한송위반야대’가 대구되는 시문이다. 그리고 ‘입절속진빙혜검’에 대구되는 하련은 ‘선초고해유자항’이다. 참고로 예천 서악사의 나한전 주련은 대승사 응진전 주련과 같은 필체다. 대승사 주련의 글씨를 번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련의 순서는 바르게 걸려있다. 그러므로 이를 정리해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다.
觀音竹繞菩提路 羅漢松圍般若臺
관음죽요보리로 나한송위반야대
立絶俗塵憑慧劍 先超苦海有慈航
입절속진빙혜검 선초고해유자항
(관음죽이 보리로를 둘러싸고/나한송은 반야대를 에워싸네/곧장 속진을 확고히 끊음에는 지혜의 칼에 의지하고/먼저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면 자비의 배가 있다네.)
이 글은 불교가 흥성하던 시기 주로 민간에 걸던 대련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주변의 풍광을 관음 신앙, 나한 신앙과 연관 지어 대구를 쓴 듯하다.
대나무나 소나무를 불교와 연관지어 신행하는 행위는 아마 중국밖에 없는 특유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중국 불교에서 초목총림이 모두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논리를 펼치는 선종의 사상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주변의 사물들을 이끌어 대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가더라도 이를 수행의 발판으로 삼아 죽림은 관음보살이요, 지나가는 길을 보리로, 즉 지혜의 길이라고 했을 것이다.
보리를 한자로는 각(覺), 지(智), 지(知), 도(道) 등으로 나타낸다. 중생은 보리를 바탕으로 세간의 번뇌를 단절시키고 열반을 얻을 수 있다. 지혜의 경지를 얻은 이를 불이라 하고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이를 다시 한역하여 무상정등각이라고 한다.
소나무 사이에 있는 반석은 반야대라고 했으니 여기서 반야는 모든 법의 진실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나타내면 프라즈나(prajna)이며 이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글에서처럼 수행자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대나무, 소나무 등도 모두 살아있는 스승으로 여겨서 정진의 채찍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만큼 중국 불교가 한창 흥성할 때 모든 사물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입은 어떤 시기와 밀접하게 이어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동사 앞에 부사로 쓰여서 ‘즉시’ ‘곧장’이라는 의미다. 속진은 속세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번잡하고 잡다한 일들을 말하며 번뇌라고도 한다. 혜검은 지혜의 칼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번뇌를 물리침에 지혜가 최고이기에 번뇌를 절단시킨다는 의미로 검을 썼다. ‘유마경’ 보살행품에도 “지혜의 칼로서 번뇌의 도적을 물리친다”는 가르침이 있다.
자항은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심을 배의 운항에 비유한 표현이다. 배는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실을 수가 있다. 그리고 중생의 삶을 바다에 비유해 고해라고 했으니 이를 건너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가 있어야 하고 부처님은 자비의 배로서 중생을 널리 구제하기에 이를 자항보도라고 한다. 여기서 보는 중생을 널리 구제한다는 의미, 도는 곧 제도한다는 것을 말한다.
주련의 글씨는 인천문화원장을 역임한 동정 박세림 선생이 썼다. 선생의 글은 강화 보문사의 범종각에도 남아있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578호 / 2021년 3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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