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障有感
일전에는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 참인데 난데없이 지하의 보일러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당황한 속에서도 언뜻 학창시절에 방화 훈련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2차 대전의 와중이었으므로 주로 연합군의 소이탄을 잡는 훈련이었다. 학교의 구내에는 군데군데 항상 물과 모래, 가마니 등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모의 소이탄을 떨어뜨리면 학생들이 달려들어 뜬 것 물리듯이 그 자리에서 덮치는 훈련이었다.
나는 진짜로 불을 꺼 본 일은 없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어떻게 새빠지게 옛날 소이탄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요즘 매일같이 중동 지역의 폭탄세례의 TV 화면을 보아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황급히 물통으로 물을 길어다 들어부었다. 물로 잡히지 않을 때는 마침 집안에 다른 용도로 준비해 둔 모래와 가마니가 있었으므로 그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보일러실에는 연소할 물품이 많지 않아서 물 두통으로 쉽게 불이 잡혔다. 그 대신 보일러 전선이 타서 밤새도록 냉방에서 떨어야 했다.
다음날 설비사에 연락해서 화인을 알아본즉, 보일러에 부착된 집진기(集塵器)의 전선이 합선된 듯하다고 말한다. 몇 해 동안 아무 탈 없이 사용해왔는데 갑자기 합선이라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헌 집을 헐어내고 새로 집을 지은 지 올해로 꼭 16년째가 된다. 그동안 보일러를 다섯 번이나 개비했으니 평균 3년에 한 번 꼴로 갈은 셈이다. 연탄을 시작으로 기름, 소립탄(小粒炭) 등 남들이 좋다는 말만 듣고 이것저것 갈아보았다.
지금은 심야전기, 가스 등도 거론되지만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거다!" 할 만한 것은 아직 마음에 잡히질 않는다. 그런데 보일러보다는 정작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파이프다. 방바닥 속에 깔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동안 많이 부식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반영구적인 내구성이 강한 파이프가 생산된다고 하는데 그때는 어느 집에서나 난방용 배관은 쇠파이프 일색이었다. 그 수명을 대강 10년을 잡는다고 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집의 그것은 그 수명의 한계가 6년쯤 지난 셈인데 아직도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파이프를 교체하려면 그 작업이 이만저만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방안의 가구며 서재의 책을 치우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터져서 물이 새면 그때 가서나 손을 쓸 셈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한겨울에 손을 대게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조이고 있다. 주변의 동료나 친지들의 말을 들어보면 난방시설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지 않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화노(花奴)라는 말이 생각난다.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꽃을 가꾸는 사람이 도리어 꽃의 노예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꽃 시중 드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어서 그런 고약한 낱말까지 생겨난 듯하다. 주택의 경우도 그런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마련한 다양한 시설들이 잦은 고장으로 말미암아 수시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날에는 아궁이에 삭정이나 장작 등 만만한 땔감을 지피면 그만이었다. 거기에 밤이나 감자를 굽기도 하고 화롯불에 올려놓은 장투가리에는 먹음직스럽게 장이 끓는다. 이런 낭만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삼동을 나던 그 시절이 도리어 마음은 편했던 것 같다. 억지를 쓴다고 나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오래 전에 새로 집을 지은 사연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때 필요한 대로 구석구석에 수도전을 뺐는데 냉, 온수를 따로따로 치면 꼭지의 수는 10개도 훨씬 넘는다. 그것들이 이따금 고장이나서 말썽을 일으킨다.
아궁이와 마찬가지로 지난날 뜨락에서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어 올리던 낭만적인 회상도 지울 수가 없다. 별일이 아닌 것도 세월이 흐를수록 감회가 새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 동료교사였던 장서언(張瑞彦) 시인은 우물을 주제로 한 시를 발표했는데 그 정경이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 속에는 아침 일찍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긷는 아내의 소박한 모습이 정감있게 그려져 있었다. 요즘처럼 수도꼭지를 트는 아내의 모습에서는 별로 정겨운 시는 우러나올 것 같지 않다.
지난날 웬만한 도시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했던 것은 다 잘 아는 일이다. 그리고 한 우물을 이웃끼리 다정하게 나눠마셨던 일까지도.
그리하여 대문은 항상 개방하고 지낼만치 인심도 순박했었다. 이제 도시에서는 오염이 심각해서 우물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쩌다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대개는 무용지물(無用之物) 아닌 무용지물(水)의 처지가 되었다. 하기는 우물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수돗물도 상수원의 오염으로 도처에서 마실 수 있네 없네 하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지난날 열어놓고 지내던 대문도 이제는 이중삼중으로 단속을 해야 하니 인심의 척도를 엿볼 수 있는 것만 같다. 어떤 사람은 우리 사회를 고장이 나서 삐걱거리는 기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도덕성이라는 윤활유가 고갈이 되어 사회의 구석구석이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린다고 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고장 투성이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사회의 고장의 원인이 윤활유의 고갈(枯渴)에 있다면 고장(故障)보다는 고장(枯障)이 더 적절할 듯도 싶다.
하여간 이제는 고장이 정상이고 정상이 도리어 고장인 듯 착각하기 쉽다. 공해나 오염 등은 우리 사회의 고장 난 현상인 셈인데 이제는 거의 불감증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
지난날 처음으로 '오염'이니 '공해'니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섬쩍지근하고 겁이 났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도리어 비정상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없지도 않다.
지난번 어떤 회식 자리에서 오고간 논쟁이 머리에 떠오른다. 마침 식탁에 올라 있던 몇 가지 별미들이 화제에 올랐었다. 지난날 우리가 어렵게 살던 때는 생각도 못했던 값진 반찬들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즐겨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느냐고.
그러나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와서 다들 긴장하는 것 같았다. 지난날 우리는 대부분 어렵게 살았고 지금처럼 호의호식 못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때는 농약이니 중금속이니 하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이나 꺼림칙한 생각 없이 마음 놓고 먹고 마셨다. 요즈음은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음식이 무엇이 있느냐는 반박이 잇달아서 논란은 계속되었다.
갑론을박의 꽤 뜨거운 논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황희 정승의 고사처럼 양쪽이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공해문제는 아무리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로마제국은 그 당시 납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던지 납 그릇이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그 결과 후손들이 납중독에 시달려 서서히 멸망의 구렁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고사는 타산지석인지 타국지석(他國之石)인지는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산 교훈이 될 듯싶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이 "사람이 산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백번 옳은 주장인데 만시지탄의 느낌이 없지 않다. 하천을 비롯해서 우리의 환경이 구제불능에 가까울 정도로 구석구석 너무 심각하게 오염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에 들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쯤이었을까. 내가 잘 아는 모 저명인사가 요로에 미리 공해 대책을 세워나가도록 건의했다가 코를 뗐다고 한다. "배고픈 사람이 찬밥 더운밥 찾게 되었느냐고 핀잔을 맞았다는 것이다. 나의 다른 글에서도 조금 언급한 일이 있다.
나의 주변의 사소한 ‘고장타령’이 분수없이 세상의 공해, 오염문제까지 비약을 했다. 글로서는 이것도 하나의 고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시 나의 주변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지난해 한여름 장마철인데 천장으로 물이 송송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슬라브 지붕 한 구석을 한 꺼풀 쪼아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방수를 하고 시멘트를 쳐 발랐다. 또 물탱크의 밸브가 고장이 나서 물이 넘쳤지만 손대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한동안 그대로 방치했었다. 자질구레한 일은 기술자를 불러도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웬만한 고장은 각자가 손을 보아야 한다고 해서 현대를 '기술환경의 시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장환경의 시대'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어느 해 밤에 우리 집에 그럴 만한 연유가 생겨서 급하게 개를 구해왔고, 문마다 야무지게 잠그는 장치를 했다. 그런데 자물쇠가 가끔 고장이 나서 많은 불편을 겪는다. 요즘은 또 웬만한 가정에서는 각종 가전제품이나 편리한 시설물들을 갖추어 놓고 있다. 생활이 다양하고 편리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부수적으로 고장에 신경 쓸 일도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며칠 전에는 우리 집 일대의 전화가 하루 종일 불통이었다. 수리공들이 장비를 싣고 와서 고장원(故障源)을 찾는데 쉽게 찾아지지 않아서 애를 쓰고 있었다. 어두워진 뒤에야 수리가 끝났지만 나는 급한 전화를 기다리던 참이어서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전화위복(電話爲福)이란 느낌이 절실한 하루였다.
가난해서 헐벗고 굶주리는 일은 이제 누구나 질색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만 아니라면 많은 고장에 시달리는 일 없이 검소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고장 중에서도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육신의 고장이 아닐까. 정교한 기계일수록 고장이 나기 쉽듯이 우리의 육신도 너무 정교해서 고장이 잦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조물주의 큰 뜻은 헤아릴 길 없지만 고장은 극복하는 데 인생의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졸업식 축사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겸연쩍은데 머리에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고요한 바다는 익숙한 사공을 만들 수 없다.' 라는.
고희를 앞둔 지금 나는 나름대로 험한 풍랑을 헤쳐 온 것으로 자부하고 있는데 아직도 방황하는 사공인 것만 같아서 안타깝다.
(詩와 批評,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