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군위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정치적 학살>
군위에서는 1949년 9월 경북 군위 효령면 내리동에 거주하던 주민 11명이 경찰에게 끌려가 소보면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4~5명의 CIC 군인들이 일신여관에 주둔하면서 학살을 준비했다. 군위경찰서에 의해 예비검속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갑, 을, 병으로 분류되어 19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초에 우보면 나호동 비호골 계곡과 소보면 계곡 등에서 총살당했다. 주민을 총살한 자들은 육군정보국 산하 CIC 군위파견대와 군위경찰서 경찰이었고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
희생자들 중에는 선산군 도개면 신림리 류세춘, 남태식 등 피난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1950년 8월 11일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서 피난하던 중 경찰에게 연행되어 바람재로 끌려가 총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군위경찰서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창고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이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군위경찰서 근무자 홍씨(홍순판)은 “군위경찰은 GMC트럭 2대로 하루에 몇 차례에 걸쳐 보도연맹원들을 우보면과 소보면의 산골짜기로 데려가 총살시켰다.
당시 트럭에 실린 보도연맹원들은 눈이 가려지고 손이 뒤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인 상태였으며 경찰과 CIC의 감시아래 처형장소로 이송되었다.”라면서, “처형현장은 계곡이었기 때문에 별도로 구덩이를 파지 않았으며 현장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CIC가 경찰에게 처형대상자를 지목해주면 경찰이 총을 쐈다. 만약 경찰이 총을 쏘지 못하고 있으면 CIC가 권총으로 위협을 하였으며 처형이 끝나면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주위의 나뭇가지 등으로 그냥 덮었다.”라고 증언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 점령지역이었던 군위는 국군 수복 직후부터 부역혐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군위경찰서는 1950년 10월 20일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수십 명을 트럭에 싣고 가 군위읍 서부리에서 총살했다. 당시 대한청년단 부단장이었던 김창석은 경찰이 수십 명의 주민들을 트럭에 싣고 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경찰관들로부터 ‘처형하러 간다’라는 말을 들었다. 위 김창석이 목격한 희생자들 중에는 대한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근수가 있었다.
이상 군위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