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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체현된 온정한 마음들
-진영대 작품론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기쁜 일이다. 한 해가 저물었고 새해가 밝아오는 시점에 새로운 시인의 시를 접한다는 것 또한 기분 설레는 것이다. 과일 맛이 토양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듯 시도 마찬가지로 시인이 살아온 여건을 반영하여 나타난다. 거기에 문학을 통해 형상된 시를 읽다 보면 슬픈 일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온다. 동병상련 같은 과거지사를 들춰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어가 촉촉이 젖어드는 듯 가슴 시리다. 시 속에 장치된 체험적인 서사에 몸이 솔깃해져 함께 슬퍼지고 싶은 것이다. 그것 또한 시를 읽는 것에서 발현된 동조 현상으로 종래에는 시인과 독자가 일치된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 심리작용을 이룬다고 보았다. 시를 쓰는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는 서로 대항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존 관계라고 볼 때 매우 긍정적인 것이며 바람직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시가 발화하는 과정과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인 것의 의미’는 읽기와는 전혀 다른 매우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시어 그 자체가 평이한 서술적인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고도의 언어 상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그것을 우린 시의 정제와 절제에서 고도의 가성비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한 전향적인 의도였던 아니었든 간에 기 발화된 시의 형상은 또 다른 상상력을 유발 더 많은 시적 가능성을 언어로 환기해 준다. 현재의 사회 인식과 개개인 간의 차이가 시라는 언어 형태로 변용되면서 삶과의 연관성을 더 긴밀하게 하여 그 안에서 위안을 찾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의 표상체계는 일상이라는 삶의 변화를 솔직한 언어로 유인하여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된다. 진영대 시인의 시 다섯 편은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체험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안에 담긴 오롯한 마음들은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순정한 눈빛으로 드러낸 시편 속 정감이 새록새록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세계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으로 다가온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삼십 리 산길을 등에 지고 온
반닫이 옷장
다른 세상 가시는 길엔
지고 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꺼내놓을게
눈물밖에 없지만
어머니가 다시 와서 열어볼 때까지
주먹만 한 자물통을
열어보지 못했다
-<유품> 전문
지긋한 나이가 들어서야 세월을 뒤돌아 볼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세월은 무정한 것이다. 항상 옆에 계실 것만 같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다정만 하시던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는지 세상에서의 지난한 시간을 고별하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지만 당신의 어머니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머니의 생로병사의 마지막 수순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서 오는 깊은 연민을 담은 시 ‘유품’이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 삼십 리 산길을 등에 지고 온/ 반닫이 옷장”을 보며 회한에 잠겼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뒤 아직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방안에 남아 시인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반닫이 옷장’ 그 안을 차마 열어볼 엄두를 갖지 못했다. 반닫이는 여인네 허리 높이의 작은 옷장을 일컫는 데 꼭 옷장 만의 용도가 아닌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소품 공예품이다. 그래서인지 쓸모가 다양하여 예전 시집올 때 꼭 들여오는 혼수품 중 하나로 기거할 방안에 곱게 놓아두고 사용했던 애장품이다. 그 반닫이 문을 열고 닫으며 많은 인고의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곳이어서 손때가 묻어 있기 마련이다. 한 여인이 시집을 온 뒤 생애사일 수 있는 사연들이 온전히 깃들어 있는 ‘반닫이 옷장’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아직도 그 반닫이를 열어보지 못했다는 시인의 마음속 결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남긴 가구나 옷 식기류를 소중히 잘 보관하여 다시 사용한 것이 하나의 예였다. 부모님의 유품을 집안에 두면서 못다 한 효도를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도 그만큼 순정한 사람들이 살던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세월도 각박해져 그런 생각마저 진부한 것으로 구닥다리보다 새로운 것을 더 선호하여 귀찮은 물건이 되어버린 것이 흔하다. 요즘은 장례를 치른 뒤 아예 부모님이 사용했던 유품을 몽땅 들어내 크기와 용도에 맞게 폐기 처분을 위한 딱지를 붙여 집 바깥으로 내놓아 버린 세상이다. 삭막한 세상에 진영대 시인은 어머니의 유품으로 남은 ‘반닫이 옷장’을 보며 당시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 마음은 생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잊지 못한 것이다. 그 안 깔끔하게 정리된 옷가지며 어머니가 요령껏 관리해 온 소중한 것들을 보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 시인은 어머니가 채워 놓은 자물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밀려오는 그리움이 복받치기 때문 힘이 든다. “어머니가 다시 와서 열어볼 때까지/ 주먹만 한 자물통을// 열어보지 못했다”는 그 마음이 훨씬 더 많은 위안이 될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얘야, 질 조심하거라
어머니는 길을 질이라고 불렀다
사람 하나 겨우 다니는 시골길에
조심할 게 뭐 있다고
외출할 때마다 신신당부하셨을까?
문득, ‘문은 길의 시작이다’하고
첫 문장을 쓰다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문은 질의 시작이다’ 고쳐 써도
틀린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길을 질이라고 불러야
대문 앞에는 아직도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계실 것 같았다
-<길> 전문
언어의 살가움은 아무래도 그 지역만의 공유할 수 있는 사투리가 훨씬 정감 있게 다가온다. 언어가 갖는 전달성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리 감정이다. 공명되는 울림에서 귀에 익은 감정이 고스란히 살아나 거부감이 없다. 화자가 말하고 싶어 한 것도 위에서 언급한 “얘야, 질 조심하거라/ 어머니는 길을 질이라고 불렀다”라고 말을 전한다. 사실 시골길이란 것이 크게 차가 붐빌 리가 없고 사람 다니는 정도로 한갓진 길일 뿐이다. 그 ‘길’을 ‘질’이라 말하면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아마 어머니가 말씀하신 깊은 속내는 그 길을 통해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오가는 ‘질’을 통해 아들이 경험해갈 일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는 깊은 뜻을 이른 말씀이다.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고 오가는 길이니 그 의미는 더 큰 것이다. 인생사가 모두 길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몰랐을 뿐이다. 문을 나서는 순간 바깥은 그만큼 삼엄한 세상임을 일컬어 깨달음을 주신 말씀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집안의 방문을 열고 대문간을 나서면서 시작되는 세상살이가 모두 어머니의 마음에는 ‘질(길)’인 것이다. 누구나 ‘질(길)’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이라는 사회를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접하게 된다. 따라서 ‘문은 질의 시작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어머니의 인생관을 담고 있다. ‘당신’께서 세상을 나설 때마다 조신하는 마음으로 집 방문을 나서며 대문을 열고 두려운 세상으로 나가셨던 것이다. 그 반복된 삶의 실천에서 곧은 생각과 바른 행동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의 혼탁함에서 자신을 지켜가는 ‘질(길)’을 오가며 바짝 긴장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말씀은 올바른 행실에 대한 실천궁행의 길이어야 한다며 아들에게 귀에 박히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도 화자는 어머니가 대문간 앞에서 손을 흔들며 잘 댕겨오라는 말씀이 들리는 듯 눈에 선연하다,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으니 화자의 삶도 분명 반듯할 것이다.
도시 사는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 고추는 잘됐냐, 고구마는 심었냐, 깨알같이 쏟아놓은 말이 한 섬이지만 나는 입도 뻥긋 못했습니다 오이 농사가 돈이 된다더라, 호박을 심지 그랬냐, 농사일이 식구들 안부보다 궁금한 모양입니다 하늘만 멍석만 한 심심산골에 뭐가 있어 자랑이라고 할 말이 있겠어요 하늘밭 삼만 평에 별 농사만 지었다고 했더니 그게 어디냐고 그걸 또 부러워하는데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요? 잘되고 못되고 할 리 없는 마음밭만 묵정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별 농사라도 제대로 지었으면 친구에게 별이라도 하나 따다 주었을 텐데…… 내년엔 묵정밭 한자리 얻어 고추 몇 포기, 오이 몇 포기라도 심어야겠습니다
-<별밭 삼만 평> 전문
시골 생활이란 것이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하게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 자고 일어나 할 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노는 것처럼 아무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넘겨 될 일도 아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만 겨우 경제적인 수입이 될까 말까 한 것이 시골 농사꾼인 것이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의 안부 겸 근황을 묻는 말에 우스갯소리 같은 운치와 낭만이 가득한 ‘별밭 삼만 평’이라는 시제가 우선은 좋다. 하늘을 갈아엎은 밭고랑에 ‘별’의 씨앗을 뿌려 삼만 평의 별 밭을 이뤘으니 가슴 뿌듯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시골살이를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노동으로 투여된 고통을 잘 모른다. 그저 단순하게 신선놀음 같은 전원생활을 꿈꾸듯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골살이를 하겠다고 산골로 찾아든다면 그것은 무모한 것이다. 그만큼 시골살이가 만만찮은 도전이기 때문이다. 도시 친구들이 생각하고 있는 시골살이는 그저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낭만에 파 묻혀 사는 삶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 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아무리 전원살이라 쳐도 최소한의 경제적인 수입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각오와 고된 노동을 즐겁게 수행해야만 한다. 도시 생활 못지않게 팍팍한 시골살이도 그저 세월 먹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친구분들의 지나간 말로 “도시 사는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 고추는 잘됐냐, 고구마는 심었냐, 깨알같이 쏟아놓은 말이 한 섬이지만 나는 입도 뻥긋 못했습니다 오이 농사가 돈이 된다더라, 호박을 심지 그랬냐, 농사일이 식구들 안부보다 궁금한 모양입니다”라는 질문에는 얼마나 고생이 많을 것인가는 쏙 빼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시골살이처럼 열악한 환경도 없다. 애써 쏟은 고통에도 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경제 가성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친구(도시적인 생각)들은 그저 단순하게 재미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현실인 것이다. 거기에다 시골에서 죄다 고추 오이하우스 농사를 지어 떼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친구들이 농촌 사람들 보다 더 순진한 이상에 치우친 것인지 모른다. 친구들의 농촌 생활에 대한 인식이 사뭇 화자의 삶과 괴리감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농촌 생활의 고달픔을 에둘러 ‘하늘 밭 삼만 평’에 별농사를 지었다며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묵정밭이라도 얻어 채소라도 심어야겠다는 것을 보면 시골에서 살지만, 그런 푸성귀를 넉넉하게 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친구들을 위해 “내년엔 묵정밭 한자리 얻어 고추 몇 포기, 오이 몇 포기라도 심어야겠습니다”는 마음을 다진다. 아마 그 친구들이 그곳을 찾아오면 한아름씩 푸성귀를 안겨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진영대 시인의 소박한 온정이다.
십 년 키운 복돌이가 죽었다
남자가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울었다
술 먹고 걷어찰 복돌이가 없으니
시원하다며 울었다
복돌이는 남자가 가장 외로울 때 만난 믹스견이다
복돌이도 외로워서 자주 울 때였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다섯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복돌이가 없으니 집이 넓어서 좋다며
살았을 때 복돌이가 제일 좋아하던
호피 무늬 담요를 덮어주었다
복돌이가…… 죽은 복돌이가 웃고 있었다
-<복돌이> 전문
‘복돌이’란 이름이 우선 좋다. 요즘 들어 들어보기 어려운 이름이거니와 예전에는 사람 이름에도 많이 사용했던 귀한 이름이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동네에 한 두 사람은 복돌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기도 했다. 반대로 흔한 이름이기에 쉽게 생각도 할 수 있어서였을까? 어느 때부턴가, 시골 사람들은 그 ‘복돌이’란 이름을 개에다 붙여주길 즐겨했다. ‘개’ 이름으로 불린 ‘복돌이’는 주인이 베푼 가장 큰 호사인 것이다. 사람처럼 귀하게 여기며 위해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인 셈이다. 그를 철석같이 믿고 주인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던 ‘복돌이’였다. 그런데 사람 사는 것이 술술 잘 풀린다면야 좋겠지만, 복돌이를 애지중지하던 주인장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주인장도 홀로 사는 독거인이고 마침 그 집에 입양된 ‘복돌이’도 마찬가지로 동병상련의 딱한 처지였기에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가는 세상이 온통 힘들다며 주인은 술을 마시고 들어와 화풀이를 ‘복돌이’한테 한 모양이다. 아무 때고 화풀이를 해도 잘도 들어주던 ‘복돌이’도 더는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둔 ‘복돌이’를 보며 흘린 눈물은 늦은 후회이다. 그렇지만, 한번 세상을 등진 ‘복돌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증오했다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것이 요상해서 옆에 없고 나면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옆에 있을 때는 귀찮기만 했던 복돌이였다. 막상 동고동락하던 존재가 사라지고 없는 부재에서 오는 적막감은 걷잡을 수 없다. 그 기간이 십 년이라면 함께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다. 이제 귀찮다고 걷어찰 복돌이도 없고 바보 마냥 매몰찬 주인을 멀리 하지도 않고 속도 좋아 꼬리 치며 달려들던 그 모습을 떠올리지만, 씁쓸할 뿐이다. 아무도 반겨줄 사람도 없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사랑으로 반겨주던 “복돌이는 남자가 가장 외로울 때 만난 믹스견이다/ 복돌이도 외로워서 자주 울 때였다”라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복돌이도 십여 년을 사는 동안 제짝을 만나지 못한 채 늙어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마찬가지로 홀로 사느라 몹시 지쳐있던 시절을 같이 한 셈이다. 그렇게 서로 외로운 처지에서 만나 애증이 겹친 시간을 함께 잘 살아왔는데 남은 것은 허망한 것 뿐이다. 죽은 복돌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복돌이가 평소 좋아했던 호피 무늬 담요 한 장뿐이었다. 그토록 사람을 무장 없이 반기며 따랐던 복돌이의 생은 죽어서 호사를 받으니 아이러니하다. 이제 ‘남자’만 덜렁 남은 집안이 넓다 해도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반려견이라 했을 테고 사람처럼 복돌이라 이름까지 지어주었는데 잘못한 일들이 가슴에 사무친다. 사람 사는 일과 다르지 않아 이것 또한 가슴 시린 일이다.
친구 돈 오만 원을 삼십 년 넘게 갚지 못했어요 그 돈으로 어린 딸 분윳값을 하고 얼마간 남아서 우리 세 식구 꽃구경을 다녀왔었지요 지금은 차용증의 인주 자국도 기억처럼 희미하게 지워져 은행원이었던 그 친구도 긴가민가했겠지요 일전에 포도밭에 친구 내외 다녀갈 때 본전이라도 들려 보낼 것을…… 포도만 몇 상자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고 말았어요
빚을 갚으면
동학사 벚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빚> 전문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데 있어 가물가물하단 말이 있다. 긴가민가 하는 것도 이 말과 통한다. 지금의 상황이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진다. 너무나 오래전 일이라서 꼭 꿈속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애매 모호한 일들이 살다 보면 더러 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잠재된 그 기억은 모질게 가슴에 도사리고 있었다. 삼십 년 전이라 그럴 만도 하지만, 친구에게 빌린 돈 오만 원이 화자의 마음을 지금껏 께름칙하게하였고 미안하기도 하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 돌려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이다. 그래도 친구 덕분에 어려웠던 시절 아기 분윳값도 마련하였던 궁핍한 때였다. 마침 그러고도 돈이 조금 남아 아내와 세 식구 조촐하게 꽃 구경을 다녀오기까지 했다. 그 기억이 선명한 것을 보면 친구에게 돈 오만 원을 빌린 것이 분명하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친구가 마침 화자의 포도 농장을 찾아온 모양이다. 그때 허심탄회하게 예전의 사정을 말하고 빌렸던 오만 원을 돌려주지 못한 것을 또 후회하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친구에게 덜렁 포도 몇 상자만 차에 실어 보내고선 또 과거적 일처럼 후회를 하고 있다. 그런 일들은 누구나 있을 법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것은 다른 데 있다. 화자의 마음이 착하고 여리다는 뜻이다. 훌쩍 30여 년이 흘렀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그까짓 것 하면서 알아도 그냥 넘어가 버리거나 뭉개버리는 것이 세상 일이다. 하지만, 소소한 일로 생각하는 친구와 달리 지금껏 미안한 마음을 놓지 못한 화자다. 만약에 친구에게 “빚을 갚으면/ 동학사 벚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라며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친구 덕분에 아련하게나마 마음이 환해지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따복따복 눌러쓴 시 다섯 편 속에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말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진영대 시인은 199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 『길고양이도 집이 있다』, 『당신을 열어 보았다』등이 있다. 시인은 시 한 편을 써낸다는 것에 몹시 조심스럽게 처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를 함께 하고 있다. 지금껏 진영대 시인이 살아온 세상은 허명을 쫓던 적 없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모습들은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삶의 일상과 매사를 귀히 여기는 언행이 고스란히 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시인의 삶을 시로써 말한다고 한다. 그런 인생살이의 노정이 시라는 문장 속에서 따뜻한 온정을 담은 그리움이 되어 심연 깊숙한 곳에서 솔직 담백함으로 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가 갖는 근원적 진실은 인간애에 바탕한 삶의 이야기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