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석대 창원구씨 부사공파 문중을 찾아서
19세기 초반 동상면 석대리로 이거(移去)한
구지(具祉)를 입향조로 하는 지역의 세거(世居) 성씨
창원 구씨는 원래 구씨(仇氏)로 중국 송나라 대부 구목(仇牧)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나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문무왕 때 사찬(沙飡) 구진천(仇珍川), 용사(勇士) 구근(仇近) 등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일찍부터 대성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개성하게 된 것은 조선 정조 이후부터이다. 1791년(정조 15) 7월에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 후보로 뽑혀 그 명단을 왕에게 올리자 정조가 이를 보고, “‘구성(仇姓)’이 오래된 성씨인 줄은 알지만 ‘구성(具姓)’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구성(具姓)을 사성(賜姓)하였다. 그리하여 1798년(정조 22)부터는 모든 공사 문서에 구씨(具氏)로 기재하였다.
창원 구씨(昌原具氏) 시조는 구성길(具成吉)이다. 945년(혜종 2) 권신 왕규의 전횡을 서경의 대광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입경하여 토벌한 공으로 의창군에 봉하여졌다. 의창이 창원으로 개칭되면서 후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한다. 구종길과 구원길의 아들 대에 부사공파, 진사공파, 승지공파, 처사공파로 나뉘어 전국 각처에 세거하고 있다. 구종길의 큰아들 구복한이 강계 도호부사를 역임하였기에 후손들은 창원 구씨 부사공파 파조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부사공파 구맹립이 덕포동으로 이거하였고, 구맹립의 8세손인 구지(具祉)가 19세기 초반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로 이거하여 이곳 입향조가 되었다. 구지의 5대조가 구영취(具榮鷲)이다. 구영취는 유학에 힘쓰면서 무예를 아울러 익히고 국가 유사시 문무겸전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구응진, 구응남, 구응달]을 데리고 동래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혈전을 벌였다. 성이 함락되자 성벽을 뛰어넘어 황산도 소산역[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 부근 소산 전투에 참가하여 황산도 수송로를 차단하는 유격전으로 다른 의병 부대와 연계작전을 펼쳤다. 전공을 인정받아 선무 원종 3등 훈에 오르고 훈련원 첨정을 증직받았다.
2013년 현재 석대동에는 창원 구씨 4가구가 살며, 동래 문중[동래·기장 포함] 전체로는 150가구 정도 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동상면 석대동에 창원 구씨 4가구가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 창원 구씨 부사공파 동래 문중에서는 해운대구 석대동 산104-4번지 일대에 임란왜란에서 활약한 응진공 묘역 및 구영취공 기적비와 구주성공 정효비 그리고 창원 구씨 부사공파 제단비를 세워 창원 구씨 충효원(忠孝園)을 조성하였다. 석대 선영 부사공파 제단에는 입향조 구맹립[6세조]에서부터 구응달(10세조)까지 모신다. 제향은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문헌 『부산의 전통과 문화』 (박약회 부산지회, 2001)
『창원 구씨 동래 문중지』(창원 구씨 동래 문중, 201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