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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요양서비스 우수사례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 학남댁과 명찰 >
강의시간에 치매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에게 발표를 권유했다. 준비되지 않은 발표를 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치매 대상자를 시아버님으로 택했다. 사실 준비한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섰지만 마이크를 들고 시작하려는 순간 가슴이 복받쳐 왔다. 눈물이 먼저 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서 감정을 억누르고 약간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소개로 시작했다. 그때 나를 주시하던 사람들이 박수로 용기를 갖게 해 주었고 스쳐가는 얼굴 중 함께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보는 순간 복받치는 감정을 정리하고, 지나온 세월 속에서 치매로 인해 겪은 어려움을 차근차근 토해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를 보고 누구집 새댁이냐고 나에게 물으시던 것이며, 요강에 손을 씻고 국이라고 마시며, 돈이 없어졌다고 나를 파출소에 신고하신다고 하신 그 모습, 어떨 때는 변을 얼굴에 바르시고도 웃고 계시는 모습 등 치매로 인한 경험과 힘들었던 점을 다 토해내기에는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시아버님 흔적을 함부로 말한다는 것이 힘들고 죄송한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요양보호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란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치매로 인한 경험을 전달하기에 시간이 부족했지만,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던 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생명이라도 젋은 우리가 끝까지 지켜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또, 우리가 교육이 끝나서 취업을 한다면 어느 대상자를 만나더라도 혼신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을 가슴에 새기지 않는다면 이번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끝으로 인내와 사랑으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좋은 답을 만들 수 있다는 결론으로 발표를 마무리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오늘의 일을 되돌아 보았다. 과연 사람들한테 내 발표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을까?혹시라도 거부감을 주지 않았는지, 또 잠시나마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내 눈물은 무슨 의미를 갖게끔 해주었는지, 많은 혼란들과함께 다시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나는 내가 흘린 눈물에 대해서는 부끄럽지 않다.오히려 어느 한 구석이나마 내 삶이 윤택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신 시아버님께 죄송한 마음과 감사를 드리고 싶다.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우리들의 부모님들… 지금 이 순간 천국으로 가셨지만 아버지께서 나에게 요양보호사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게끔 해 주셨기 때문에 나에게 남겨진 숙제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나는 00노인요양센터에서 서비스 제공을 받고 계시는 일흔아홉 되신 000 어르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느 날 친구 병문안을 간 그 병실에서 어르신을 만났다 .그때 어르신은 통증이 정말 심해 침대를 꼭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고통을 참고 계셨다. 옆에 있는 자제분이 내 가슴에 붙은 요양보호사라는 명찰을 유심히 보더니 잠시 후 “저희 어머니를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대해서 그리고 서비스를 받고자 할 때의 절차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한달 후, 어르신의 자제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저희 어머니께서 등급을 받으셨답니다”. “그래요?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어르신께서는 몹시 힘들어하셨고 자제분께서는 뭔가 어르신을 설득하고 계셨다. “엄마 요양보호사가 엄마를 도와드릴 수 있대요. 국가에서 혜택을 주는 거예요.” 계속되는 설득에도 `괜찮다‘고 거부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이 정말 안타까웠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할머니, 제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할머니께서는 내 얼굴을 한없이 보셨다. 그 순간 눈과 눈이 마주치면서 할머니의 애절함과 내 간절함이 공유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3일만 와서 도와주면 안 될까?” “네. 그럼 3일만 서비스를 받아보세요.”마침내 자제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려놓았다.
그날 이후 퇴원을 해서 나는 요양보호사로서 최선을 다해 수발을 해드렸다. 3일은 너무 짧았고 여전히 할머니께서는 차도가 보이지 않으셨다.드디어 약속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할머니와 제가 약속한 3일째입니다. 내일부터는 혼자 계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할머니께서는 “안돼. 이제는 안 오면 내가 못살 것 같은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르신의 병세는 5년 전에 골반이 내려앉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정신력은 초롱했고, 성품 또한 고르셨다. 골반의 통증으로 인한 고통의 소리는 내 가슴에도 수시로 와 닿았다. 놀랍게도 힘겨운 고통 속에서도 할머니께서는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 나는 더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회복시키고자 어떤 어려움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나는할머니의 정신적 회복에 더 최선을 다하였다. 때로 입맛이 없어 상을 물릴때도 많았다. 난 그럴 때마다 “할머니, 많이 드시고 빨리 회복하셔서 화단에 핀 장미, 백일홍, 라일락을 마당에 내려가서 가까이 보면서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머니 꽃 좋아하시잖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밥상을 다시 당기시는 지혜로운 할머니. 오히려 나 자신이 할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틈날 때마다 용기가 되는 이야기, 자신감이 생기는 이야기 등 할머니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 드려서 웃게 해드렸고 웃음이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서비스에서 구토, 설사를 동반한 예기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 나 혼자 감당하기에 어려웠지만 할머니께서는 병원에 가시는 것을 거부하시고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씀에 나는 더 좋은 방법을 택할 수가 없었다. 서비스 시간은 훨씬 넘은 상황이었지만 차마 혼자두고 등을 돌리고 나올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요양보호사~요양보호사~” 나를 부르시는 할머니 목소리가 간절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나는 놀란 마음으로 할머니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머니께서는 서 있는 나의 다리를 붙잡고 “오늘 저녁은 내 옆에서 같이 자주면 안될까”
힘없는 목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네 그럴께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때서야 숨을 몰아쉬셨다. 나는 그날 밤 할머니 옆에서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많을 것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그리고 우리가족에게 감사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밖에서 자는 날이었다. 딸은 엄마가 밖에서 자면서 할머니를 돕는 모습에 대단하다고 말해 주었고, 아들은
“엄마 나도 같이 자줄까?” 라고 했다. 그리고 밤늦게 배고플까봐 김밥을 사다주고 간 남편 뒷모습에 더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 앞에서 가족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줌으로써 회복의 애착을 갖게 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께서는 힘들어 하시는 가운데에서도 나의 남편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날 밤 할머니의 통증을 나와 함께 나누었다. 고통스러워도 함께 했으며, 할머니께서 토하실 때 나도 함께 구역질을 했다. 훨씬 덜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갔고 병원에서는 빠짐없는 왕진으로 도움을 주셨다. 그리고 나의 차로 수시로 병원을 방문하여 물리치료와 주사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병원과 이웃어른들도 많은 관심 보여주었다. 서비스 3개월 째에 접어든 어느 날 아침. 서비스를 하고자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굴까?’ 동네 어르신인가 ?“ 하고 문을 열었다. 그순간,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나! 할머니께서 부엌에서 쌀을 씻고 계셨다. 할머니의 서 있는 모습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큰 고통을 이겨냈다는 사실에 큰 소리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부엌에서 춤을 추었더니 그렇게 좋으냐고, 요양보호사 간호 덕이라고 다시 한 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까지 살면서 칭찬을 받은 기억이 별로없다. 그러나 요양보호사 명찰을 달고 부터 길을 가다가도 ‘좋은 일을 하네.’라는 말을 듣는다. 또, 나를 아는 분들은 ‘체질적으로 맞네.’라고도 하고, 열명 중 아홉 명은 ‘얼굴만 봐도 힘이 솟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 많은 인사를 들을 때마다 살면서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어느 날 식사를 하시고 난 뒤, 할머니가 이불 밑에서 긴 종이 한 장을 꺼내셨다. 나에게 주시려고 쓴 편지라고 하셨다.나는 문종이에 세로로 쓴 글을 떨리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세월이 좋다고 할까, 내가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할까,
2005년 8월에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안하면 석달을 못 넘긴다며 입원을 권유하는데 나는 수술을 절대로 안할 것이고 집에 가서 죽겠다고 한사코 거절하고, 집으로 와서 만 4년을 나의 아들 며느리 지극한 효성으로 버텨왔는데 2009년해는 한 가지 병이 더 겹쳐서 이번에는 꼭 죽을 것이라 믿었는데, 정부 시책도 고맙지만 요양보호사라는 남의 딸이 안아주고 먹여주고 지극한 간호로 자기 시간을 빼앗겨가며 정성을 다하여 아직 모르지만 또 살아날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참 행복해. 효자효부에다 요양보호사까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니 나의건강이 점점 좋아지는가 봐. 속담에 충신을 구하려면 효자문에 한다더니, 제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 남의 부모에게도 잘하는가봐. 나는 이 요양보호사가 매일 와서 웃겨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가면 살 것 같다. 이런 보호사가 끝까지 지켜주면 좋겠다.
2009년8월 14일 학남댁
정말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총명하신 할머니께서 나에게 주시려고 할머니마음을 쓴 편지에 더 큰 용기를 갖게 되었고, 가슴이 찡했다. 그 연세에 쓰신 편지치고는 정말 잘 쓰신 편지였다. 할머니께 내 마음의 답장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할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부족한 제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데 대해서 주위 모든 분께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질게요.”라고 했다.
듣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아무것도 줄 것도 없고, 내 마음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꼭 써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 순간에 씹고 있던 밥알이 감동으로 목에 턱 걸렸다. 또 한편, ‘진실된 봉사와 헌신이 헛되게 전달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내 가슴에 달고 있는 명찰을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어떻게 달고 다니냐’고도 하고 ‘요양보호사는 파출부라고 하던데’라는 등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요양보호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며, 난 내 명찰을 사랑하면서 어르신께 봉사하는 내 일을 희망이자 꿈으로 가슴 깊이 새길 것이라고,끝없이 내 건강이 날 지켜준다면 초심을 잃지 않고 가슴에 단 명찰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오늘 공단에서 직원이 다녀갔다고 하시면서 약간 얼굴에 미소 아닌 미소를 띄우면서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았다. “직원이 할머니께서 서비스를 잘 받고 있는지 확인하러 왔을 겁니다.” “그래, 목욕의자 잘 사용하는지 묻고, 방에 잠깐 있다가 갔다.” 고 하셨다. “우리집에 오는 요양보호사, 너무 정말 잘하고 날 이렇게 다 낫게 해 주었데 상 주면 안 되느냐고 했어.” “할머니,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해요.” 할머니는 나에게 쓰신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직원이 할머니에게 물었다요고 했다. “정말 할머니께서 쓰신 거에요?” 옛날 글이라 알아보겠냐고 물었더니, “네. 할머니 알아보겠어요.”라고 말하고는 할머니께 “이 글 제가 가지고 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상 주려거든 가져가거라 했는데 그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자꾸만 칭찬을 받을때마다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또 한편 가슴은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할머니는 재등급 판정을 받게 될 경우 나와 만나기 힘들것 이라는 걸 알고 계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할머니, 제가 안 오는 것은 섭섭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께서 오래오래 예쁜 꽃을 볼 수 있고 물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좋잖아요. 통증으로 신음하는 소리보다 웃음소리가 나오는 할머니 모습을 보는 게 저도 더 좋아요.’라고
일전에 옆집 할머니께서 놀러 오셨다가 “자네가 학남댁을 살렸네 이번에는 죽는 줄 알았는데.”라고 하시길래 “아니에요. 어르신이 할 일이 많으셔서 다시 일어나신 거예요.”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이웃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칭찬하시는 걸 마음으로 많이 느꼈지만 사실은 할머니의 의지가 더 크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할머니께서 일어나신 그 후, 동네에 내 이야기가 조금씩 조금씩퍼지면서 요양보호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직업인지 인식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요양보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가정의 사소한 도움도 중요하지만, 어르신을 가슴으로 대하고 대상자가 필요로 하는 요양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르신께 가사일, 따뜻한 음식도 중요하지만, 어르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헤아려 줄 수 있고, 힘든 삶을 공유한다면 이 또한 서비스의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요양보호사가 요양 대상자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한다면, 국가에 공헌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요양보호사는 명찰을 자신 있게 달고, 어두운 곳에 힘이 되고, 기쁨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서비스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돌아가신 시아버님과 건강을 회복하신 대상자 어르신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학남댁과 명찰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2009년 12월 24일 금성노인요양센터 요양보호사 이명숙
- 할머니께서 써주신 편지
첫댓글 이명숙 요양보호사님께 감격의 큰 박수 보냅니다. ㅉㅉㅉ
언제나 ~ 힘을 주는 너에게도~ ㅉㅉㅉ 낭송가님! 어제 저녁 폰수업 좋았니더~~날개! 몇시간 안남은 주말 잘보내고~~^^♡
'가슴으로 대하고 대상자가 필요로 하는 요양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효부의 자세는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변함 없군요.
요양보호는 헌신과 희생정신이 없으면 아무나 못할 것 같습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따듯한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그대는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우리들의 작은 영웅입니다.
늘~보내준 따뜻한응원 힘입어 더 많이 잘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