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아시아 지역의 편력
그는 보카라를 여행하던 중에 어떤 유벽(幽僻)한 지방에 사는 한 부락민이 재림의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예멘에 있는 아라비아 인들은 세에라(Seera)라고 하는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께서 영광중에 통치하실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840년에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나는 예멘에서 레갑의 후손들과 함께 6일간을 지냈다. 그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않고 곡식도 심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에 살며, 레갑의 아들 선한 여호나답을 기억한다. 나는 또한 이 족속 중에 메시야께서 속히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기를 레갑의 자손과 함께 고대하고 있는 단 족속인 이스라엘인의 후손이 있음을 보았다”(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어떤 다른 선교사는 그와 비슷한 신앙을 가진 자가 타타르(Tatary) 지방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타타르의 한 승려는 그 선교사에게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쯤 재림하실 것이냐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그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그 승려는 성경을 가르치노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그 사건을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예언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1844년경에 재림하시리라는 자신의 소신을 말하였다.
영국에서의 재림운동
일찍이 영국에서는 1826년에 재림기별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운동은 미국과 같이 그렇게 분명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재림의 정확한 시일은 일반적으로 그처럼 가르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미구에 임하신다는 큰 진리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 진리는 다만 비국교도(非國敎徒) 사이에서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저술가 무란트 브로크는 약 700명의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도 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연합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1844년을 재림의 때라고 알려 주는 기별도 대영 제국에서 전파되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재림에 대한 간행물들이 널리 배포되었으며, 영국에서도 많은 서적과 잡지들을 재발행하였다. 그리고 1842년에는 미국에서 재림 신앙을 받아들인 로버트 윈터라는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재림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연합하였으며, 심판에 관한 기별이 영국 각처에 전파되었다.
아직 미개한 채 로마교의 정략(政略)에 사로잡혀 있던 남미주에도 한 스페인인이며 예수회 회원인 라쿤자라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경고를 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느꼈으나 로마교의 견책이 두려워서 자기의 이름을 랍비벤 에스라라고 고쳐서 마치 개종한 유대인인 것처럼 꾸며 가지고 자기의 견해를 출판하였다. 라쿤자는 18세기의 사람이었으나 그의 저서가 런던으로 가서 영어로 번역되기는 1825년경의 일이었다. 이 책의 발행은 영국에 있어서 이미 재림문제에 눈을 뜬 사람들의 관심을 깊게 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독일에서의 벵겔의 활동 독일에서는 18세기에 루터 교회의 한 목사요 성경학자요 평론가로 유명한 벵겔이라는 사람이 이 교리를 가르쳤다. 벵겔은 학업을 마치고 신학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가 받은 초기의 교육과 훈련은 그의 마음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엄숙한 생각과 종교적 기질을 깊게 하고 강하게 하였다. 그도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사고력(思考力)이 많은 다른 청년들처럼 종교적 의문과 어려운 문제들로 인하여 번민하였는데, 그는 감개무량한 가운데 “자기의 가련한 마음을 꿰뚫고 그 젊은 감정을 못 견디게 만들었던 허다한 화살들에 대하여 말하였다.” 비텐베르크의 종교 법원(宗敎法院)의 일원이 되자 그는 종교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는 교회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는 한편, 양심을 위하여 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누릴 온갖 자유를 위하는 옹호자가 되었다”(Encyclo-pedia Britannica, 9th ed., art.“Bengel”). 그와 같은 방침에서 나온 훌륭한 결과가 오늘날에도 그의 고향에 남아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진리가 벵겔의 마음에 확신을 준 것은 그가 강림절(降臨節)의 일요일에 사용할 설교의 준비를 위하여 요한계시록 21장을 연구하던 때이었다. 그는 이때에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과거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 예언에 나타난 광경이 너무도 중대하고 영광스럽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한동안 그 문제에 대한 명상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되자 그 생각은 다시 생생하게, 또한 능력 있게 그에게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는 예언서, 특히 요한계시록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그 예언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라고 확정한 연대는 그 후에 밀러가 주장한 연대와 비교하면 매우 근소한 차이밖에 없었다.
벵겔의 저서는 그리스도교국에 널리 전하여졌다. 예언에 관한 그의 견해는 그의 고향인 비텐베르크에서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독일의 다른 지방에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그 운동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재림기별은 독일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같은 시기에 전파되었다. 또한 초기의 신자들 중의 몇 사람이 러시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이민단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그 나라의 독일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신앙을 존속시키고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의 재림운동
빛은 프랑스와 스위스에도 비추어졌다. 일찍이 파렐과 칼빈이 종교개혁의 진리를 선포했던 제네바에서 가우센이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학생시절에 가우센은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휩쓸고 있던 합리주의 사상(合理主義思想)과 접촉한 적이 있으며, 그가 직접 전도에 종사하게 될 때에 그는 아직 참된 신앙을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회의론(懷疑論)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롤린이 저술한 “고대 역사”를 읽은 후, 그는 다니엘서 2장의 말씀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 사가(史家)가 기록한 그대로 성경의 예언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성취된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실로 그것이 후년에 그가 위험 중에 처할 때 굳센 닻의 역할을 해주었고,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드디어 그는 합리주의 사상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고, 성경을 연구함으로 더욱 분명한 빛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결국 적극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예언을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재림이 절박하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위대한 진리의 엄숙하고 중대함을 절실히 느낀 그는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엘의 예언은 오묘한 것이므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그의 사업은 큰 장애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이 파렐이 제네바에서 전도할 때 사용한 방법, 곧 먼저 어린이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방법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훗날에 그는 당시에 사용했던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다 아는 방법으로 진리를 전하고자 작정하고 아이들에게 진리를 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중요성이 작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 진리의 가치가 컸기 때문이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나의 말을 들어주기를 희망하였지마는 내가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지 아니한 것은 그들이 들어주지 아니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가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아이들을 청중으로 모으기로 하였고, 그 청중의 수효가 많아지고 또 그들이 나의 말을 듣고 기뻐하고 흥미 있게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하기까지 되면, 나는 미구에 그 다음 단계의 활동 분야가 전개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 다음에는 어른들이 참석하여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만 되면 이 일은 성공하게 된다”(L.Gaussen, Daniel the Prophet, vol.2, Preface).
그 활동은 성공하였다. 그가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어른들도 들으러 왔다. 그의 교회의 좌석들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청중들로 만원이 되었다. 그 청중 가운데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네바를 찾아온 나그네들과 외국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들은 기별은 다른 지방으로 전해졌다.
이와 같은 성공으로 용기를 얻은 가우센은 프랑스어를 말하는 교회들에게 예언서의 연구를 장려할 목적으로 그가 가르친 내용을 출판하였다. 아이들에게 들려준 교훈을 출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구실로 이런 종류의 책들을 흔히 등한히 여기는 어른들에게 ‘아이들도 이해하는 것을 어찌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신자들에게 예언의 지식을 가르쳐 주려고 크게 열망한다.” “오늘날 예언의 연구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절박한 환난을 위하여 준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다.”
가우센은 프랑스어를 말하는 전도자 중 가장 유명하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으나 얼마 후에 그는 한갓 합리주의(合理主義)의 교본에 불과하고 적극적 신앙이 거의 결여되어 있는 교회의 문답서를 사용하지 않고 성경을 가지고 청년들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교역직에서 면직되었다. 그 후에 그는 신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일요일에는 전도자로서 활동을 계속하여 아이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쳤다. 그가 저술한 예언에 관한 서적은 사람들의 마음에 많은 흥미를 일으켰다. 그는 교수의 위치에서 또는 인쇄물을 통하여, 혹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교사로서 여러 해 동안 계속적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큰 감화를 끼쳤다. 동시에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알려주는 예언의 연구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