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논쟁
개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장 4-6절에 수록된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이다.
A.D. 313년에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들의 칙령이 반포되자, 오랜 박해 기간 동안 숨어 지냈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요청에 의해 황실 점성관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와 유세비우스 감독의 협상 성공으로 제국의 불패의 태양신 아폴로와 기독교의 의의 태양 그리스도가 통합되어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을 제국의 공적 휴업일로 제정, 공포하게 되었다(A.D. 321. 3. 7). 뒤이어 라오디게아 총회에서 일요일 예배를 결의하게 되자 교회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태양신교로 변모해 갔다.
이런 상황을 A.D. 330년 경 로마 황제의 딸을 위하여 건축된 성당 산타 콘스탄자(Santa Constanza) 벽화에 그려진 모자이크(The Earliest Christian Wall Mosaics)에서 읽을 수 있다. 그 모자이크 그림의 내용은 다분히 주신제적이고 이교(Dionysiac and pagan)적인 묘사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를 이교의 요소로 묘사했다.
A.D. 401-417년에 건축된 또 다른 성당(Santa Pudenziana) 벽화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보좌에 좌정하신 모습이 세속적인 통치자로 표사되어 있고 그 모자이크 그림을 향해 경배하도록 하였다.
마리아 숭배 시작
A.D. 430년에 에베소 회의에서 오랫동안 논쟁 끝에 마리아를 ‘데오토코스’(θεοτοκος) 즉 하나님을 낳은 신이라 하여 “마리아 여신 숭배”(Mariolatry)를 결의하였다.
그러자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이탈리아 전역과 그리이스, 소아시아 등지에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들이 세워지고 각종 이교의 신전들이 마리아 성당으로 바뀌면서 마리아 신상을 성당 안에 설치하고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그것의 최초가 로마에 A.D. 342년에 세워진 성 아네세 성당(the Basilica of sant' Agnese)일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성스러운 지혜) 성당 돔(Dome)의 정상 중앙의 쿠폴라스(Cupolas)에도 십자가형과 그리스도의 초상화 그리고 태양상이 모자이크 되었다. 그리고 벽에는 마리아가 모자이크 되어 있어서 마리아 숭배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을 “성상파괴자들”(Iconoclast)라고 하는데 그들의 항쟁은 나날이 거세어졌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성상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에 마침내 황제가 개입하게 되었다.
동방, 특히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교회들이 극성스런 성상 숭배, 그리고 신화와 미신으로 급속히 타락하자 A.D. 725년에 황제 레오 3세(Leo Ⅲ, 680-741)는 교회 정화 차원에서 성상 숭배만을 금했다. 황제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그리이스와 소아시아의 신도들과 수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다음해(726)에 교회의 미신들을 척결하고 신화와 성상 숭배를 철폐하는 칙령을 로마 제국 전역에 반포했다. 황제의 이 칙령에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시실리아 등의 각지의 교구들이 분노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 2세(Gregory Ⅱ, 715-731)는 황제 레오의 칙령을 정죄했다. 황제는 황권이 미치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아 교구를 교황권 내에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로 이전시키고,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을 파면했다(730).
A.D. 731년에 새 교황 그레고리 3세(731-741)가 즉위하자 로마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성상 파괴자들을 파문했다. A.D. 741년 레오 3세가 죽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Ⅴ, 741-755)가 선황을 뒤이어 황제에 즉위하면서 선황의 종교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A.D. 753년에 콘스탄티노플 총회를 소집하고 성상 숭배를 엄금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게 했다. 이 결의문은 예수와 마리아의 성상을 성당에 안치하고 분향하면서 경배하는 서방 교구의 신자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터뜨리게 했다. 그래서 도처에서 반란이 발생하였으나 황제는 군대를 출병시킬 수가 없었다. 아라비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중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롬바르트의 이탈리아 침공을 견제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신흥 북방 세력인 프랑크에 원병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와 시실리에 대한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니케아 총회에서 성상 숭배 결의
A.D. 775년에 레오 4세(775-780)가 황제의 위를 계승했으나 돌연한 죽음으로 그의 어린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6세(780-797)로 즉위했다. 황제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그의 모친 이레네(Irene)가 섭정했다. 그런데 황모 이레네는 대단한 성상광이었다. 그녀는 성상 숭배를 합법화하기 위해 A.D. 787년에 제7차 니케아 총회를 소집했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Ⅰ, 772-795)는 이 총회를 환영하며 사절단을 파송했다. 니케아 총회는 우선 753년에 결의, 채택된 콘스탄티노플 결의문을 무효화하고 다음과 같은 성상 숭배를 용납하는 니케아 총회 결의문을 의결했다.
“우리의 고백을 간단히 말한다면 ‧‧‧ 생명을 주는 귀중한 십자가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그림이나 모자이크나 ‧‧‧ 거룩한 성상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안치되어야 하며 그 성상들을 ‧‧‧ 우리 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흠이 없는 성모, 하나님의 어머니와 또 존귀한 천사들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형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상들에게 분향하며 촛불을 켜는 것은 고대의 경건한 관습에 따라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니케아 총회는 로마에서 롬바르트의 침략을 격퇴시켜 준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Charlmagne)와는 사전에 아무 협의가 없었기에 왕의 사절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니케아 총희 의사록의 라틴역을 프랑크왕 샤를마뉴에게 제출했다. 왕은 성상 숭배(adoration)는 우매한 행위라고 냉소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하고 경배해야 한다(adorandus et colendus). 그리고 성자는 단지 존경만을 표할 것이다”(Libri Carolini-카롤링 왕가의 문서)고 날카롭게 비평했다.
그리고 A.D. 794년에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의 제2차 총회에서 채택된 법규집에서는 성상에 대한 모든 숭배와 니케아 총회의 결의문을 정죄했다(Mansi, ⅷ 909). 그러나 카롤링 왕조의 프랑크 왕국의 몰락으로 로마 카톨릭은 성상 숭배에 대해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제국의 황권에서도 이미 벗어났으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동방 교구와 분리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신 숭배의 이교를 철폐하라는 A.D. 392년에 공포되었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재위 379-395) 황제의 칙령에서 벗어나 이제는 버젓이 성당 안에서 이전에 섬겼던 이교의 각종 남녀 신상들을 예수와 사도들 그리고 마리아 여신상으로 대치하여 섬기게 되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내렸던 칙령은 다음과 같다.
“신분상 어떤 계층에 속하거나, 관직의 고하를 불문하고 또 어느 곳의 도시에 살든지 빈부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아무 무감각한 우상에게 순결의 제물을 드리지 못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어떤 형상이든지 거기에 숭배함으로써 어리석게도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나타내거나 ‧‧‧ 미신에 흠뻑 빠져 버렸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자는 하인을 막론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계명의 삭제
그러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회 총회의 결의문과 교황의 칙서에 따라 이 둘째 계명을 십계명에서 아주 삭제하여 없애 버렸다. 그리고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10개로 맞추었다.
일찍이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진위를 가늠하는 안식일 계명을 거절하고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을 ‘주일’(The Lord’s day)이라는 명칭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우상숭배라는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인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고 명하신 분께서 또한 동시에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출20:23)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 교회 최고 통치자들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세속의 황제나 왕을 통해서 여러번 견제 하셨으나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승리하였다고 개가의 함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입법자이신 왕의 왕께서 오셔서 국문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ανομιας-율법을 대적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