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 양의 출발 시간이 이른 새벽이어서 숨을 죽이고 움직이다 보니 모든 소음이 두런두런하게 들렸다.
" 가방이 좀 무거웠지요, 아저씨? 에스키모들이 만든 민속 공예품들을 좀 사 모았거든요. 그 문양들이 특이해서요."
차에 싣던 가방 하나가 유난히 무거워 내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더니 차를 출발시키기가 바쁘게 춘자 양이 설명을 했다. 에스키모 공예품이라면 돌을 재료로 쓴 물건들이 많을 터이니 그럴 만도 했다.
" 그 쪽 공부를 했던가요?"
" 아닙니다.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는데 우연히 박물관에 취직을 하다 보니 문양에 흥미가 생겨서요. 전에는 몰랐는데 제가 엄마를 닮아 미술에 재능이 좀 있었나 봐요. 엄마가 그림 공부를 못하신 게 늘 한이셨거든요.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그 쪽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는 싶습니다."
춘자 양이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날이 밝아 오는 하이웨이 주변은 군데군데 단풍이 들고 있었다.
" 서울에, 아니 지금은 인천이 되겠군요. 공항에 도착하면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시겠지요?"
" 아니요. 제 남자 친구가 나올 겁니다. 엄마는 3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 ……."
나는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아버지는요?"
" 아빤 처음부터 안 계셨습니다.”
“ ?”
“ 엄마는 아빠에 대해 말한 적이 없거든요. 어릴 때, 아빠가 궁금해서 한 번 물어 보았는데 엄마가 많이 상심하셔 종일 술만 드시는 걸 보고 다시는 묻지 않았습니다.”
“ 많이 궁금하겠어요?”
“ 그럼요.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심수봉이라는 가수에게 질문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왜 당신의 노래에는 꼭 남자가 나오냐니까,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살아 세상 남자는 전부 아버지라고요. 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어요.”
“ 어머니가 아니라도 무슨 흔적 같은 게 없을까요?”
“ 전 엄마가 남자를 사귀는 걸 본 적이 없고, 집에는 아빠라고 생각될 만한 사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알 수가 없었죠. 그래도 나중에 크면 다시 한 번 물어 보려 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이젠 틀렸죠 뭐."
" 남자 친구랑 결혼을 하게 되면 꼭 캐나다로 신혼여행을 와요. 그 땐 내가 아빠 노릇을 해 줄 게요!"
"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저씨도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
멀리 공항 청사가 보였다.
까마득한 세월 저 쪽에서 천쌍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유배지로 떠나는 심정이어서 둘레에는 되도록 이민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낯 선 수사관에게 조용히 떠나겠다는 다짐을 한 상태이기도 했다. 공항에는 아주 가까운 친척 몇 만이 나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성였다. 아픈 기억만 안고 떠나는 땅이지만 다시는 돌 아오지 않을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게이트를 들어가던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어른거리는 눈에 천쌍녀의 모습이 비쳤다. 한 번도 이민을 말한 적이 없는데 그녀가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사람을 피해 멀찍이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눈에서인지 그녀의 눈에서인지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 윤곽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냥 창백 하도록 하얗게 보일 뿐이었다. 때라곤 조금도 묻지 않은 순백의 덩어리 같았다. 쉬지 않고 실실거리던 그녀의 주절거림이 얼마나 처절하고 외로운 몸부림이었던 지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