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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羅裕) 연보
나유(羅裕, 1224년 고려 고종(高宗) 11년 생~1292년 6월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 몰; 향년 69세)
고려 시대 후기 무신
고려 후기 장군•대장군
고려 후기 원나라 원정의 선봉장
고려 후기 삼별초 토벌의 선봉장
고려 후기 삼별초 토벌•일본 정벌•합단(哈丹) 토벌•원나라 원정의 일등공신 대장군
『고려사』 「열전」 「나유 전」의 주인공
고려 후기 예부상서 나효전(羅孝全)의 손자
고려 후기 형부상서 나득황(羅得璜)의 맏아들
고려 후기 첨의정승•동경유수•부사 나윤(羅允)의 맏형
고려 후기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의 부
고려 후기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의 조부
삼사사 홍융(洪戎)의 아들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의 외조부
고려 후기 명경박사•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羅文奎)의 증조부
고려 후기 경선점녹사•견룡행수•전라도부부사•지병마사•응양군 대호군•무덕장군 관군천호•지신사•부지밀직사사•하정사(원나라 파견)•이등공신•동지밀직사사•중익부만호•상장군•일등공신 명위장군(원나라 원정 공훈)•충청도도순문사•세자원빈•지밀직사사•정조사(원나라 파견)•회원대장군(원나라 원정 공훈) 역임.
지밀직사사•이등공신•일등공신 명위장군•회원대장군(장군•대장군)
본관 금성(錦城) 금성(錦城) 나(羅) 씨
금성(錦城) 나(羅) 씨 10세손(시조 삼한공신 대광 나총례(羅聰禮)의 10세손)
자 철준(哲準)
처 백천(白川) 조(趙) 씨 장군 조문주(趙文柱, 출생 연도 미상~1269년 몰)의 여식
―나유 장군의 장인 조문주 장군은 정4품으로서, 만호•내시 대장군•동지추밀원사•위사보좌공신을 역임했고, 원종 폐위 당시 임연(林衍)에 의해 시해당했다.
―인종 폐위 당시 연루되어 임연(林衍)에 의해 경선점녹사 나유의 장인 조문주 장군이 시해되었고, 임연이 이혼을 강요했으나 거부했다.
―장군으로 승진해 원수 김방경과 함께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대장군에 올랐으나, 귀향해 보니 처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관례대로 나유는 신처(新妻)를 들였다. 그러나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간 전처가 뒤늦게 풀려나 되돌아오자, 당시 관례상 포로가 되었던 처는 버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나유는 전처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부부로 받아들였다는 후문이 있다.
나유의 자녀 1남 3녀
1남 맏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양절(良節)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
―상천호•관군상만호•신호위 호군•검교상호군•상의평리•계림윤•첨의참리•금성군 역임.
1녀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홍융(洪戎)의 처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 씨 조위(趙瑋)의 처
3녀 함풍 이 씨 시조 이광봉(李光逢)의 처 통의군부인
고조부 고려 전기 문신 의종조 도첨의•벽상삼중대광도검의•나주호장 금성부원군 나국영(羅國英, 생몰 연도 미상, 고려 인종조~명종조 인물, 금성 나 씨 6세손; 고려 명종 당시 나라가 어지럽다는 사유로 나주호장을 자청해 낙향한 인물)
증조부 고려 명종조 관검교대호군 나인겸(羅仁謙, 명종조 과거 급제, 금성 나 씨 7세손)
숙증조부 고려 명종조 관지상장군 금성부원군 나수겸(羅守謙, 명종조 과거 급제, 조부 나인겸의 아우, 금성 나 씨 7세손)
조부 한림원직학사•예부상서 나효전(羅孝全, 고려 강종조~고종조 인물; 금성 나 씨 8세손, 초명 광취(光就))
―고려 강종조 문과 급제, 황태중대부•지도성사•한림원직학사•예부상서 역임.
―고려의 부자(父子) 상서(조부 예부상서 나효전, 부 형부상서 나득황)
부 형제
백부 부정 나득신(羅得臣, 아들 순검사 나철준(羅哲準))
부 형부상서 낙헌(樂軒) 나득황(羅得璜)
모 나주 정(鄭) 씨
부 나득황의 자녀 3남
1남 본인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1224년 고려 고종(高宗) 11년 생~1292년 6월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 몰; 향년 69세)
2남 동생 첨의정승•동경유수•부사 나윤(羅允, 1300년 고려 충렬왕조 인물, 초명 나인(羅認))
3남 동생 나종(羅宗)
본인 나유의 자녀 1남 3녀
나유의 아들 1남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양절(良節)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
―상천호, 관군상만호, 신호위 호군, 검교상호군, 상의평리, 계림윤, 첨의참리, 금성군 역임.
나유의 여식 1녀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삼사사 홍융(洪戎)의 처
나유의 여식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 씨 지밀직•평양부원군 조위(趙瑋)의 처
나유의 여식 3녀 함풍 이 씨 시조 이광봉(李光逢)의 처 통의군부인
나윤의 아들 1남 밀직사 상장군∙도승지 나천부(羅天富)
손주
손자 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생~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몰; 향년 71세)
외손자 나유의 여식 삼사사 홍융(洪戎)의 처의 아들 첨의상의•삼사우사•남양군 홍주(洪澍)
외손자 나유의 여식 삼사사 홍융(洪戎)의 처의 아들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
외손자 나유의 여식이자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삼사사 홍융(洪戎)의 처의 아들 안동도호부사•일등공신•밀직부사•남양군 홍언유(洪彦猷)
증손
손자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의 아들 명경박사•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羅文奎, 1312년 고려 충선왕(忠宣王) 복위 4년 생~1379년 우왕(禑王) 5년 몰; 향년 68세)
후손
고려 수군 원수 나세(羅世, 1320년 생~1397년 몰) 장군(원나라 화약 무기 유학, 원나라 조선족 2세(재원 교포 2세) 설, 세계 최초의 해상 원거리 포격전 군산 진포 대첩의 지휘관, 나주 나 씨 5대조 선조로서 공민왕조 문과 과거 급제 후 한림상원사•판도판서•연안군•장군•원수 역임)
11대조 후손
우리나라 조선업(造船業)의 아버지 나대용(羅大用, 1556년 생~1612년 몰) 장군
―과거 병과 급제•훈련원봉사•전라좌수영 군관•유군장•강진현감•금구현감•능성현감•고성현감•곤양군수•남해현령•제 경기수군 교동수사•수군장•장군, 선조조 종4품 조봉대부 능성현령•광해군조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 승급•광해군조 종2품 가선대부 경기도수사 제수
―원나라 원정의 선봉장 나유(羅裕) 대장군의 11대조 후손
1224년 1세 고려 고종(高宗) 11년 부 나득황 20세에 나득황의 맏아들•나효전의 손자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출생
1226년경 3세 고종 13년 부 나득황의 2남•조부 나효전의 손자•나유의 첫째 동생 첨의정승•동경유수•부사 나윤(羅允) 출생
1228년경 5세 고종 15년 부 나득황의 3남•조부 나효전의 손자•나유의 둘째 동생 나종(羅宗) 출생
1240년경 17세 고종 27년 사망 연도 미상, 조부 예부상서 나효전 서거, 향년 70세
1251년 28세 고종 38년 부 나득황 47세에 예문과 과거 급제
1252년 29세 고종 39년 임자년 부 나득황 48세에 8월에 선지사용별감 파견(무신정권 최우(崔瑀, 출생 연도 미상~1249년 몰)가 여러 명의 별감을 각 도로 파견했으며, 각 도의 지역민들이 패정(悖政)에 대해 우려감을 표했다. 이 당시에 나득황 별감은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는 주구(誅求)로 악명이 높았다). 『고려사절요』 제17 고종조에 무신정권 제7대 집권자 최항이 나득황을 선지사용별감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1257년경 34세 고종 44년 부 나득황 53세에 장흥부사, 전라안찰사(6개월 임시직) 역임(무신정권 최우의 아들 최항(崔沆)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항은 1257년 사망했다. 최항에게 아첨해서 관직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1260년 37세 고려 원종(元宗) 원년 부 나득황 56세에 1월 제주부사 겸 방호사, 특치방어사 겸임 장물죄로 파직된 고려의 탐관오리 송소(宋紹)에 이어 제주부사로 부임했고, 제주 백성들이 큰 도둑(大盜賊)을 만났다고 평했다고 한다. 2월 나득황 판예빈성사(정3품) 제주부사 겸 방호사 임명(제주 주변이 당시에 송 상인들과 왜구들이 출몰해서 혼란한 때라서 정3품 판예빈성사 나득황을 제주부사 겸 방호사로 임명했다는 후평). 나득황의 제주 평정 공훈으로 황금자광록대부 사공상서 임명. 나득황 좌복야, 판호부사 역임. 당시 중국 원나라 때 여몽 전쟁(麗蒙戰爭)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고려 조정이 피신하기 위해 정3품 판예빈상서 나득황을 제주부사로 파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263년 40세 원종 4년 부 나득황 59세에 12월 20일 추밀원부사 임명, 나득황 형부상서 승진
1268년 45세 원종 9년 부 형부상서 나득황 서거, 향년 64세. 배위 모 나주 정(鄭) 씨. 나유의 모친이 부 나득황의 유산으로 노비 수십여 구를 맏아들에게 상속하겠다고 하자, 나유가 자신은 괜찮으니까 노비가 필요한 여동생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양보했다고 한다.
1269년 46세 원종 10년 4월 경선점녹사 나유(羅裕)가 고려 세자 심(諶)을 따라 중국 원나라로 파견되었으며, 7월 귀국 당시 임연(林衍)이 고려 원종을 폐위하고 세자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자, 나유가 세자를 설득해서 고려 입국을 만류했다. 임연은 개인적 원한으로 나유의 장인 조문주(趙文柱, 출생 연도 미상~1269년 몰)를 살해하고 나유에게 이혼을 강요했으나 나유가 이혼을 거부했다.
1271년 48세 원종 12년 형부상서 나득황의 손자이자 대장군 나유의 아들 나익희(羅益禧, 1271년 생~1344년 몰; 향년 74세) 출생. 나유가 전남 진도에서 삼별초 토벌
1272년 49세 원종 13년 나유가 전라도 삼별초의 난 진압에 군사 1,550명 동원
1273년 50세 원종 14년 4월 안동 김 씨 원수 김방경(金方慶)이 군사 1만 명과 전함 160척으로 탐라도(현 제주도)로 진군했고, 장군 나유가 삼별초 토벌의 선봉장으로 삼별초를 공격해 격파시켰다. 이 공훈으로 나유는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탐라를 토벌할 당시에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삼별초의 난 진압과 토벌의 공로로 남녀 노비 2명과 중통보초(中統寶鈔)가 원나라에서 하사. 일본 정벌 당시에 나유는 응양군 대호군에 봉군되었다. 삼별초를 토벌하고 집에 돌아오니 나유의 부인이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관례대로, 신처를 맞아들였는데, 후에 잡혀갔던 전처가 가까스로 되돌아왔다. 당시 관례로는 포로로 잡혀갔던 전처는 내쫓아 버렸지만, 나유는 전처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부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274년 51세 고려 충렬왕(忠烈王) 원년 1월 나유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대비해 담당 부부사로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해서 전함 300척을 건조했고, 그 결과 보고를 위해 원나라 사신으로 파견됨, 10월 제1차 일본 정벌 당시 지병마사 역임. 고려 귀국 후 응양군 대호군 임명.
1280년 57세 충렬왕 6년 원나라에서 제1차 일본 정벌의 공로로 금패(金牌)를 하사하고, 무덕장군 관군천호 제수. 제2차 일본 정벌을 대비해 합포(合浦, 현 경남 마산)에 3차례 출진했고, 부지밀직부사로 개경에서 팔관회 주관. 나유는 충렬왕조 지신사, 부지밀직사사, 일등공신 명위장군을 역임했고, 합단 토벌에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로 승진했다. 지밀직사사 재임 중에 원나라 하정사로 파견되어 원나라 황제가 회원대장군에 임명했다.
1282년 59세 충렬왕 8년 5월 나유 이등공신 임명
1286년 63세 충렬왕 12년 6월 나유 부지밀직사사, 8월 나유 지신사, 12월 나유 동지밀직사사 역임.
1287년 64세 충렬왕 13년 6월 나유가 원나라 정벌을 청해 호두패(虎頭牌)를 하사받고, 중익부만호 임명, 부지밀직사사 역임, 12월 동지밀직사사. 아들 나익희가 17세에 원나라에서 상천호 관군상만호 임명
1288년 65세 충렬왕 14년 5월 나유 장군이 만호동지밀직사사로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선두에서 원나라로 원정하여 공훈으로 일등공신 명위장군 임명. 하사품으로 녹권(錄券), 전 100결, 노비 20구, 호 명위장군을 받음. 원나라에서 쌍주금패(雙珠金牌) 하사
1289년 66세 충렬왕 15년 3월 나유가 충청도도순문사로 군량 담당, 12월 나유 장군이 동계방수군 징발 및 사열
1290년 67세 충렬왕 16년 5월 나유 장군이 합단(哈丹)의 침략에 대비해 통천 진지 방어 및 평양과 연기에서 합단을 섬멸하여, 그 공로로 지밀직사사로 승진
1291년 68세 충렬왕 17년 6월 나유 장군 교주도(현 강원도) 파견으로 합단의 잔당 소탕, 11월 나유 장군이 지밀직사사 당시 원나라에 정조사로 파견되어 원나라에서 호 회원대장군 임명. 원나라에서 삼주호부(三珠虎符), 활과 화살, 검(劍), 옥대(玉帶), 은정(銀錠), 말과 안장(鞍馬) 등 하사
1292년 69세 충렬왕 18년 6월 정축일 나유 대장군이 원나라 원정을 마치고 귀국,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 서거, 향년 69세
사당 용강사(龍岡祠, 1987년 건립) 봉안
―금성(錦城) 나(羅) 씨 사당
―나국영, 나득황, 나유, 나익희, 나영걸, 나삼의 위패 봉안
―소재지. 나익희의 낙향 마을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 1리
구전 가요 「물방개노래」
―고려 대장군 나유 가문에서 고려 구전 가요 「물방개노래」 전수
1300년 고려 충렬왕 복위 2년 경자년 나득황의 2남•나유의 첫째 동생 첨의정승 나윤(羅允)이 동경유수(경주의 수장) 역임.
1454년 조선 단종(端宗) 2년 나득황의 첫째 아들 대장군 나유가 뛰어난 군사적 공훈으로 『고려사』 「열전」 「나유 전」에 기록됨.
1818년 조선 순조(純祖) 18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실학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고려 시대의 탐관오리 나득황(羅得璜), 송소(宋佋), 정기, 이저 등 4인과 조선 시대 나쁜 수령 박진한 1인 등 총 5인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서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거명
1987년 금성(錦城) 나(羅)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를 건립하고, 나국영, 나득황, 나유, 나익희, 나영걸, 나삼 위패를 모셨다. 소재지는 나익희의 낙향 마을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 1리이다.
2010년 김진수, 「고려 충렬왕대 합단군의 침공과 그 대응」, 고려대 대학원, 국내 석사 학위 논문(나유 관련 학위 논문)
2017년 이윤정, 『고려 시대 무반의 위상 연구: 가계와 통혼 관계 분석을 중심으로』, 한림대 대학원, 국내 박사 학위 논문(나유 관련 학위 논문)
*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으로서 고려 혼란기와 국난기에 용맹(勇猛)을 떨친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
* 금성 나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 1987년 금성 나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를 건립하고, 부자 상서 나효전과 나득황의 선조와 후손들(나국영, 나득황, 나유, 나익희, 나영걸, 나삼)의 위패를 모셨다. 소재지는 나익희의 낙향 마을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 1리이다. 용강사 앞에는 1934년 문평면장 학산 나종환이 말년을 보낸 정자 학산정(鶴山亭)이 1978년 중건되어 남아 있다. 위치는 나주 문평면 쌍심길 6(동원리 273-3) 쌍정마을이다.
*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나유(羅裕, 1224년 고려 고종(高宗) 11년 생~1292년 6월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 몰; 향년 69세)는 예부상서 나효전의 손자이며, 형부상서 나득황의 자녀 3형제 가운데 맏아들이다. 고려 시대 중기 무신으로서, 금성 나 씨 10세손이며, 안동(安東) 김(金) 씨 원수 김방경과 진도에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부친 나득황의 봉직을 이었고, 장군과 대장군에 올랐다. 평소 예의가 밝았으며, 옥사(獄事) 판결에 능했고, 성격이 용맹해서 변방의 전쟁에서 수많은 공훈과 공적을 쌓았다. 관직을 경선점녹사로 시작해서 견룡행수, 장군, 대장군, 전라도부부사, 지병마사, 응양군 대호군, 무덕장군관 고려군천호, 지신사, 부지밀직사사, 지밀직사사, 상장군, 명위장군, 충청도도순문사, 세자원빈, 하성절사, 정조사, 회원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자녀는 1남 5녀(족보 1남 2녀)를 두었고, 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 여식 1녀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홍융(洪戎)의 처, 여식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 씨 조위(趙瑋)의 처, 여식 3녀 함풍 이 씨 시조 이광봉(李光逢)의 처 통의군부인 등이 있었다. 또한 나유는 1454년 조선 단종(端宗) 2년 뛰어난 군사적 공훈으로 『고려사』 「열전」 104권 「나유 전」에 기록되었다.
* 나득황의 손자•나유의 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는 1288년 17세에 원나라에서 상천호로 임명되었고, 부친 나유의 관직 관군상만호를 승계했다. 여흥 민(閔) 씨 민지(閔漬)의 사위였으며, 1308년경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 호군에 임명되었다. 1275년~1325년경 충선왕의 법률 제정에 여러 차례 반대해서 파직된 후, 10년 만에 복권되어 검교상호군에 임명되었고, 상의평리를 역임하고, 금성군에 봉군되었다. 계림윤을 지냈고, 57세에 자신의 아들(나익희의 아들•나득황의 증손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생~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몰; 향년 71세)에게 관직을 승계하고, 그 후로 17년간 은거했다. 1344년 충목왕 원년 첨의참리로 복귀한 후 사직하고 며칠 후 서거했다. 향년 74세. 시호 양절(良節). 자녀 1남 1녀. 나득황의 증손•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나득황의 고손•나익희의 손자•나영걸의 아들 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羅文奎, 1312년~1379년) 등이 있다. 나득황의 증손•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은 자녀 2남 2녀를 두었다. 나득황의 고손•나익희의 손자•나영걸의 아들 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는 자녀 6남 2녀를 두었다. 금성 나 씨 송와 나문규의 둘째 아들 나위(羅緯)는 분파하여 수성(壽城) 나 씨 1세로 본관했다.
* 나득황의 둘째 아들 첨의정승 나윤(羅允): 나득황의 둘째 아들 첨의정승 나윤(羅允)은 초명이 나인(羅認)이며 나유의 동생이고, 안동 김 씨 김방경의 자녀 3남 3녀의 맏아들 전법판서•상장군 김선(金愃)의 자녀 4남 2녀의 맏사위였다. 김방경의 손녀와 혼인한 맏사위였다. 나윤은 안동 김 씨와 혼인해서 1남 상장군∙도승지 나천부(羅天富)를 두었다. 나천부는 조부 나득황의 손자이다.
* 나효전(羅孝全)의 가문: 나효전의 가문은 둘째 아들 나득황이 금성 나 씨 9세손으로 형부상서를 지냈고, 본인 나효전이 금성 나 씨 8세손으로 예부상서를 해서 고려의 부자(父子) 상서가 되었다. 나득황의 자녀 3남은 금성 나 씨 10세손이며, 1남 나유가 대장군이 되었고, 2남 나윤이 첨의정승으로 안동 김 씨 김방경의 맏아들 김선의 맏사위가 되었다. 10세손 나윤과 안동 김 씨 사이에서 1남 나천부는 밀직사 상장군∙도승지에 올랐다. 나득황의 맏아들 나유는 무관으로 대장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 나익희, 나영걸, 나문규 등이 무관을 이어 여몽 전쟁, 삼별초의 난, 탐라도 정벌, 일본 정벌, 원나라 원정 등에서 큰 공훈과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나효전과 아들 나득황의 가문은 고려의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이었다.
* 나득황(羅得璜)의 가문: 나득황의 가문은 나득황이 금성 나 씨 9세손으로 형부상서를 지냈고, 부친 금성 나 씨 8세손 나효전이 예부상서를 해서 고려의 부자(父子) 상서가 되었다. 나득황의 자녀 3남은 금성 나 씨 10세손이며, 1남 나유가 대장군이 되었고, 2남 나윤이 첨의정승으로 안동 김 씨 김방경의 맏아들 김선의 맏사위가 되었다. 10세손 나윤과 안동 김 씨 사이에서 1남 도승지 나천부를 두었다. 나득황의 맏아들 나유는 무관으로 대장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 나익희, 나영걸, 나문규 등이 무관을 이어 여몽 전쟁, 삼별초의 난, 탐라도 정벌, 일본 정벌, 원나라 원정 등에서 크나큰 공훈과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나득황의 가문은 고려의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이었다.
* 나주 방죽골 「물방개노래」: 나대용 장군의 생가 부근에 있던 방죽골에서는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시험 운행을 했다. 이 방죽골을 중심으로 구전되어 온 나주 방죽골의 「물방개노래」가 전해진다. 이 노래는 사실상 나대용 장군의 11대조 선조 고려 대장군 나유의 문중에서 고려 가요 시문으로 전해지는 구전 노래라고 한다. 금성 나 씨 13대손 나갑주가 제공한 가사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에 수록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일랑 하지 마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 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시고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끝>
* 나유(羅裕)와 나대용(羅大用): 나대용(羅大用, 1556년 생~1612년 몰) 장군의 선조들은 금성 나 씨 가운데 고려 개국 일등 공신이자 금성태수였던 나총례 금성 나 씨 시조가 있고, 제주를 평정한 형부상서 나득황의 아들로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원나라를 원정한 나유 대장군이 있다. 금성태수 나총례는 나주의 해상왕으로서 나주 호족이자 나주 해상 세력으로 세력을 떨쳤고, 고려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형부상서 나득황의 아들 나유 장군은 삼별초의 난 진압과 토벌, 일본 정벌, 합단(哈丹) 토벌, 원나라 원정으로 크게 공을 세운 고려의 일등공신 대장군이었다. 또한 나주 나 씨 5대조 선조로서, 원나라에서 군사학으로 화약 무기 전술을 습득한 고려 원수 나세(羅世) 장군은 고려말 수군 원수로 임명되어 왜군 방어에 크게 공헌했다. 재중(재원) 교포 2세라는 설도 있다. 원수 나세 장군은 공민왕조 문과 급제 후 한림상원사•판도판서•연안군에 이르렀고, 고려 수군장으로서 장군과 원수를 역임했다. 나유 장군이 우리나라 조선(造船)의 선구자요 선조라면, 군함을 자체 설계하고 건조 제작하는 능력을 갖춘 나대용 장군은 우리나라 조선(造船)의 아버지이다. <끝> <1차 2024년 1월 22일, 수정 2024년 1월 27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유」, 『민족백과』; 「나유」, 『향토문화전자대전』; 「나유」, 『두산백과』; 「나유」, 『인명사전』; 진영일, 「고려조 탐라파견 외관 고찰」, 『탐라문화』, 24호, 1~29; 정약용 지음•다산연구회 역주, 『역주 목민심서 1』, 창비신서 20, 창작과비평사; 「함풍이씨 시조의 배위는 나유(羅裕)의 여(女)이며,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이시다.」, 함풍(함평)이씨 뿌리찾는 사람들, <http://cafe.daum.net>; 나종혁, 「나득황(羅得璜) 연보」, 진정연, <http://cafe.daum.net/jinjeongyeon>; 나종혁, 「나효전(羅孝全) 연보」, 진정연, <http://cafe.daum.net/jinjeongyeon>; 나종혁, 「나대용(羅大用) 연보」, 진정연, <http://cafe.daum.net/jinjeongyeon>;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