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펭귄 이야기
남극에는 수많은 펭귄 떼들이 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많은 사람이 얼음 위에 까만 신사복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남극의 신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참 이상한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 그중에서 한 마리가 갑자기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에 뒤이어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바다로 들어간다. 아무 생각도 없이 목적도 없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니까 덩달아 들어간다. 왜 들어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대답하는 펭귄도 없다. 거기에는 경고의 음성도 없고 책망의 음성도 없다. 그 줄에서 한발만 옆으로 슬쩍 빠져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도 될 텐데 그런 펭귄들은 없다.
이러한 현상을 GROUP THINK (단체 생각)라 하는데, 한 그룹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어떤 교회나 그룹에도 다 GROUP THINK가 있는데 이것이 잘못 세워지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GROUP THINK가 잘못 결정된 예가 있는데, 얼마 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텍사스 주의 한 몰몬 분파의 경우이다. 그들은 일부다처주의를 믿는다. 아브라함이 일부다처였고, 여러 믿음의 조상들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가졌다. 그들은 성경 속에 있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 속에 일부다처를 GROUP THINK로 받아들였다. 그들 사회 속에서는 일부다처가 아닌 사람은 비정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GROUP THINK가 가진 무서운 함정이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군중심리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군중 속에 있을 때 안전감과 평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침례 요한과 헤롯의 경우를 잘 살펴보면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들소로 전락되고 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침례 요한 : 침례 요한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물론 연어이다. 어떻게 침례 요한이 연어인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연어라고 부르려면 다음과 같은 연어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어떤 희생과 고통을 치르고서라도 강의 흐름과 충돌하는 속성이 있다. 침례 요한 역시 세상과 충돌하였으며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와도 충돌하며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을 연어로 분류할 수 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연어적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누가복음 1장에는 늙은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요한을 수태한 이야기가 나오고 천사들의 말에 불신을 나타냈던 아버지 사가랴의 혀가 굳었다가 풀어지는 기적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도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눅 1:65). 왜 성 밖에 있는 유대 산중에는 두루 퍼진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에는 퍼질 수 없었는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진리처럼 여겨졌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별과 기적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만이 하늘과 유대교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온 유대교회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결과 이 통로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모든 기별과 기적들은 철저하게 배척되고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대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루 널리 퍼진 침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침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성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성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빛이 유대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던 것과 같이 그 후의 각 세대에 있어서도 그 역사는 반복됐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유대교회에서 핍박받고 물러나신 것과 같은 역사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중세기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기성 교회(천주교회)에서 분리될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가혹한 핍박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떠나 빛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을 선포하려면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를 불가불 떠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들이 생긴다. 성령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진리가 어떤 모양으로, 누구에 의해서 제시되든지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매우 적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예리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도 헤롯에 의해서 허무하게 목이 잘려 죽었다. 헤롯은 개인적으로 침례 요한을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헤롯 왕이 왜 침례 요한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 헤롯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교회 안에서 들소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헤롯 역시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들소가 되고 말았다. 마가복음 6:17-26을 읽어 가면서 들소가 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7절부터 나오는 상황을 살펴보면 헤롯이 요한의 부활에 대한 허망한 소원을 갖게 된 이유가 나온다. 17절부터는 장면이 과거로 돌아가 헤롯이 요한을 죽였던 과정이 나온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막 6:17-19). 침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명백한 죄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것 때문에 헤롯의 정부인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막 6:20). 헤롯은 요한을 깊이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라는 표현을 보아서 요한과 헤롯의 관계는 이 사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임이 틀림없다. 오래전부터 요한은 헤롯에게 조언을 해왔고 그때마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조언을 달게 받아들였다. 이런 헤롯이 왜 침례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1-24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요한을 죽이기 위한 기회를 노리던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의 궁전에서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고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는데, 이때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많은 군중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헤롯 앞에서 살로메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춤을 잘 추었음이 틀림없다.
헤롯은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호기를 부렸다. 헤로디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로메는 엄마인 헤로디아에게 가서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지 물어보았을 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관계를 지적한 침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고 딸에게 말했다.
사람들 관계에서 곧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원수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게 되는 것이다. 침례 요한도 자신이 했던 곧바른 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에게 나아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 헤롯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나이 어린 여자 아이가 기껏해야 새로 나온 마차 정도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존경하는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이다. 헤롯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막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왜 침례 요한을 죽였는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 의 기대를 맞추고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요한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요한의 목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헤롯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21절에 나온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즉, 유대교회의 상류 지도층이었다.
바로 이것이 군중심리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세속적인 교회와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선지자를 죽이고, 그의 기별을 땅에 묻게 된다. 군중심리, 이것이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외면하게 되는 이유이다. 교회 안에 배도가 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가 입을 다물면 선지자가 죽고 그 기별이 땅에 묻히게 된다.
헤롯은 요한의 삶이 의롭고 그가 했던 설교가 진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고 그 결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였던 선지자의 목이 떨어졌다. 왜 요한을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침례 요한의 편을 드는 말을 할 경우 평생을 침례 요한의 파로 낙인 찍혀서 자신의 생애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정확하게 반복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기별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군중의 눈치와 비위를 살피는 자는 결코 연어처럼 살 수 없다. 아프리카 들소나 펭귄 같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주변 군중이 뛰면 같이 뛰고 주변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같이 빠질 뿐이다. 교인들이 싫어할까 봐, 교회 장로님이 싫어할까 봐, 교회 목사님이 싫어할까 봐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기별과 음성에 귀를 막는 것, 바로 그것이 라오디게아 군중의 특징이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군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교회이다(요한계시록 3장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상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