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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주관의 변화
우주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다양하게 변화하여 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천체 구조론, 계층적 우주 구조 모형, 케플러의 '올버스의
역설', 허셀과 섀플리의 은하 중심설, 칸트와 커티스의 다은하설, 아인슈타인의 거시적
우주 구조 모형, 빅뱅 우주론, 정상 우주론, 우주의 균일성과 등방성 등이 현재까지
알려진 우주관 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고대인의 우주관에서 현대의 우주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짧게 훑어 봄으로써 인류의
우주관의 변천을 알아보고 다면적인 시각에서 우주를 고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 고대의 우주관
우주론이 인류사에서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인간의 우주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에 기인하는 탐구욕 때문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고대인들 역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많은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늘의 저 천체들의 본질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 별들이 떠 있는 것일까?
지구는 정말 움직일까? 이러한 원초적인 호기심은 고대인의 우주관에 그대로 반영
되었으며,
그 해답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첫째, 신화나 전설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바빌로니아, 이집트, 희랍, 인도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나 독단적이며 융통성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둘째는 과학적인 우주론이 그 것이다.
관측과 측정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진 현상을 기초로 하여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 희랍 철학자들이 놀랍게도 신화적 태도에서 과학적
탐구로 생각을 전환한, 관측 현상의 자연적 원인을 규명하려 했던 최초의 학자들이였다.
고대인들 중에는 놀랄만한 통찰력을 발휘한 위대한 사색가들이 많았다.
이러한 위대한 생각들은 그 후에 많은 오류 속에 파묻혀버리곤 하였고, 수 천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고대 자연 철학자들이 남겨 놓은 이러한 기록의 파편에,
그리고 이 위대한 사색가들이 지녔던 탐구 정신의 진수에, 바로 우주론의 기원이 있다.
고대 우주론은 당시의 원시적인 천문학에 바탕을 둘 수 밖에 없었으며,
우주론의 대상도 별, 태양, 지구, 달 그리고 다섯 개의 행성에 주로 국한되어 있었다.
독창적인 우주관을 피력한 유명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다.
피다고라스(Pythagoras), 플라토(Plato), 에우독수스(Eudoxus), 아리스토틀(Aristotle),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 프톨레미(Ptolemy).
2 중세 암흑 시기의 우주관
기원 후 6세기경에 야만 유목 민족들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희랍인들이 이룩한
천문학적 보배를 밀어 제쳐 놓았다.
성서에서 우주관과 관련있는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던 이들은 지구는 평탄하다고
다시 믿게끔 만들었다. 이로써 과학은 1000년 이상 퇴보하는 암울한 시대를 맞게끔
되었다.
3 근대의 우주관 (우주론의 르네상스)
서양인들은 13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아랍인들이 번역해 놓은 아리스토틀의 저서
들을 읽게 된다.
프톨레미의 체계는 그후 200여 년에 걸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체계적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희랍 우주론자의 글이 읽혀지게 되자, 보다 만족스러운 새 이론들이
자연히 개발되었다.
식자들은 지구가 움직일 것이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프톨레미의 이론을 얼마나 단순화 시킬 수 있을
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행성들처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달도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행성의 시운동을 프톨레미 체계보다 훨씬 단순하고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가 그 당시에 풍미하던 모든 편견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고,
원 운동의 개념 만은 고수하였다.
궤도가 원인 한 행성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에는 어려웠으므로 그는 프톨레미의
주전원 일부를 사용하여, 태양 중심 체계에 입각하여 행성의 운동을 깨끗이 설명할 수
있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출판되자 그의 생각은 곧 널리 받아들여졌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타이코 브라헤(Tycho Brahe)는 행성 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여 우주론 발전에 공헌하였다.
타이코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약에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한다면 계절에 따라 가까운 항성의 위치가
시차의 효과로 주기적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시차를 측정하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밀한 관측으로도 항성의 시차를 측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한다는 것을 타이코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현대 천문학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구 공전의 결과로 생겨나는 항성의
시차는 불과 각으로 1초도 되지않는 미세한 변화이므로 타이코의 관측의 정밀성 -
그는 약 각도로 12초 정도의 정밀성으로 천체를 관측하였다 - 으로는 당연히 검출되지
않았었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의 실증을 거친 결과였
다는 것은 특이할 만하다.
그러나 타이코 자신은 방대한 양의 관측 자료를 제자인 케플러(Johannes Kepler)에게
물려줌으로써 후에 우주관 변천에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타이코의 우주론에 대한 업적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혜성이 지구 대기층에서의
현상이 아니고 달보다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매우 찌그러진 궤도를 그리며 도는
천체라는 것을 밝힌데 있다.
이 발견으로 인하여 아리스토틀이 주장하던 고정 불변의 천구의 개념은 타당성을 상실
하게 된다. 타이코의 관측이 당시로는 다른 관측에 비하여 월등히 정밀하였기 때문에,
케플러가 그의 자료를 바탕으로 유명한 행성 운동에 관한 세가지 경험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되었다.
즉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며 그 촛점에 태양이 있다고 하는 타원
궤도 법칙을 얻어냈다.
이와 더불어 행성의 공전 속도를 조사해본 결과 태양에 가까운 곳에서는 빨리 움직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며,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이 동일한 시간에
휩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는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이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을
얻어 내었다. 이것은 케플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캐플러도 고대인들의 신비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기하학적 입체 구조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기본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6면체, 정4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정8면체의 다섯 가지의 기하학적 입체로부터 여섯 개의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케플러의 이러한 생각은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생각
집착한 덕분에 행성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태양계를 프톨레미의주전원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던 사람이 케플러였다.
이 시대까지도 태양 중심 이론은 우주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상태였다.
따라서 아직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쉽게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태양 중심 이론이 전폭적으로 받아 들여진다.
갈릴레오(Galileo Galilei)는 체계적인 관측과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과학을 발전시킨
위대한 개척자이다.
그는 그가 손수 제작한 망원경을 통하여 목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4개의 큰 위성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지구와 달의 관계와 다른 행성계의 유사성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또 금성의 위상이 변한다는 것도 관측하여 금성이 실제로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음을
실증하기도 하였다.
태양 표면을 관찰하여 흑점의 존재를 밝힘으로써 천체의 불변성을 주장하였던 아리스토틀의
교의를 마침내 무너뜨리고 만다.
망원경을 통하여 관찰하여도 별은 한 개의 점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는 항성은
매우 멀리 있는 천체라는 심증을 굳힌다.
갈릴레오는 우주론의 발전에 직접적인 기여는 하지 않았으나, 그의 여러 가지 관측적
발견과 시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으로 우주론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갈릴레오가 죽은 1642년에 영국에서는 천재 뉴우튼(Isaac Newton)이 태어난다.
그는 갈릴레오의 행성 운동 법칙을 예리하게 분석한 결과 우주론을 현대 과학의 영역
으로 옮겨놓은 주인공이 된다. 뉴우튼 덕분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신비의
절대적 존재를 더 이상 가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뉴우튼은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며 운동하는데 관여하는 힘의 정체를 규명하여, 두 천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적분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의 한 분야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뉴우튼은 중력이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을 설명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우주의
어느 물체 사이에도 중력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일반화시켰다.
비로서 뉴우튼에 의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의 우주관이 완벽한 이론으로서
정립되었으며, 무려 150년의 장고한 세월이 요구되었다.
뉴우튼의 역학 체계를 정리한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간된 1687년을 기점으로 천문학은 명실상부한 과학으로서 확고 부동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우주에 관한 논의도 더 이상 신비주의적이거나, 절대자를 요구하지 않고
뉴우튼의 기계적 원리에 입각하여 그 방향을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천체역학의 발전과 더불어 우주에 관한 논의도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뉴우튼의 역학과 중력 이론을 이용하여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뉴우튼과 그의 후계자들은 우주는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특정지었다.
이들의 예언은 우주는 무한히 크고 정적이며 불변해야 한다는 가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우튼의 중력 이론은 우주가 팽창 또는 수축을 해야만함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뉴우튼의 중력 이론을 배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뒤에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에 관한 많은
관측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만약, 역설적으로, 뉴우튼의 후계자들이 그의 이론을 강력하게 신봉했다면, 이미 300년
전에 우주의 팽창에 대한 그럴듯한 이론을 발표하게 되는 영광을 누렸을지도 몰랐다.
뉴우튼의 중력의 법칙이 범우주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이 18세기 천문학자 허어셀(William Herschel)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태양계에서처럼 두 별이 서로 궤도 운동을 하고 있는
쌍성계에서도 중력의 법칙이 적용됨은 허어셀은 알 수 있었다.
허어셀은 천왕성을 발견하였다. 이로서 오직 5개 뿐인 것으로 믿었던 행성이 더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를 하게 되었다.
한편 허어셀은 자신의 망원경을 통하여 성운이라고 불리우는 뿌연 빛의 무리를 발견함
으로써 우주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기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는 성운이 하나의 [섬 우주]라고 생각하였다. 라이트(Thomas Wright)와 칸트(Immanuel
Kant) 같은 사람들도 섬 우주로서의 성운을 상상했던 적이 있었으나, 허어셀이 성운을
구체적으로 관측함으로써 외부 은하에 관한 천문 관측이 독립된 천문학 분야로서 성장
하게 되었다.
허어셀은 은하수가 원반 모양을 한 하나의 섬 우주로서 태양이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태양이 우리은하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은 마치 고대의 지구 중심
사상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1917년에 샤플리(Harlow Shapley)는 우리 은하 내의 구상성단(球狀星團)의
분포를 조사한 결과, 우리 은하의 크기가 허어셀의 섬 우주 모형에서 제시했던 크기
보다 3배나 큰 원반 모양이며,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은하의 중심 역할을 하다가, 또 다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보잘것 없는 신세가 된다.
허어셀은 고성능의 망원경으로 관측을 한다면 뿌옇게 보이는 성운이 모두 우리의
은하수처럼 별의 집단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성운 하나하나는 하나의 섬 우주들이라고 믿었다. 허어셀은 우리 은하수도
성운과 비슷한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우주에서의 지구의 위치를 바로잡아 우리로
하여금 우주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해주었다.
허어셀은 성운이 별의 집단이라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그 당시의 망원경의
성능으로는 불가능했.
그가 죽은 후 1850년에 72인치 망원경을 통하여 성운에서 나선형 구조의 모습을 발견
하게 되었다. 이 나선상 성운의 정체에 관하여 많은 의견이 오고 갔으나,
1924년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처음으로 별들을 분해해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성운 역시
우리 은하와 마찬가지로 별의 집단임이 판명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은하가 망원경을 통하여 관측되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태양 역시 우리 은하 내의 수천억
개의 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결국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던 인간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외곽
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4 현대의 우주관
4-1 우주론 원리
거대한 망원경 - 가장 큰 광학 망원경은 소련 코카사스산에 있는 직경 6 m 반사
망원경임 - 이 건설되고 관측 기술이 진보됨에 따라 우리의 우주적 위치가별로 신통치
못하고 우주의 한 모퉁이를 겨우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우주에서 우리가 있는 위치가 그야말로 다른 곳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곳이다.
이같은 사실은 우주론자들을 억메고 있는 위치상의 거북스러운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우주적으로 적용 가능한 원리를 제안하여, 우리 주변 우주의 모습이
여타의 지역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가정 덕분에 우주론자
들은 관측으로 가능한 부분이 비록 우주 전체에 비해 볼 때 극히 제한된 변두리 영역에
불과 할지라도 그 결과를 그대로 우주 전 영역에 대하여 확장시킬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이 원리의 기저에는 그럴만한 철학적 이유가 있다. 우선 물리 법칙이 우주 어디든지
동일해야만 되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실험의 재현은 불가능하며, 물리 법칙이란 하등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누구든 이러한 비극을 즐기려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다음 보다 그럴듯한 이유는 우주가 전반적으로 단순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단순화 작업은 물리학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원리이다. 어떤 현상이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모형을 선택하려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우주 내에서의 위치가 특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 은하가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특수성을 결코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우주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론 원리
(Copernican cosmological principle) 이다.
즉 지구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더라도 우주의 모습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우주는 공간적으로 균질한 등방성을 지녔다는 가정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원리이다.
시간에 따른 불변성을 우주론의 원리에 포함시켜서 우주론적 원리를 일반화하려는
시도가 몇몇 우주론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즉, 우주가 거시적 규모에서는 영원 불변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완전 우주론 원리
(Perfect cosmological principle) 라고 하는데, 우주는 공간적으로 어느 지점이든
비슷하듯이, 시간적으로도 어느 순간에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완전 우주론 원리의 산물이 정상 상태 우주론 (steady state theory) 이다.
그러나 이 우주론은 관측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아, 현대에서는 별로 믿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현대 우주론에서는 완전 우주론 원리 보다 덜 구속적인 보통의 우주론
원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본적 우주론 원리 (Anthropic cosmological principle)가 있는데,
이는 완전 우주론 원리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현재 우주가 공간적으로는 등방성을 유지
하고 있을지 몰라도 시간적으로는 아주 특별한 시기에 놓여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 매우 특별한 우주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 때문이다.
즉, 우주가 지금보다도 더 뜨겁거나 밀도가 더 높았다면 은하의 형성이 힘들었고,
행성계의 생성은 불가능 했으며 따라서 생명체의 탄생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견해
이다.
우주에 있는 많은 천체의 나이를 조사해 보면 놀랍게도 대체로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인본적 우주론 원리에 따른다면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우주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 우주가 등방, 균일한 모습
으로 나타났다고 인본적 우주론 원리는 생각한다.
이 우주론 원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저변에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론 원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으며, 바로 이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론 원리는
거의 모든 우주론의 중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4-2 현대 우주론의 발달
뉴우튼의 중력 이론에 수정을 가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1916년에 상대성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이론적 우주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발표 이후 약 20년 간에 매우 다양한 종류의 우주에
대한 이론적 모형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많은 이론들 중에서 천문학적 관측 사실이 요구하는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이론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 현대적 우주론의 시초는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정지 우주 모형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수명은 매우 짧았다.
일반적으로 뉴우튼의 중력 이론에는 물체들 간의 인력만 작용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뉴우튼의 중력 체계를 따른다면 자연스럽게 우주는 팽창 또는 수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중력장 방정식에 새롭게 우주론 상수를 도입하여 정지 우주론
을 발표하였다.
우주론 상수는 극히 먼 거리에서만 중요하게 작용되는 척력(斥力)을 기술하는 상수다.
뉴우튼의 중력 이론에는 이와 같은 척력의 존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정지 우주 모형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중력에 대항하여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척력의 도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1917년에 발표된 데시터의 우주 모형에 의하면, 멀리 있는 은하에서 오는 빛일
수록 점점 더 붉은 색을 띠게 되는 이상한 성질을 갖게 된다. 그 후 10여년 동안,
이 모형의 존재가 천문학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팽창 우주론과 아인슈타인의 정지
우주론의 열띤 논쟁이 계속된다.
결국 허블(Edwin Hubble)이 성운의 후퇴 운동을 서술하는 간단한 관계식을 발표하여,
은하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관측적으로 보임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정지
우주론은 막을 내린다.
그 후 다른 천문학자들이 우주론 상수 없이 팽창 우주 모형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게
되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론 상수를 도입한 것을 공개적으로 무척 후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항을 포함시킨 가장 일반적인 중력장 방정식은 여러 형태의 우주 모형을
가능하게 했고, 대폭발 이론의 골치거리인 특이점의 문제도 피할 수 있다는 잇점을
제공하기도 했다.
현대 우주론의 가장 큰 업적은 대폭발 이론의 정립이라고 하겠다. 우주가 정지, 불변의
상태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대폭발 이론은 우주론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이 관측적으로 밝혀지기 이전에, 상대론과 현대 물리학의 성공
적인 결합으로, 우주의 팽창을 예견하는 이론적 연구가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천문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니고, 소련의 기상학자이며 동시에 수학자
였던 후리드만(Alexander Friedmann)과 벨기에의 수도원장 르메이뜨르(George Lemaitre)
였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가장 간단한 해를 후리드만은 1922년에,
그리고 르메이뜨르는 1927년에 각각 독자적으로 얻었다.
이들이 찾은 해는 팽창하는 우주를 서술하는 것들이었다. 이들의 팽창 우주 모형이
발표되자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한동안 제창되었던 정지 우주론은 잠들게 되었다.
이들도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우주론 원리에 따랐으나, 아인슈타인보다 과감하게 우주의
팽창 가능성을 도입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이 훨씬 간단하게 되었고,
이론적으로도 모순이 없는 우주 모형을 유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팽창 우주론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 후에 아인슈타인은 화란의 천문학자 데 시터(Willem de Sitter)와 같이 1932년에
팽창 우주론을 발표하였는데 이 우주론에서는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이 보통의 유끄리뜨
공간에서의 성질과 닮은 모형이다. 즉, 앞에서 설명한 후리드만과 르메이뜨르의 우주
모형은 열린 공간 혹은 닫힌 공간의 모형이라고 한다면, 아인슈타인과 데 시터의
모형은 평탄한 공간의 우주 모형이라고 하겠다.
대폭발 이론을 따르면 초기의 우주는 매우 뜨거웠을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냉각되어 오늘날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냉각 과정에서 물질의 기본 입자
들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이 생겼으며 한참 후에는 은하들과 항성 그리고 행성의
형성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우주 초기의 고온의 상태에서 방출된 복사의 찌꺼기가 우주 어느 곳에서나
관측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1965년에 벨 전화 연구소에 근무하던
펜지아스(Arno Penzias)와 윌슨(Robert Wilson)은 거대한 나팔 모양으로 생긴 안테나로
대폭발의 흔적인 잔류복사파를 검출하게 되었다.
이 잔류 복사파를3K 우주 배경 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 업적으로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로써 대폭발 이론이 예언한
것이 관측적으로 밝혀지게 되자, 대폭발 이론은 확고 부동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편 본디(Herman Bond), 고울드(Thomas Gold), 호일(Fred Hoyle) 등은 1948년에 완전
우주론 원리에 입각하여 정상 상태 우주론을 발표하였다.
이 우주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없이 늘 같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우주가 시간적으로도 항상 균일한 밀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질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정을 함으로써 늘 일정한 모습을 지닐 수 있는 우주 모형을 얻을 수 있었다.
정상 상태 우주론은 매우 대담한 시도로서, 초기에는 관심을 끌었으나, 1950년대에 들어
오면서 점점 정밀한 관측이 가능해지자 관측에 부합되지 않는 사실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계속 그들의 모형에 수정을 가하여 설명을 시도했으나 점점 보편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고집스러운 몇몇 신봉자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정상 상태 우주론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만다.
우주 배경 복사가 발견 됨으로써 이 우주론은 수명을 마치게 되었다.
후리드만과 르메아뜨르가 제시한 열린 굽은 우주와 닫힌 굽은 우주,
그리고 아인슈타인과 데 시터의 평탄한 우주가 대폭발 이론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우주론적 척력이 필요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위의 세가지 모형은 무한히 작은
부피에서 시작되어 현재의 크기로 팽창한 것이 된다.
닫혀진 모형에서는 언젠가 다시 수축을 하겠지만 다른 모형은 영원히 팽창할 것이다.
이들 중에서 어느 것이 과연 실제의 우주를 잘 설명하느냐가 현대 우주론의 중심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 외에도 대폭발 이론에서의 가장 큰 맹점인 특이점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 하느냐라는
것과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의 우주론 상수의 필요성 여부에 관한 것이 역시 중심
과제에 속한다.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