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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아름다운 항구도시 보드룸을 떠나 약2시간30분을 걸려 에페소스 입구에 도착하였다. 에페소 입구에 있는 한국식 비빔밥 집을 찾았다. 집을 떠나 온 이후 터어키 음식에 조금씩 염증이 날 무렵이었을 때 만난 비빔밥, 고추장 맛에 기대며 젓가락으로 전주비빔밥 비비듯 살살 섞어 한수저 듬뿍 담아 한 입 넣고 하~ 기가막힌다. 본바탕을 숨기려해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식습관이다. 밥과 장만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란으로 참혹했던 시절도 그래겠지만 동란을 겪은 후 70년대초반 까지는 전부 어렵던 시기였다. 동란 때 참전국으로 우리나라를 도와 준 나라가 바로 터어키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이 우리들을 형제국이라 말하는 것은 동란 참전이 원인이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몽고의 피도 섞이게 된 역사적 배경도 배경이지만 대상들이 동서교역의 역사를 만들었을 때 신라와 교역이 있었던 사실이 경주에서 유리로 만든 유물이 발견되므로서 추측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유리는 중동에서 흘러 들어 온 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동양의 실크로드 출발점은 우리나라 경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이유다.
에게해 연안의 고대로마 최대 유적인 에페소는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되었고 약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과 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세루시우스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은 시리아풍으로 조각되었으며 하두리아누스 신전 아치에는 여신 니케와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으며 당시 공동화장실 터가 발견된 곳도 아페소다.
식당을 나서려고 할 때부터 시작된 폭우는 끊임없이 내렸다. 여행중에 항상 갖고 다니는 오버트러스를 꺼내 입어 폭우에도 견딜 수 있었지만 촬영이 문제였다. 빗물이 카메라에 떨어지는 것을 비닐주머니로 최대한 막아가면서 찍는 방법도 있지만 문제는 후드에 떨어지는 빗물때문에 화면이 지장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없어 사진자체가 입체감을 상실하는 것도 문제다. 일행들도 윈드쟈겟을 꺼내 입고 우산을 들고 투어중이라 사진감도 많이 상실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부근을 지날 무렵부터 하늘은 개이기 시작하였다. 다행이었다.
에페소 부근에는 항구가 있던 관계로 선원들에 출입이 많았던 에페소에는 그들을 위한 유흥가도 성행했지만 각종 공연을 위한 거대한 원형극장과 도서관도 멋지게 건설되어 있었다. 2층으로 건축된 건물이 바로 세루시우스 도서관이다. 1만8천권의 장서가 있었단다.
도서관 내부벽면마다 새겨진 조각들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도서관도 화재와 지진으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0년 복원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에페소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 건립된 식민도시었다. 에페소스는 주변국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된 식민 도시지만 무역과 상업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척했던 도시다. 아페소는 기원저 6세기 건축된 아르데미스 신전과 로마제국 때 건축된 도미티아스 신전이 유명하며 특히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는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까에 따르면은 사도바울이 선교할 당시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에페소스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 곳이다. 사도바울이 선교하면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자고 설교하고 다녔기 때문에 신전모형이 팔리지 않아 상인들과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7개 교회중 하나가 바로 에페소스 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사도 성바울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서 사목한 교회가 바로 에페소스 교회다. 이런 생각을하며 깊은 사려심으로 에페소를 거닐다 돌아 왔다. 비행기 시간이 허락한다며 성모교회까지 보고 싶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다음 여정을 만들어 성찰의 시간과 함께 아주 느리게 천천히 성지 순례만 할 계획을 세워 보려 한다.
에페소을 끝으로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 가는 날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즈미르공항으로 가 국내선을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서둘렀다. 서쪽하늘에는 벌써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 같다. 비는 잠시 멈춘 상태다. 이스탄불공항에서 내려 대기중인 버스를 타고 베이티 만찬으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하여 레스트랑으로 갔다. 터키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는 고급레스트랑이다. 빵과 야채셀러드와 페타치즈와 콩셀러드, 모듬케밥과 디저트로 커피와 차가 제공되는 멋진 레스트랑이다. 실내 모든 환경도 터어키 식으로 꾸며 졌다. 아주 천천히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는 음식들 만족스러웠다.
각국 정상들도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과 관련된 자료를 진열해 놓은 쇼케이스도 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에 터어키 유명인사를 배웅하던 사장님과 조우가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시며 촬영에 흥쾌히 응해 주신다.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이스탄불로 비가 내리기시작하였다. 국내 모잡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식당업으로 입지적인 인물이다. 인자하신 용모가 드러나듯이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겸손과 배려와 손님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사장님 직원도 달려와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Hilton hotel, 검색이 삼엄했다. 공항 수준 이상이다. 보안요원들이 철통같이 현관과 로비를 지키며 보안검색을 하였다. 심심지 않게 보도되던 중동지방의 폭탄 테러 사건이 연상되어 충실하게 응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오랜만에 특급호텔에서의 잠, 포근했다. 커텐을 열어 도시의 야경을 잠시구경하다 시트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온몸이 잠 속으로 유영하며 짐잠되어 가는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창밖, 아직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이스탄블 투어는 빗속에 진행되어야 할 것 같았다. 제노베파와 식당으로 내려갔다. 일행들도 많이 내려와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창부근으로 가 보스턴에서 온 김형식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마친 우린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로비로 가 도착한 차에 짐을 실고 돌마바체 궁전을 향해 떠났다. 이스탄블의 러시아워 장난이 아니었다. 1970년대 논현동에서 종로2가로 출근하기 위하여 겪었던 서울의 러시아워가 생각났다. 지독한 정체를 경험한 끝에 도착한 돌마바체 궁전!
돌마란 터어키어로 꽉찼다는 의미다. 해변가였던 이곳을 매립한 후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여 궁전을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 바로 돌마바체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을 본떠 만든 유럽풍 궁전이다. 슐탄1세인 마흐메드 1세의 휴양지였으나 오스만트르크제국 31대 슐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 대리석으로 새로 지은 궁전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750개의 전구가 달린 샹들리에가 황제의 방에 달려 있으며 터어키 어디를 가나 동상과 사진이 걸려 있는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8년 서거할 때 까지 사용했던 방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방에 걸린 시계는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기리기 위하여 사망시간인 오전9시5분에 멈춰져 있다. 현재에도 이곳은 국빈 영빈관으로 사용중이다. 이 궁전 건립에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고, 내부는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궁전의 방은 총 285개이며 홀은 총 43개이다. 궁전 내부를 둘러보려면 약 2시간이 소요된다.가끔 역사란? 아일러니한 일을 전하기도 하는 것이 있다.막대한 궁전 건설비
용을 지불한 제국은 경제적 파탄에 시달려야 했다. 상징적으로 제국의 번영과 영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건축한 궁전 때문에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오스만트르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궁전을 오랜 시간 살펴 보면서 새삼 진리를 깨닫게 된다. 겸손과 정직한 가난은 오래 지속이 가능하지만 화려함의 끝은 항상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나 개인들도 다 만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제노베파 친구들을 불러 세웠다. 아름다움이 넘치는 정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비는 이슬비로 바뀌었다.
빗물이 자꾸 후두에 떨어지고 흘러 사진이 선명하지 않다. 손수건을 꺼내 자꾸 딱아내지만 소용이 없다.
궁전 내부를 보면서 벼란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의 삶은 치열했었다. 종교에 따른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에 결과였을까? 아무튼 그런 내용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내 역사중에서도 무조건 북쪽에는 문을 내지 안고 살았던, 아니 문이 있지만 열지 안고 살았던 역사가 존재 한다. 그것은 바로 오랑케들에 침략이 있을 적 마다 당했던 부녀자들에 약탈로 인한 생긴 습성이었다.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으로 고통을 당했던 중동지방 이슬람교도들도 유럽남부와 이베리아반도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중부지방까지 무력으로 휩쓸어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며 유럽남부 지방에서는 크라썅이란 빵과 커피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빵의 모양이 중동지방 국가들 대부분이 신성 시 하는 달모양처럼 생겼다. 죽어도 죽어도 그 당시의 침략행위를 잊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인 동시에 그 복수를 재현한 깊은 뜻이 식생활로 재현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고통에 대한 인식에 반작용으로 이러한 궁전을 기획하고 무리하여 건축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화려함과 육즁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궁전 투어를 끝낸 후 걸어서 선착장으로 나갔다. 이스탄블 전역이 보이는 피에르 로띠 언덕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탔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보스포러스해엽을 이용하여 피에로 로띠 언덕으로 향했다. 해엽에는 거대한 크로즈선박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아침 러시아워에 상당한 시간을 빼앗긴 관계로 일정이 촉박해 졌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식당을 찾을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도시락을 만들어 해엽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박 안에서 먹기로 하였다. 케밥 도시락 그리고 후식으로 들어 있는 귤 하나 그리고 생수 한 통. 조합을 이루며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다. 식사를 한 후 선박 2층으로 올라 갔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래도 아름다운 풍광을 놓칠 수가 없어 난간에 기대어 서서 샷다를 눌렀다. 역시 사진의 삼대 요소는 빛과 구도와 찍는 사람의 감성인데.... 빛이 없는 곳에서 촬영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준다.
우측으로 불루모스크가 보인다. 해엽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면서 도시의 구조가 동양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동양에서도 강 주변에서부터 문명을 키워 나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서양 구분없이 같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 강과 밀착하여 도시를 세우고 번영했지만 동양에서는 강과 일정 거리를 두고 도시를 만들었다. 한 국가가 번영의 수순을 밟으려면 첫째 경영자의 덕목은 치수(治水)와 치산(治山) 에 있었다. 물과 산을 다스리지 못하는 왕권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용적으로 생각했던 서양과 받들고 아꼈던 산과 강에 대한 동양사상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 동서양의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도착한 피에르 로띠 언덕, 우리를 기다리는 붉은빛이 감도는 사과로 만든 따끈한 차, 한모금 들이키자 전신으로 온기가 퍼져 나간다. 느낌이 꼭 어렸을 때 비가 내려 쌀쌀한 여름 저녁날, 반팔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있어 추웠을 때 어머니께서 장롱에서 꺼내 주신 긴팔샤스를 입었을 때의 따스함이 몰려 왔다. 아늑한 안도가 묻어나는 온기가 당시 느낌과 같았다.
피에르 로티 (Pierre Loti, 1850년 1월 14일 ~ 1923년6 월 10일)
본명은 줄리앙 비오(Julien Viaud)프랑스 해군 장교로서 소설가이다. 비스케 만을 바라보는 항구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대대로 선원 환경에 자란 덕분에 해사를 졸업후 해군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해군시절 세계 곳곳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피에르로띠는 섬세함과 다정함이 깃든 필치로 여러 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스탄불에서의 비련을 다룬 아지야테를 1879년 출판을 시작으로 1980년 타이티의 관능적 여인을 묘사한 로티의 결혼을 발표하고 이어서 세네칼의 사막에서의 애욕을 그린 아프리카기병을 1981년 발표하게 된다. 일본 나가사키 아가씨와 얽힌 국화부인은 1887년 발표하였고 바스크 청녀의 비운의 사랑을 그린 1897년 라문초를 발표하여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그에게도 뼈아픈 사랑이 있었다. 이스탄블에 파병되어 근무할 무렵 터어키여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상대는 유부녀라는 설이 있다. 그는 복무기간을 끝낸 후 고국으로 돌아 갔다가 다시 와 보니 그녀는 죽고 없었다. 불륜을 안 여자의 가족들은 그녀를 명예살인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안 피에르 로띠는 이 언덕에 머물며 글을 쓰며 살아 가면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단다. 그 사실을 안 터어키인들은 그 때부터 공동묘지 맨 상단에 있는 이곳을 그에 필명을 따 피에르로띠 언덕(pier loti hill)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아래에 보이는 강 같이 보이는 바다가 골든 혼(Gólden Hórn) 이라 불려지는 이스탄블 내항의 기능을 갖고 있는 바다다. 골든 혼을 끼고 있던 동로마제국이 옛날 슐탄에 의해 멸망할 때 보물들을 정복자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수장(水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석양(夕陽) 무렵이되면 바닷물이 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낭만적이며 섬세한 감정을 지녔던 프랑스 군인 소설가가 먼저 죽은 여인을 못내 잊지 못하고 이 언덕에 기거하며 평생을 살다 죽었다는 사실이 자신이 쓴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잠을 잤던 호델 이름이 연상되었다
우중 날씨의 이스탄블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이스탄블을 천천히 조망한 후 동서양의 문화가 농축된 지붕없는 동서양 고대 박물관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다음은 블루모스크로 가기위하여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케이블카는 순시간에 아래에 도착하였다.
케이블 타고 내려 버스에 다시 오른 후 블루모스크로 갔다. 길게 서 있는 줄 끝에서 순서를 기다려 현관문까지 도착하였는데 안내인이 나와 입장을 중지시켰다. 다음 입장시간은 두시간 후란다.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먼저 먹기로 하였다. 점심은 배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한 후라 배도 고팠다. 다시 불루모스크를 나와 바자르 골목을 내려간 후 한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한국식당을 찾았다. 붓글씨로 적어 벽에 걸어 놓은 파전, 된장찌게, 막걸리 등등 문구가 다정하게 다가 왔다.
식당으로 가는 골목 길에서 만난 나무로 지은 터어키건물들 노후된 건물인데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목조건물이 골목안에 가득했다. 식사를 마친 후 블루모스크를 다시 찾았다. 그 규모가 실로 엄처났다. 그리고 천정 모습의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말았다. 꼭 보아야 한다는 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카펫에 누워 천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일행들에게 찍어 주었다. 결과는 아름다웠다.
사원밖으로 나오자 밖은 어렴풋이 저녁이 다가 오고 있었다.
사원광장에서 터어키 여행 마지막 샷타를 눌렀다. 터어키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은 대략 2000여장이다. 그 내용중에 소중한 여행을 기록한 사진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여행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사진을 다시 보면 다시 그 일정속으로 들어가 즐거워 하는 것이 바로 여행후 즐거움이다. 천천히 불루모스크를 다시 보면서 기다리는 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스탄블 공항으로 곧장 달렸다. 입국수속을 모두 마친 일행은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LA에서 온 친구들은 바로 미국으로 갈 것이고 보스턴과 펜실버니아에서 온 친구들은 그리스로 투어를 하러 다시그리스로 떠날 것이며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2 년 후 다시 하와이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 서로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헤어져 각자 공항내 코너로 향했다. 꿈결처럼 왔다가 물러가는 것처럼 터어키 여행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활주로 서있는 대한항공기 표면에 붙어 있는 국기가 너무다정하게 다가 온다. 터어키를 투어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소박하며 친절하며 그리고 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건국 대통령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사진과 동상이 어디에 가나 서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자존심이 극성스러울 만큼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들은 붉은빛 바탕에 흰 달과 별이 그려진 국기가 도처에 걸려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서양의 교착점의 역사를 갖고 있는 터어키는 분명 동서양 문명의 교두보였으며 현재는 박물관 역활을 하고 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 바로 터어키 전역이다. 깊이가 있는 역사의 중심지 터어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하여 식민과 지배와 통지, 그리고 새로운 서양역사와 문명을 알린 기독교가 어떤 역활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알 수가 있었다. 다시 찾고 싶은 나라가 바로 터어키다. 비행기는 벌써 흑해를 건너 중국내륙으로 다가서고 있었었다. 갈증이 났다. 켄맥주 하나를 부탁해 단숨에 마셨다. 지금 이 맥주처럼 여행의 갈증 하나가 씻어지고 있는 중이다. 터어키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하고 공부를 한 후 다시 찾을 것 같다. 의자 등바지를 뒤로 조금 젖혔다. 몸과 마음에 잠을 실기 위한 조치었다. 그제서 몸과 마음이 잠에게 섞이기 시작하였다.... 쿨쿨..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