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잎 흩날리던 날
아흔 여섯의 수(壽)를 누리던 빙모(聘母)께서 사월 스무 나흘(음력 윤 3월 4일) 저승으로 떠나셨으니 당신이 믿어왔던 종교 용어를 빌어 ‘선종’이라고 표현해야 옳지 싶다. 그리고 이틀 뒤 경춘가도의 춘천 인근에 자리한 ‘경춘공원’ 묘원에 먼저 유택을 마련해 영면에 드셨던 빙장(聘丈)어른의 옆에 합장함으로써 이승에서 고단했던 육신을 누이고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삶을 누릴 적에 넉넉하고 어진 마음을 바탕으로 베풂의 덕을 쌓았던 선업(善業) 때문이었을 게다. 장례 날 첫 새벽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봄비가 여명과 함께 거짓말같이 들면서 날씨가 쾌청하게 맑아져 전형적인 화창한 봄날로 둔갑해 무척 황감했다. 서울에서 춘천 쪽으로 경춘가도를 달리는 운구 버스의 차창에 스쳐지나가던 산야의 수목들이 펼치는 연록(軟綠)의 향연이 무척 싱그러웠다. 그래도 이승의 수많은 연의 끈을 내려놓기 아쉬웠던가보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 잎이 세찬 바람결에 낙화되어 흩날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연유인지 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꽃잎은 저승으로 향하다가 심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당신을 쏙 빼 닮은꼴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얼마 전 당신이 세상을 뜨면 우리 아이들이 고아가 될 터인데, 불쌍해서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했다는 얘기가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슬하의 막내가 미구에 환갑을 맞을 처지인데, 그 말의 이면에는 부모의 애틋하고 절절한 심정이 짙게 배어있다.
돌이켜보면 지난한 질곡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파란 만장한 변혁의 소용돌이를 겪은 세대이다. 일제 강점기에 젊음을 보내며 가정을 꾸리고 해방 한 해전에 얻은 큰딸을 비롯하여 다섯 남매를 낳아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켰으니 결코 녹록한 삶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40 몇 년간을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했던 빙장과 일군 보금자리를 가꾸며 험한 풍파나 큰 위기 없이 축복받은 삶을 누린 당신이다.
고령의 연세에 비해 건강하고 사고력에 전혀 문제가 없어 가정사를 비롯한 자질구레한 공사의 업무를 손수 챙겨 처리하던 당신이다. 그런데 지난해 섣달 중순 무렵 은행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아파트 단지 내의 인도를 걷는 도중에 불의의 변고가 발발했다. 아파트 내부 길에 익숙하지 않은 봉고차가 뒤에서 따라오다가 차바퀴가 인도로 돌진하며 노인을 밀어 붙여 쓰러지면서 고관절이 골절되었다. 그 자리에서 병원 응급실로 옮겨 수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령인 관계로 회복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합병증으로 위기를 여러 차례 겪으며 연명을 하다가 끝내 유명을 달리하셨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던가. 빙모님이 중환자실과 입원실을 오가며 어렵사리 위험한 고비를 넘나들던 지난 정월(11일)에는 올해 일흔 아홉에 이른 손위동서가 뇌출혈로 쓰러져 당신과 같은 병원에 입원하는 사달이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같은 중환자실에 입원했던가 하면 물리 치료실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에 치료를 받으며 입원을 계속 해왔었다. 빙모님은 의식이 있는데 비해서 동서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큰사위가 쓰러져 같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눈치 채면 병세가 악화될 것을 염려해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가하면 가끔은 마주치지 않도록 숨바꼭질까지 해야 했다. 당신은 끝내 큰사위와 얄궂게 얽혔던 불행한 인연을 모른 채 세상을 뜨셨다.
작은 사위인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하신 당신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펴냈던 수필집의 머리말에서 마지막 서평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깡그리 읽은 유일한 독자일 것이다. 늘 책에 대한 자상한 평을 해주시던 모습이 선연해 가슴이 아리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가끔 당신을 찾으면 거실에 당신의 큰아들인 김 박사와 내가 펴냈던 전공 서적을 위시해서 나의 수필집을 빠짐없이 챙겨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뿌듯해 하던 당신이다.
장례의식을 치루면서 사회적 통념에 따라 두 분의 묘를 관리해줄 후손을 생각해 봤다. 아내를 비롯해 처형과 처제는 전통적인 유교의 틀을 바탕으로 고려할 때, 그 범주를 벗어난 출가외인이다. 그러므로 그 무거운 짐은 자연스럽게 처남 형제와 그 직계 자손의 몫이다.
큰 처남은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다. 그 아이들은 미국 시민권을 가졌고 그 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귀국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거기다가 자신마저도 이번 학기를 마침과 동시에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면 영주권을 가진 미국으로 떠날 낌새이다. 그런데다가 작은 처남은 딸 하나가 소생의 전부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처남들의 시대를 지나면 당신들의 묘지를 관리할 아랫대(後代)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우리 주위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와 얼추 엇비슷한 경우가 어디 한 둘일까.
두 분은 새로운 보금자리인 유택에서 소꿉장난 같은 신접살림을 차릴지도 모른다. 그리 되었을 때 혹여 이승에서 못 이루었다거나 일그러진 불상사를 겪는 우를 범했던 경우가 있었다면, 또 다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만복을 한껏 누리며 영생하시기를 간원한다. 쓰잘머리 없는 잣대를 들이대고 겉모양새를 기준으로 무모하게 가늠하다가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릴 길 없어 허둥대는 와중에도 오석(烏石)의 묘비를 곁눈질하며 정성껏 예를 올렸는데도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자연에서 태어나 이승의 삶을 누리다가 종국에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움직일 수 없는 섭리라 해도 천붕(天崩)의 아픔을 극복하기 어려워 비틀거렸다. 거기에다 먼 훗날 이 묘지는 누가 돌볼 것인가라는 의무적인 명제가 더해져 정신을 마구 흔들어 대며 설상가상의 상황으로 내몰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문학공간, 2012년 7월호, 통권 제24권 272호,
(2012년 4월 27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