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평전]- 우계(성혼)사상의 현대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아, 경은 훌륭하도다 창녕의 거족(巨族)이었네
조선 초기로부터 이미 세덕(世德)이 드러났네
청송선생의 아드님으로 그 학문을 이어 받았고
어려서부터 성학에 뜻을 두어 과거에 오름을 원하지 않았네~
-중 략-
~생전과 생후가 어찌 다르겠는가 덕스러운 모습 보는 듯하네
내 어찌 날자를 넘기겠는가 제문을 즉시 지었네
담당관이 제사 음식 펼쳐 놓고 왕명을 받들어 술잔을 올리네~ (373면)
(이 글은 1767년(영조43년)성혼의 사당을 서울 장동(壯洞)의 고택(옛 청송당)으로 옮겼는데, 이때 임금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낸 4언절구로 된 제문이다.)
성혼은 위대한 학자요, 교육자요, 선비다.(10면) 임금을 향해 목숨 걸고 직언을 토해 냈던 강직하고 청렴한 참선비의 표상이다.
“전하께서는…인재를 등용할 때 모나지 않고, 무르고 잘 따르며, 침묵을 지키는 무능한 자들을 뽑아 발탁하고 총애하십니다. 이런 무리들이 높은 자리와 중요한 지위에 가득 찼기 때문에 매양 벼슬을 내리는 특명이 있을 때마다 유식한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고 한탄합니다.… 유속의 사람들은 고상한 뜻이 없이 오직 관작만을 좋아하여 정사를 할 때 문서를 대조하고, 옛날부터 해 온 고사(故事)를 따라 자신의 벼슬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신은 차라리 말씀을 드렸다가 죄를 받을지언정 차마 말씀드리지 아니하여 전하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127~128면)
이번에 성혼의 삶을 그린 『우계 성혼 평전』이 출간되었다.
(우계성혼 평전, 2016.12.20, 지은이 한영우, 발행인 박근섭 박상준, 펴낸곳 민음사)
성혼은 그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진 데 대하여 안타깝다. 성혼은 절친한 친구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후기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그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본 시조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 를 쓴 깨끗한 선비, 성리학의 대가 정도로만 기억된다.
성혼은 결코 학계에서 버림받은 외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혼이 우리에게 친근하지않은 이유는 그에 대한 연구가 주로 유학사의 시각에서만 이루어진 까닭이다.(10면) 그간 성혼을 조명한 저작이나 논문들도 대개가 그의 학술적 업적이나 문학 세계, 교육 사상 등을 다루고 있다.
평전 저자인 국사학자 한영우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가학의 전통이 있고, 의식주의 생활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도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도 있는 사람”으로서 성혼의 인간적인 참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러한 삶의 현장을 알고 난 뒤에야 그의 학문과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저자는 전작 『율곡 이이 평전』을 저술하면서 이이와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또 한 사람, 성혼을 만났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살아서도 한 몸 같았고, 죽은 뒤에도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9면) 친구 이이의 영향으로 이기설의 새로운 경지와 나라를 경영하는 경세를 터득했다. 이후 둘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하게 논쟁했고 서로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성혼과 이이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평생 동지였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경장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자신들이 처한 시대가 토붕와해(土崩瓦解), 즉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하고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임금을 압박했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삼정(田政, 軍政, 還政)이 문란하여 국가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그 당시의 정치.사회 현실을 “터럭 한 끝에 이르기 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진단하고 지금에 와서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한 주장의 전형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혼과 이이 사이에 오간 교류와 토론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를 연 큰 스승들의 학문과 정치적 식견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 준다. 조선 후기 붕당의 정쟁으로 인해 굳어진 ‘이이는 노론, 성혼은 소론’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본래 한 몸이었던 두 물줄기의 원류를 바로 보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을을 불사르고 후학을 길러 낸 참선비의 모습을 찾는다.
* 우계사상 연구에 대한 제언
-1.우계사상에 대한 ‘현대적 재조명’,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 선생은 정치적 실천자이며, 우계선생은 학자로서 정세판단 의견을 제시했다. 화친 주청자로 엄청난 공격을 받다. 우계는“화친에 동의할 수 없지만 당장의 위급함에 벗어나게 해준 것도 천조의 은혜로 생각한다.” 이 일로 우계는 엄청난 공격을 받았는데 자신은 화친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도 명나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 역시 철회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조선.일본.명과의 미묘한 외교문제) 화친을 주창했던 우계선생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시다면 오늘날 미.일.중.러 각축장이 된 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어떤 화두를 던질 것인가?
-2.우율 논쟁, 우계학파 논쟁에 대하여
현대학문은 융합학문이 대세이므로 학제간(Interdisciplinary) 차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성리학자이며 현실주의자인 경세가로 정의하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퇴계. 율곡 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가 있듯이 ‘우계’하면 떠 올리는 독보적 ‘이미지 창출’이 필요하다. 대표적 이미지가 미흡하다. 우계의 독자적 Identity를 정립해야 한다.
-3.우계학문을 적극 선양시켜야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 했다. 자랑스런 선조님들의 위업을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종전에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 글은 ~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녀로, 과거시험 합격은 몇 살에, 벼슬길 설명, 언제 사망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인물평가는 이러한 도식적 틀에서 벗어나 글 내용을 이벤트식으로 서술하여 대중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형식으로 가는 추세이다.
도서관 서고(書庫)에 머물러 있는 각종 자료나 문헌에 수록된 선조들의 위업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나 업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여 세상에 들어나게 해야 할 책임이 후손들에게 있다 하겠다. 훌륭하신 조상님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가치의 전환이 필요하다.
성혼과 이이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비슷한 행보를 많이 보였지만, 적어도 교육사업에 관한 일은 성혼이 이이보다 항상 앞서 갔다. ~~ 우계서실을 세운 것이 이이의 은병정사 (隱屛精舍) 보다 앞섰고, 학생들의 교육 지침 서로 위학지방(僞學之方)을 편찬한 것도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보다 몇 년이 앞섰다.(24면)
사정이 이러함에도 지금까지 발표된 우계사상의 각종 연구자료에서 보면 항상 이이는 주역(주연)이고 우계는 조역(조연)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주식으로 말하자면 우계학문이 우량주임에도 불구하고 이이의 그늘에 가려서 2등주로 취급 받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연구방향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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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성범모(경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