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재가 달라졌다- 하늘다리>
2017년 11월 20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회의가 있어 참석했디. 이 자리에는 서서울 형토문화 연구소의 홍헌일 회장도 함께 했다. (홍 소장과는 20년 전부터 잘 아는 사이)
최근 설치된 무악재 녹지 연결로의 이름을 여기서 선정했다. 전국에서 응모해 온 이름들을 두고 약 2시간에 걸쳐 회의를 진행, 최우수상으로 '무악재 하늘다리'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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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많이 넘던 고개 무악재
고양 고을 나무장수들이 많이 넘던 고개
- 배우리 -


"자네, 왜 눈동자가 돌아갔나? 고양군 나무장수 닮았네그려."
눈동자가 돌아가 있거나 눈을 잘 흘기는 사람을 보고, 옛날 서울 사람들은 '고양군 나무장수 닮았다'고 했다. 왜? 예부터 경기도 고양군의 나무장수들은 눈동자가 한쪽으로 돌아갔다고 소문나 있어서다. 그것도 왼쪽으로만 돌아가 있다고. 고양군 나무장수들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그 이유를 알까? 이 이야기는 무악재와 아주 관계가 깊다. 고양군의 나무장수들은 한양 땅에 와서 나무를 팔기 위해 나뭇짐을 지고 밤중에 무악재를 넘는다. 그래야, 그 나무를 서울 남대문 밖이나 청패(청파동)의 나무 시장에서 새벽장을 이용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서북로 중요 길목의 홍제원

서울 부근의 길들은 도성 대개 4대문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 각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지금은 고속국도가 많이 뻗어 있어 도성의 문들과 이들 국도는 별로 큰 관계가 없지만, 옛날에는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면 대개는 도성의 문을 거쳐 문안으로 들어오게 돼 있었다. 그래서, 옛 지도를 보면 지방으로 나가는 길들이 모두 서울의 대문을 시작으로 하여 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북으로 뻗은 길은 북문인 숙정문과 자하문(창의문)을 시작으로 나 있지는 않았다. 이것은 한양의 북문이 조선시대엔 교통에 그리 큰 구실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서울에서 북쪽 지방 즉 황해도나 평안도로 가는 북쪽길을 '서북로(西北路)'라 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많이 이용하던 단 하나의 길로, 대체로 의주(義州)를 향해 뻗어 있는 길이므로 '의주로(義州路)'라 했다. 그러나, 서울 근처 사람들은 서문을 나와 첫번째로 넘던 이 길을 '무악재길'이라 했다.
옛날 한양 사람들이 황해도나 평안도쪽으로 가려면 꼭 넘어야 했던 무악재는 많은 이들의 애환을 싸안아 왔다. 나라에선 여행객의 편리를 위해 그 너머에 홍제원이라는 숙소까지 두었다.
지금의 '홍제동(弘濟洞)'이라는 행정동 이름을 낳은 홍제원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이라 할 수 있었다. 도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홍제원은 의주로 가는 성 밖 첫번째 길목에 있기 때문에 중국을 오가는 사신은 물론 일반 여행객까지 많이 이용하였다. 원 안은 사신과 일반 여행객이 따로 묵을 수 있도록 사용하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사신이 묵는 곳은 공관(公館)이라고 해서 누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반인들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였다. 중국 사신이 의주로를 통해서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 마지막 휴게소 구실을 하였으므로 사신들은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예복을 갈아입는 등 입궐 준비를 하곤 하였었다. 이 건물은 1985년까지도 남아 있었다.


천연의 요새
예부터 의주로의 중요 지점인 무악재는 지형적으로 천연의 방어 요새이기도 했다. 북악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양 우백호는 인왕산을 거쳐 안산, 금화산 등을 이으면서 마포 방면으로 힘차게 뻗었는데, 이 때문에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무악재는 예부터 북서로 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무악재는 군사적으로도 그 어느 곳보다 매우 중요시되었다.
광해군 때의 문인인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는 이 무악재에 대하여 이렇게 시를 서서 읊었다.
왕궁과 관아 바로 저기인데
성곽의 엄한 수비
말 안장을 의지했네
변방의 소식이 저물게 들어오는데
날마다 평안무사하다네
홍제동으로 넘는 무악재가 지금과 같이 길이 넓어지고, 고개도 많이 낮아진 것은 1962년 8월, 4차선 확장 공사를 해 놓은 후부터였다. 서울의 유일한 북쪽 관문인 이 고개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아리고개와 함께 짐을 실은 리어카나 우마차가 고개를 올라갈 때 짐차를 밀어 주고 20원씩 돈을 받는 짐꾼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고양군의 나무장수들이 돈푼이라도 마련하느라고 나무 팔러 서울로 들어올 때는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길이었다.
무악재를 넘느라고 그득하게 나무를 실은 지게나 수레가 한밤중에 무악재를 넘을 때, 이들의 눈은 으레 왼쪽으로 돌아가게 돼 있었다.

왜 앞을 안 보고 왼쪽을 볼까? 고개 왼쪽에 인왕산이 있고, 그 인왕산에서 툭하면 호랑이가 튀어나와서다. 호랑이가 튀어나오면, 짐 같은 것은 벗어던지고 훌딱 도망을 가든지, 지게 작대기로 후려쳐서라도 쫓아 버리든지 해야 하니까. 그만큼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이들의 큰 경계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무를 팔고 돌아갈 때, 그 왼쪽으로 돌아갔던 눈은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게 돼 있지 않는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일을 보고 돌아갈 무렵은 이미 한낮. 호랑이가 그런 낮에 나올 리 없다. 그런 데다가 대개 다른 행인들과 여럿이 함께 넘는데 갈 길이 바쁜 그들이 눈을 그 쪽으로 둘 필요가? 거의 매일 반복되다보니 고양군 나무장수들의 눈이 그렇게 굳어 버릴 수밖에. 인왕산의 호랑이가 무악재를 넘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 하나로도 알 수가 있다.
수년 전, 백두산 호랑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이 호랑이를 보러 모이기도 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100년 전쯤만 해도 서울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 중에도 제일 많이 나타나는 곳이 인왕산과 무악재인데, 이 때문에 당시엔 사람들이 무악재를 혼자 넘어 다니지 못했었다. 그만큼 무섭고 후미진 고개.
옛 서대문 형무소가 자리잡고 있던, 지금의 현저동(峴低洞)에 관에서 다스리는 '유인막(留人幕)'이라는 막사가 있었다. 이 무악재 고개를 넘으려는 행인을 일단 이 유인막 막사에 모아 두었다가 열 명이 되면, 함께 이 고개를 넘어가게 했었다. 고갯길을 갈 때는 화승총을 든 병사가 앞에 서서 행인들을 호위하게 마련. 비가 오는 날이면 화승총이 쓸모 없어 총 대신 활과 화살통을 메고 나섰다.
유인막이 생기게 된 것은 물론 호환 때문이었지만, 호랑이가 뜸했어도 그것은 오래 지속되었다. 유인막 군사들이 무악고개를 넘어가는 행인들을 호송하다는 명목으로 고개를 넘어가는 이들에게 계속 '고개넘잇돈(월치전.越峙錢)'이란 수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악재는 부조리의 온상이었다. 통행료 수입이 꽤나 짭잘했던지, '군사면 다 유인막 군사냐' 하는 말도 나돌았다. 또 백성들 사이에선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까지 나돌았었다. '백수의 왕'이라고 했던 호랑이는 지금에 와서는 사회나 지리적 환경의 변화로 이미 멸종됐다고 하지만, 백 년 전쯤만 해도 호랑이에게 사람이 물려 가거나 다치는 일들이 꽤 많았다. 이러한 호환 때문에 포수들을 비롯해서 군인이나 순검에 이르기까지 호랑이 잡는 일을 장려해서 더욱 멸종의 상황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사이좋게 지낸 일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효자동(孝子洞)에 박씨라는 효자는 고양군에 있는 선친의 산소를 매일같이 찾아 예를 올렸는데, 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무악재에 나타나서 박씨를 고양군까지 매일 업어다가 성묘시켰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재치있는 나무꾼이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을 때 '형님'이라고 하며 절을 하자, 이 호랑이가 나무꾼의 노모를 돌보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 무서운 호랑이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화를 보면 제일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이 까치와 호랑이다. 이 민화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무서운 맹수라기보다는 애교 있는 동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는 그림도 있다.
호랑이에 관한 많은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 헌종 때, 명장 강감찬 장군이 뚝섬에서 호랑이를 퇴치한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당시, 강감찬 장군이 한양의 판관으로 있을 때의 일. 때마침, 뚝섬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을 물어가고 관원이 다치고 하는 사건이 있어 골치를 앓고 있었다. 얘기를 들은 강 장군은 사나흘만 있으면 호랑이들을 말끔히 퇴치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아전에게 쪽지 한 장을 적어 주며, '내일 새벽에 북동이란 곳에 데려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이 쪽지를 보여 주고 불러 오라'고 했다. 아전이 그 쪽지를 들고 북동에 가 보니, 강감찬 판관이 이른 대로 노승이 혼자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아전이 그 쪽지를 보이자, 노승은 아전을 따라 한양부로 찾아와 강감찬 장군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강 장군은 느닷없이 큰 소리로 호령을 했다.
"네 이놈, 네가 금수(禽獸) 중에서 영물(靈物)이라는데, 어찌 그다지도 사람을 해치는가! 너한테 닷새 동안의 말미를 줄 테니, 네 무리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거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내 화살을 받을 것이다."
강 장군의 호령에 늙은 중은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물러갔는데, 닷새 후에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 무리를 이끌고 광나루를 건너 광주쪽 산속 깊이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산소의 명당 자리를 놓고 얘기할 때는 좌청룡(左靑龍)에 상대되는 말로, 우백호(右白虎)라는 말을 쓴다. 명당자리는 오른쪽에 있는 백호(白虎), 흰 호랑이가 그 곳을 지켜 준다고 믿는 것이다. /// (글. 배우리)
첫댓글 서울 고개
http://whitebear-uni.tistory.com/m/184
서울에도 고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