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강해 (5)
말씀이 믿기지 않을지라도
왕하 5:8-15
I. 서론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교수가 쓴 책, “습관이 영성이다(You are what you love)”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을에 큰 홍수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에 살던 한 독실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물이 무릎에까지 차 올라서, 이웃사람들이 노 젓는 배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카누를 탄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어서 타! 널 구하러 왔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크리스천은 “아냐, 난 괜찮아.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카누에 찬 친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마을을 그냥 빠져 나갔습니다. 수위는 계속 올라가서 이제 창문 사이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모터보트가 빠른 속도록 다가왔습니다. 보트에 탄 사람들이 외칩니다. “어서 타세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그런데 그 크리스천은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거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보트를 탄 사람들이 계속 타라고 재촉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나서, 그 크리스천은 지붕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구조 대원이 헬리콥터에서 구조용 바구니를 내리면서 소리칩니다. “타세요. 저희가 구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크리스천은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하러 오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 헬리콥터에 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크리스천은 물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천국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여쭈어 봤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구해주시러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구하러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너에게 카누와 모터보트와 헬리콥터를 보내지 않았느냐?”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그 사람의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ABC 이론이 있습니다. 여기서 ABC는 Accident – Belief – Consequence을 말합니다. 사건 – 믿음 – 결과. 사건에 대한 믿음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로 설명을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사건: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3번이나 사람들이 구하러 왔지만, 그 크리스천은 카누, 모터보트, 헬리콥터에 타지 않았습니다. 결과: 그 크리스천은 끝내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도 같은 문제였습니다. 사건: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을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결과: 나아만은 이 말씀을 듣고, 분노하여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 가고자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직접 와서 자신의 환부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엘리사가 사환을 보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닙니다.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에 대한 내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홍수를 만난 크리스천이 카누나 보트나 헬리콥터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방법이라고 믿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 역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믿었다면, 화를 내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사건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최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중에 “말 그릇”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은 말 그릇에 담긴 말은 말을 담을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 쉽게 흘러 넘치게 되어,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큰 말 그릇에 담긴 말은 많은 말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담은 말은 쉽게 세어나가지 않게 되고, 꼭 필요한 말을 골라서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릇이 새지 않아야 하고, 이 그릇의 크기가 커야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믿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 담을 올바른 그릇, 큰 그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며, 무엇이 큰 믿음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올바른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왜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좋은 경우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나쁜 경우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을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거나 마지 못해서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구본형 작가가 쓴 “익숙한 것과 결별”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88년 7월, 영국 스코틀랜드 근해 북해유전에서 석유 시추선이 폭발했습니다. 이 사고로 168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앤디 모칸(Andy Mochan)은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이었습니다. Andy는 석유 시추선이 폭발할 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폭발음으로 인해서 놀라서 잠을 깰 수 밖에 없었고, 급하게 밖으로 나가 보니, 눈 앞에는 거대한 불기둥이 곳곳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치솟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피할 곳은 없었습니다.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배의 난간으로 뛰어갔습니다. 하지만 바다 역시 유출된 기름으로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다로 뛰어내린다고 해도 불과 30분 정도 밖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서 있는 갑판은 해수면으로부터 50미터 높이에 있었습니다. 아파트 20층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파트 1층 높이 약 2.6미터 / 약 20층 높이) 모든 것이 두려웠고, 불확실했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꽃이 일렁이는 차가운 북해의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갑판 위에 그대로 있는다는 것은, 100% 불에 타 죽는다는 것이었지만, 갑판 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린다는 것은, 그나마 1%의 살 확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다로 뛰어내리면 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에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근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요단강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는 것은 100% 나병환자로 일평생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근다는 것은 불확실했지만, 치료받을 수 있는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2~13절,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그러니까,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선택권이 없어서, 믿기지 않았지만, 그냥 순종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에 순종했더니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 생활의 법칙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둘째, 말씀이 믿기지 않을지라도 일단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은혜를 바랄 수 있다. 셋째,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으면, 이것은 가짜 믿음이다. 어떤 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에게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바로 살 길입니다.
2. 둘째, 왜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생각한대로 치료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나아만을 믿음의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아만의 생각대로 엘리사가 손을 얹어 기도함으로 치료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말한대로 요단강이 다메섹의 강보다 더 치료의 효과가 있는 강도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순전히 나아만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나아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살아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5절,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나아만의 고백을 보십시다. “이제야 제가 알겠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만약 엘리사가 나아만이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방식대로 치료를 해 줬더라면, 나아만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배경주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손을 올리는 것은 신을 불러내거나 주문을 외울 때의 행동이었다. 이런 행동은 신을 부르고 찬양하면서 신을 달래고 신의 보호를 구하며 악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포함했다.” 만일 엘리사가 나아만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치료를 해줬더라면, 하나님은 다른 이방 우상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도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육신의 병이 치료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치료되어, 믿음의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내 생각과 다를 때가 있고, 내 방식과 다를 때가 있습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때가 바로 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아만의 교훈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기준에 맞기 않을지라도 일단 순종합시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