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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잔치의 초대
눅14:15-24
세상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만
하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인가 TV에서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에 황조롱이 한 쌍이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이제 갓 부화된 새끼를 암컷과 수컷이 키우고 있는데 새끼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우리 사람과 흡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이 황조롱이의 보금자리를 쳐들어 왔습니다.
새끼 두 마리를 순식간에 삼켜 버렸습니다.
새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암컷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단란하고 행복하던 황조롱이 가정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수컷이 새끼에게 줄 먹이로 들쥐 한 마리를 물고 돌아 왔습니다.
벌어진 사건을 직감하고 빈 보금자리를 한 참 바라보다가 체념하고 암컷에게로 날아가서 상처 입은 곳을 살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해서인지 새끼를 부르는 소리를 발하데 마치 통곡하는 소리 같이 애처롭게 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의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왜 카메라 기사는 구렁이를 쫓지 않고 촬영만 하고 있었는가?
(그것이 카메라맨의 사명이었던 것임)
오늘 현대인의 가정에서도 이런 가슴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리고 통곡하는 가정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가정이어야 하는데 그 행복을 빼앗아 가는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이전에 누리지 못하던 풍요한 생활을 하고, 최첨단 과학 문명으로 편리함과, 삶의 효율은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가 가정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예로부터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표현할 때는 <춥고 배고프다>고 했습니다.
추운 것보다 따뜻한 것이 복됩니다.
배고픈 것보다 배부른 것이 복됩니다.
본문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떡을 먹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식사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서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던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떡을 먹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떡을 먹는 사람이 복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행복>을 소유하시길 기원합니다.그런데 이 사람이 이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는 하나님의 섭섭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섭섭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잔치를 여셨습니다.
그런데 와서 먹어야 할 사람들이 와서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섭섭해하신다는 것입니다.
<떡을 먹는 복>을 베풀었는데도, 그 복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 니다.
첫째로, 모든사람은 하나님의 떡을 감사함으로 먹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잔치 예법은 잔치가 열리기 오래 전에 초청장을 보내서 초대를 합니다. 그리고 잔치 날이 되면 하인을 보내서 모셔 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잔치날이 되어서 종들을 보내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핑계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 산 밭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으므로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장가를 들면 일년 동안 군복무도 면제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초대받은 그 날 결혼한 사람은 아닙니다.
벌써 결혼하여 이제는 충분히 잔치에 올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종들이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자 주인이 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분노>는 섭섭함이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처음에 초대했을 때는 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는데, 정작 잔치가 열리는 날이 되자 아무도 오지않은 것입니다.
유대 풍습에서 잔치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극도로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 문제를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잔치에 오기에는 자기 일에 너무 바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대를 사람의 초대보다 못하게 여깁니다.
윗사람이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당장이라도 달려갑니다.
달려가서는 <왜 부르셨습니까?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저 와서 먹고 즐기라>고 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영적 패역함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들이 다 부요하기 때문임을 말씀합니다.
소를 사고, 밭을 사고, 장가들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릅니다.
하나님의 상에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하나님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송재호를 아십니까? 송재호는 부산 동아대 국문학과 출신입니다.
59년도에 부산 KBS 성우로 데뷔해서 탤런트가 된 사람인데, 이 송재호씨는 인상이 아버지같이 생기셨는데, 그런데 이 송재호는 아주 구두쇠입니다.
작은 돈도 잘 쓰지 못하는 구두쇠입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TV탤런트가 영원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때 인기 있을 때 돈을 벌어서 그 다음에 먹고 사는 건데, 지금 돈 벌때 철저하게 아껴야지 하면서 전혀 돈을 쓰지 못하는 구두쇠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아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신실한 집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송재호씨는 부인이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반대하는 이유는 자기가 번 돈을 교회에 줄까봐, 그런데 자존심이 있어서 돈 얘기는 못하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하나님이 어딨냐고 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부인이 이 송재호씨한테, 아주 하소연을 하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내가 챙피해서 못살겠다.
내가 과부냐? 내가 분명히 남편이 있는데, 왜 교회 갈 때 나는 혼자 가느냐?
우리 교회 촟동원 주일에는 다른 사람은 다 남편과 예배하는데, 나만 혼자서 예배드린다. 이번 총동원 주일에 나를 사랑하거든, 한번만이라도 가줘라. 하도 부인이 그러니까 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한가지 약속을 하고 그런 한번만이야 하고 부인하고 약속을 하고 교회에 갔습니다.
아예 믿음 생각과 다닐 생각이 없으니까 눈을 감고 잠이 들기를 원하는데,
얼른 예배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자꾸 자꾸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송재호의 마음에 도대체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왜 보라고 하는거야. 그러면서 눈을 떠서 목사님을 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그 목사님 설교하시는 뒤에 예수님이 거기 계신겁니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띄시고 자기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봤나?
하면서 눈을 부비고 다시 봐도 주님이 인자하게 자기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부인을 쿡쿡 찌르면서 여보 저거 예수님 맞는거지?
그럤더니 부인이 왜그래요?
아 저 앞에봐 예수님이 있잖아 그랬더니 뭐가 있어요 그냥 목사님이지 하고 타박하면서 앞을 봅니다.
그런데 이 송재호씨는 아무리 봐도 주님이 나타나서 자기를 보고 있거든요.
그리고 목사님이 자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송재호는 그때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멘!
하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장로가 돼서 서울의 오륜교회에 장로로 시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두쇠이고 따져보고 해서 교회가는 건 손해라고 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활짝 연 줄로 믿습니다. 탤런트는 인기 있을 때 한번 벌어서 나중에는 그 돈으로 먹고 살아야 된다고 걱정하던 그의 인생에 예수님을 바라본 그에게 다른 탤런트 인기 있다가 없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송재호는 늙어서도 TV에 나오잖아요.
그리고 CBS에서 큐티를 인도하는 장로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믿기를 원하고 예수믿으라고 하면 계산하고 따져보고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리고 저들이 예수님께로 방향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인생을 방향을 주님께로 틀게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로 방향을 틀 때,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영을 눈을 뜨게 하셔서 예수님을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영의 귀를 열어 주셔서 주의 말씀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을 그저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차려놓은 세상의 잔치자리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에 차려진 음식은 사람이 차리는 상에 있는 음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공한 사람의 상 위에 음식은 많아도 행복은 차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부자의 잔치상에 비싼 음식은 많아도 식욕은 올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욕이 있습니다.
권력가의 잔치상에는 많은 또 다른 권력자들이 앉아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차별이 있어서 못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차별 없는 환대가 있습니다.
세상의 잔치상에는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는 공허함이 있으나,
하나님의 상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세상의 잔치떡은 먹어도 죽지만,
하나님의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상 잔치상으로 달려갑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스스로 잔치를 열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 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주님은 자신의 부요함으로 스스로 상을 차려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잔치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누가복음 6장 2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부자 죽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나사로 낙원에서 위로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에서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먹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천국의 식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떡을 먹어서 좋고,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표시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상의 상징은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열심히 예배하십시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떡을 잡수십시오.
말씀으로 배부른 행복을 누리십시오.
에배를 통해서 은혜의 떡먹기를 사모하십시오.
은혜의 떡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 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누가복음 22장 30절의 말씀입니 다.
그리고 똑같은 음식도 먹는 곳에 따라서 기분도 다르고, 맛도 다릅니다.
아구찜으로 유명한 집에 가서 먹어 보면 정말 맛있는 것 같습니다.
감자탕으로 유명한 집에 가면 정말 맛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름 난 집에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물론 맛도 있겠지만, 그 이름도 한 몫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잔치 잘하기로 소문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교회가 소문난 교회가 되면 수많은 사람이 영적 음식을 먹기 위해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 음식은 초대받은 사람만 먹는 게 아닙니다.
잔치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씩 맛을 보면서 먹어봅니다.
자신들이 먼저 먹습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이 먼저 맛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잔치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먼저 배부름을 얻게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이 이 잔치를 나를 위한 잔치로 알고
매일 저녁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자리를 채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도 신령한 떡을 먹고, 장차 영원한 나라의 생명의 떡도 먹게 되길 기원합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도 떡을 먹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떡을 먹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 떡을 먹게 해야 합니다.
혼자만 먹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눠 먹어야 합니다. 함께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떡은 나누면 나눌수록 내게 돌아오는 양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떡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집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은혜는 나눌수록 풍성해집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나누어 줄 때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져서 오천명 이상이 먹었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에배가 디베랴 바닷가의 잔치가 되길 기원합니다.
함께 떡을 먹으려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초대를 하면 좋을까요?
우선 정중한 초대를 해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잔치가 열리기 여러 날 전에 초대장을 보내고,
잔치 당일에 모시러 가는 초대는 정중한 초대입니다.
정중한 초대를 잘하게 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갑작스런 초대입니다.
예고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가서 데려오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정중하게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오지
않았으므로 잔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 때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젠 미리 초대된 사람들만 모셔 오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길거리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미리 연락되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빨리 나가서 지금이라도 만나는 분들을 모셔 와야 합니다.
빨리 해야 합니다.
모셔올 사람들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도 데려오고, 장애를 가진 이들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런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데려와야 합니다.
저런 사람은 아마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리 제쳐 놓았던 사람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누구든지 초대해서 하나님의 떡을 함께 먹는 행복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초대는 억지 초대입니다.
비유를 보면 길거리에 나가서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데려왔으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다시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자리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것은 억지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초대를 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과 친척들, 이웃과 친지들을 강권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초청해야 합니다.
한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낡은 가방 속에 들어있는 보잘 것 없는 엽서 한 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편지 한 장에도 정성을 쏟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 엽서를 전달할 때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었습니다
자신은 한 우편배달부에 불과하지만,
자기 배후에는 국가가 있어서 자신의 체신업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자신의 업무를 방해하면 국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다가 강력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는 대한민국 우편배달부 일은 잘 하면서 왜 천국 복음은 배달하지
않느냐?>
그는 그때까지 복음을 배달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두 가지 확신을 적용했습니다.
내가 가진 복음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소중한 것이므로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함으로
결코 마귀가 방해하지 못할 것을 믿었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대전을 가려고 소이역에 갔어요.
그런데 그 날 따라 날씨가 추웠는데 기차가 안옵니다.
너무 추워서 그냥 태백가는 기차를 탔어요.
앉아서 가는데 저기에 애기 엄마가 애기를 업고 서 있는데 자리가 없어서 서 있어요.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리고 기차 역에 휴지가 많아서 휴지를 구석구석 휴지를 줍습니다.
그냥 그거 두고요 어떤 노숙자가 지나가면서 구궐을 하는데 지갑을 꺼내더니 이거로 점심이라도 드시라고 만원짜리를 내밉니다.
구제를 합니다. 선하고 착한일을 합니다.
또 그것뿐 아니라. 지나가는 김밥을 사서 그거를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눠먹으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 기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이 어딨냐고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종착에 기차가 도착했어요. 내려보니 제천입니다.
이 사람이 종착역에 내려서 철도청에 항의를 합니다.
내가 기차안에서 얼마나 착한일을 많이 했는데,
서울가는 나를 왜 부산으로 끌고 왔느냐고 항의를 하면 그거 얼마나 어이없는 짓입니까?
태백가는 기차를 타면 아무리 착한일을 하고 구제를 많이해도 그 사람은 태백 가는 겁니다.
대전에 가려면 대전가는 기차를 타면 됩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 가는 열차를 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옥가는 열차를 타면 아무리 착한일을 많이하고 구제를 많이해도 지옥가는 열차를 타면 거기가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말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그거 유교하고 공자님이나 좋은거요. 좋은 말씀하시는거여.
교회가도 좋은 말하고 절간에도 좋은말 하는데, 아무거나 잘 믿으면 되지 하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천국가는 열차는 예수님 열차밖에 없는 줄로 믿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열차는 지옥가는 열차입니다.
불교에서도요 구제 많이 하죠. 그것도 착한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다 헛수고하는 겁니다. 허공을 치는 겁니다.
그런 나와 여러분 예수님께 방향을 튼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제하고 선행하는 모든 것은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받을 축복의 일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방향을 트는 것은요. 그것은 마치 나침반과 같습니다.
이 나침반은요 산속에서 동서남북을 보다가 길을 잃었을 때 정확하게 길을 찾아줍니다.
바다 가운데서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모를 때 나침반을 보면 정확히 길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의 인생길에서 어떤 길이 참된 길인지 모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인줄로 믿습니다.
내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 누구도 복음 증거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부잣집에도 가난한 집에도 편지와 함께 천국의 편지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의 복음 우편배달부가 되어 우리가족 골육친척 모두가 생명의 떡으로 배부름을 얻게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