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둘, 그녀들이 모여든다. 한데, 무슨 일일까. 다들, 패잔병처럼 열정이 식어 보인다. 얼핏 보면 세상을 달관한 듯 속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삶에 애착을 놓아버린 얼굴들이다.
문화센터는 속 시끄러운 그녀들이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이다.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밑천을 몽땅 털어 쓴 그녀들이 다시 삶을 채울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큰 재능이 없어도 된다. 사느라 바빠 놓친 것들이나 평소 배우고 싶었던 것을 골라 수강하면 된다.
이곳에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글은 잘 못써도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아서 나온다는 이도 있고 답답해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불면증에 시달려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우울감이 생겨 나왔다고 하는 윤 선생은 학창 시절에 문학소녀였다며 화려했던 과거를 펼쳐 놓았다.
첫날이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갱년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근조근 자기 이야기를 하던 윤 선생의 눈 주위가 갑자기 벌게졌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하다 말고 창밖을 바라본다. 시부모님 모시고 가족들 바라지하느라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정신 차려보니 일흔 살이 눈앞이라고 했다. 맺힌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짓쩍어 가만히 앉아 있던 이 선생도 거들었다. 남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고 자식들도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독립했는데 자기만 후퇴되고 갱년기까지 겹쳐 안 아픈 곳이 없단다.
그럴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편린들이 뒤따랐던가. 그녀들의 이야기에 다들 공감한다며 입을 보탠다. 고생을 하나도 안 해 본 것 같이 귀티 나는 김 선생은 갱년기 때문인지 자꾸 서러워지고 눈물이 난다며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갱년기를 펼쳐 놓으니 조용하던 강의실에 갑자기 열기가 가득했다. 앞다투어 자신의 경험담을 쏟아놓으니 나도 20년 전 찾아온 폐경기를 벗어나느라 고생하던 때가 생각났다.
맞벌이로 바쁘게 사느라 갱년기는 나와는 먼,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여겼다. 한데, 사십 대에 들어서면서 몸에 이상한 징조가 보였다. 매달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다. 마흔 살을 갓 넘긴 나이라 설마 생리가 끊기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서너 달이 지나도 손님은 찾아오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조기 폐경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편해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빨리 찾아온 갱년기 증상은 나를 초췌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식은땀으로 옷이 젖었다. 이유 없이 신경이 곤두서고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나, 사는 게 바빠 갱년기 때문에 힘들다고 엄살 한 번 부리지 못했다.
그렇게 갱년기도 모른 채하며 20년을 더 살고 나니 이제는 못 봐주겠다며 몸이 반기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이 신호를 보내왔다. 사흘 도래로 눈에 핏발이 서고 실핏줄이 터졌다. 안구건조증까지 심해 안과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고, 골다공증 수치도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정점에 가 있을 만큼 내 몸은 착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뼈에 구멍이 숭숭 난 사진을 보여주며 벌써 이 지경이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걷지도 못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약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으면 노년기를 불행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하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운동밖에 답이 없다고, 지금부터라도 근육을 저축했다가 나이 들면 빼먹어야 한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집에 와서 바로 실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10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했기에 자전거 타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내 자전거라고 얕볼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2단 기아를 놓고도 뻑뻑해 발구르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용을 쓰며 페달을 굴렸는지 어깨, 골반과 허리까지 아리아리했다. 조급한 마음에 무리했다가 며칠을 앓았다. 예전 같으면 몸살을 핑계 대고 바로 그만두었을 텐데 진통제를 먹으며 매일 한두 시간씩 꾸준하게 페달을 밟으며 독수리를 생각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혜롭고 현명한 독수리의 삶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평균 수명 70여 년을 사는 독수리는 마흔 살이 되면 부리가 닳고 노화되어 사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때 독수리는 먹고 지낼 먹이를 최대한 모아 놓고 부리 뽑을 결심을 한다. 30년을 더 살기 위해 닳고 낡은 부리를 쪼아 뽑아내는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다.
독수리는 최소한의 먹이로 연명하면서 노화된 부리를 바위에 쪼고 잘게 부수어 억센 발톱으로 뽑아낸다. 그 긴 고난의 시간을 견딘 자만이 다시 하늘에 왕이 된다는 것을 독수리는 이미 알고 있었고. 다시 한번 하늘을 날기 위한 최후의 도전이었으리라.
그들의 삶을 생각하니 내가 독수리만도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꺼내 쓰기만 해서 찾아온 소진증후군을 다시 채울 생각은 왜 못했을까. 이른 폐경 탓만 하며 손 놓고 지냈던 내가 매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수리의 고통에 비하면 그깟 자전거 타고 걷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도 힘들다고 툴툴거렸으니.
말 못 하는 독수리도 자기 몸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걸었다. 어떤 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운동했더니 두 달 만에 5단 기아를 올려놓고 타도 될 만큼 허벅지와 종아리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도 장년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노후의 건강이 보장되는 듯싶다. 처절한 고통을 이기고 생의 변곡점을 맞이하는 독수리처럼 갱년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성호르몬 감소가 보내는 신호에 아프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좀 봐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여 보상해 주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성싶다.
첫날, 신고식처럼 속에 쌓아둔 말을 풀어낸 그녀들의 표정이 갈수록 부드러워졌다. 부끄럽다고 꽁꽁 숨겨두었던 삶을 풀어내니 제법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완성되어 갔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어 좋다. 바람이 들어 구멍이 숭숭 난 자리가 메워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새로운 부리로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그녀들의 얼굴에도 곧 생기 넘치는 날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2024 11월 호 한국산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