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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上師): 천도교의 제4세 대도주인 춘암 상사(春菴上師) 박인호(朴寅浩)를 부르던 말.
도일기념식이란 춘암상사((春菴上師 ; 박인호)가 의암성사(손병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의 4번째 대도주(大道主)가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대도주란 천도교를 대표하고 교회 업무를 총괄하던 최고 지도자로서 오늘날의 교령과 같은 위치다.
춘암상사는 1855년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에서 탄생했고, 29세에 동학에 입도해 의관을 벗지 않고 10년간 수련했으며, 1984년 동학혁명 당시 대접주로 충청도에서 5만의 동학군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에 동참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48인의 한 분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8년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운동’도 전개했으며 1940년 86세로 환원(별세)했다.
이정희 교령은 기념사에서 “춘암상사님이 승통 이전부터 순도하시던 그 순간까지 스스로를 단련하고 교단을 지도하신 근간을 한마디로 하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 우리 천도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진리요, 대도중흥과 보국안민이라는 과제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참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이어 “우리 스승님들은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함으로써 교단의 역경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면서 “오늘 우리도 천명을 바라기 전에 인사(人事)를 다하는 정성과 공경의 자세를 회복하는 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춘암상사는 교인들에게 진실할 것과 수련에 힘쓸 것을 강조하는 말을 남겼다.
“거짓말하지 말라. 사람은 거짓말에서 죽고 참말에 사느니라.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하면 또 십 년을 공부해야 그전과 같이 되느니라.” “제 할 일 다 하고 제 잠 다 자고 도는 언제 닦겠는가?”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신 춘암상사의 생애와 말씀
심국보
도일기념특집
춘암상사의 남기신 말씀
1. 오직 생각을 잘하여라. 마음공부를 잘하여라. 말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실행이 있어라.(70.9)
2. 해월신사께서는 ‘안성 장꾼을 1주일만 꼼짝못하게 하면 조선이 난리가 날 걸’ 하셨고, 의암성사는 ‘한울이 3일 자유를 줄 날이 있다’하시었다. 서양 사람을 거꾸로 달아매면 항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77.5.18)
3. 인모(人謀)와 인심(人心)으로는 도저히 천도교 일을 못하고 천심(天心)이어야만 한다.(77.7.8)
4. 천도교를 나의 가사(家事)로 알고 믿으면 그날로 성공이다(73.9)
5. 광제창생의 계책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확신하는 것, 둘째는 한울님께 일임하는 것, 셋째는 주인(즉 내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6. 지금 세상에 도가 희미한 이때에 도를 잘 하여두면 세상사람이 찾아 올 날이 머지않다. 지금은 대단히 곤란하지만 대신사께서 춘삼월호시절이라고 늘 말씀하시던 그때가 이제는 닥쳐왔다. 굶더라도 마음만 잃지 않고 나아가면 그 자리에 도착한다.
7. 앞으로 천도교가 아니면 살길을 헤쳐나가지를 못한다. 꼭 두고 보라 도를 잘 닦으라.(73.7)
8. 사람은 유형천(有形天)인데 섬기기 쉬운 유형천인 사람을 못 섬기고 어떻게 사람이 무형천(無形天)을 섬기리요.(73.6)
9. 청년을 잘 양성하여야 된다.
10. 염념불망(念念不忘)이 즉 도(道)이다.
11. 제 할 일을 다 하고 제 잠을 다 자고 도를 언제 닦겠는가.
12. 천하 없어도 제 한울은 못 속이니라.
13. 護送 故梁芝江先生遺骸歸故山(월보63.5_지강 양한묵선생의 순국을 애도한 시)
憶曾東海上 生死誓蒼天 如今多事日 何忍獨爲仙
14. 밥 한 그릇 다 먹을 때까지 심고(心告)하면 잘 하는 심고이니라. 술좌석에 청하지 않거든 가지 말라.
춘암상사는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지금의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박인호(朴寅浩)로, 본관은 밀양이며, 초명은 용호(龍浩)라 하였고 자는 도일(道一)이며 도호는 춘암(春菴)이다. 상사의 부친은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 교육에 소홀하지 않은 덕분에 상사는 서당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상사의 성격은 온순했으나 힘이 장사였다. 덕산 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질 적에 상으로 주는 소를 끌고 가기 일쑤였다. 상사는 씨름뿐 아니라 술도 말로 마셨고 걸음도 빨라 ‘용호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갈아먹을 농토가 없어서 글줄이나 배운 덕택에 의술이나 집터, 묏자리 봐주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정의감도 대단해 동네 사람들이 일을 당하면 이를 도맡아 처리하여 신망이 높았다.
예산읍 오리장터 주막집 주인 김월화 부부에게서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와 질병이 만연한 당시의 사회를 평등한 이상적 사회로 개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상사의 삶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29세 되던 포덕 24년(1883) 3월 18일 동학에 입도하여 해월신사를 찾아 도를 배운 이후 춘암상사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목천에서 해월신사를 처음 만나 상사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입도를 하니 우리 도가 장차 크게 일어날 것이니 지극히 수련하여 도의 근본을 깨달으라.”라는 법설을 들었다.
춘암상사는 이듬해(1884년) 10월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사에서 49일 기도를 봉행하였다. 49일 기도 후 귀가해서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금하면서 10년을 정하고 독공과 연성을 행하였는데 연성동안은 잠을 잘 때는 낫자루를 베고 잠을 잤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해월신사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포덕에 정성을 쏟아 고덕면 구만리의 최병헌과 이진해, 용리의 마준성과 임세영, 덕산면 북문리의 고운학 등을 포덕하였고 예산읍의 김명배, 동읍 간양리의 박덕칠과 박응하, 종경리의 장석준, 대흥리의 차경천 등도 포덕하였다. 상사의 포덕 활동에 힘입어 상사는 수천 명의 도인과 십여 개의 포를 관할하는 대두목으로 성장하였고,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박희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춘암상사의 내포동학군, 승전곡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다
포덕34년(1893), 상사께서는 수운대신사의 신원운동인 광화문복합상소에는 의암성사를 비롯한 강시원 손천민 김연국 등과 함께 수만의 교도를 거느리고 참가하였으며 보은장내의 취회에도 덕의대접주로 많은 교도를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포덕35년 갑오년 9월 해월신사의 총기포령에 따라 내포지방에서 5만의 동학군을 지휘하여 10월 24일, 지금의 당진시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승전곡은 깊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고 그 어귀에는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판에 동학군 10여 명이 깃발을 흔들자, 일본군은 승전곡 골짜기로 전진했다. 동학군은 맹렬한 사격을 가했고 또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서풍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일본군은 면천 읍내로 퇴각했고, 동학군은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 道亦不變, 하늘은 변치 않으며 도 역시 변치 않는다)’이라고 쓴 깃발을 내세우고 당진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일본군과 붙은 첫 번째 싸움에서 춘암상사가 이끄는 동학군이 승리한 것이었다.
일본군을 상대로 한 승전곡의 승리는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과 싸워 이긴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동학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또 다른 전투는 이종훈 휘하의 동학군이 괴산에서 관군·일본군을 만나 접전을 벌였을 때로, 이종훈 휘하의 부대는 괴산읍을 점령한 뒤 논산에서 경기도·충청도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의암성사를 정점으로 대오를 정비하여 공주우금치 전투에 임한다.
또한 춘암상사는 승전곡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사흘 뒤인 10월 27에는 신례원 관작리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틀 뒤, 3만 명의 동학군이 홍주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전하여 동학군은 숱한 사상자를 남긴다.
동학 재건운동에 큰 성과를 거두다
홍주성 전투의 패배로 결국 내포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고, 상사는 도피하여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오리정 주막 김월화의 도움으로 위급을 피하고 금오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칠갑산 느티정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새우젓 장사로 위장한 도인 홍종식을 만나 동학 재건을 굳게 다짐하고 접주 장세화의 방문을 받고,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지하 포덕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충청도 교단 지도자들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 농민군 지도자들이 잡혀 죽거나 숨어 지낼 적에 춘암상사 중심의 재건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뒷날 춘암상사가 민족의 큰 지도자로 떠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후로 춘암상사는 돈을 만들어내는 수완을 발휘하여 어려운 교단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의암상사의 일본망명, 천도교로 대고천하할 때, 삼일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등에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여 후원하였다.
춘암상사가 해월신사를 비롯한 교단의 주류와 헤어져서 활동하는 동안, 해월신사는 강원도 일대에서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마침내 의암성사가 도통을 이어받았다. 신사께서 의암성사에게 도통을 전수한 사실을 알고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를 지성스럽게 모셨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보다 여섯 살 위였지만 도의 질서만 있었지 개인의 장유는 따지지 않았다. 포덕39년(1898) 1월 3일 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다. 해월신사가 흰 꿩 한 마리로 식사를 마련하여 성사와 겸상을 주었다. 상사는 두 사람이 일치하라는 묵교임을 깨닫고 식후에 의암성사에게 예를 갖추어 이후로는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의암성사는 상사의 뜻을 알았지만 6년이나 연상자인 덕의대접주가 절을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분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고 상사는 의암성사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아니하였다. 이때 해월신사가 “앞으로 덕산의 박인호는 네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의암성사에게 말하였다.
해월신사 유해를 짊어지고
포덕39년(1898) 4월 6일 해월신사가 관군에 체포되고 6월 2일에 교형을 받고 순도하였다. 해월신사의 유해는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서 이종훈과 김준식이 거두어 송파 이상하의 산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포덕41년 5월 1일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로 하여금 해월신사 유골을 운구하여 광주 원적산 천덕봉으로 이장토록 하였다. 이 때 춘암상사는 아침 일찍 상제차림을 하고 혼자서 송파로 향하였다. 해월신사 묘소에서 유해를 다시 칠성판에 모시고 칠포(관위에 붙이는 헝겊으로 옻칠을 하여 관을 싸고, 그 위에 옻칠을 다시 한다.)로 칭칭 감은 후 유지(油脂)로 싸서 등에 지고 석양이 되어 원적산으로 출발하였다. 상사는 빠른 걸음을 재촉하여 그 날 밤으로 원적산에 당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세차게 쏟아져 도저히 길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 음고개 마루턱에 있는 외딴 주막집을 발견하고 처마 끝에 신사의 유해를 모셔놓고 죽장을 집고 시립해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막집 주인이 상사의 거동을 내다보면서 ‘아무리 효자라도 저럴 수가 있느냐’면서 따뜻한 국을 야참으로 해주었다. 새벽이 되자 상사는 다시 유해를 지고 걸음을 재촉하여 원적산에 당도하자 상사를 기다리고 있던 의암성사를 비롯한 근처에서 모인 동학도들이 울분과 비통을 삼키면서 유해를 안장하였다.
제4세 대도주가 되시다
포덕41년(1900) 3월 10일 상사는 성사로부터 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4월 23일 의암성사가 지평군(지금의 양평군 지평면) 이종훈 집에서 문도들에게 “일찍이 해월선생 말씀에 사람이 곧 한울이요 도시 대선생주 무극대도라 하신 명교에 의하여 마땅히 양위선생 앞에 입도식을 거행함이 옳다.”하고 입도문을 지은 후 춘암상사로 하여금 입도의식을 행하게 하였다. 이때 상사가 “어찌 손천민으로 하여금 입도케 하지 아니하고 소인에게 먼저 명하시니까?”하고 묻자, 의암성사는 “이는 한울님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 하였다.
7월에는 의암성사와 함께 경북 풍기로 이주하였다. 7월 20일 이곳에서 의암성사는 스스로 북접법도주가 되고 김연국을 신도사, 손천민을 성도사, 그리고 박인호를 경도사(敬道師)로 정하였다. 그 후 포덕 42년(1901)에는 경도주(敬道主)가 되었고, 교장(敎長), 중앙총부 고문, 금융관장, 경도사 등의 직책을 두루 지냈다. 포덕 48년(1907) 12월 10일 천도교의 차도주가 되었다가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大道主)의 도통을 선수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대도주가 된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 확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강점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하여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의 뜻을 받들어 출판문화와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부설로 당시로서는 최신형 인쇄소를 설치하여 천도교가 문화운동을 주도해 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는가 하면, 사회 성인교육의 일환으로 전국에 800여 개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여 민족 교육에 앞장서게 된다.
3·1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하시다
춘암상사는 3·1 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중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민족 대표에서는 빠졌지만, 48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1년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신다. 포덕 63년(1922) 5월 19일 의암성사가 환원하신 이후, 6·10만세운동, 신간회 운동 등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침범하는 등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던 포덕 79년(1938), 지방의 교역자들을 불러 일제 패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이것이 곧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운동이다. 그 후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천도교를 지켜오다가, 포덕 81년(1940) 4월 3일 환원하였다. 향년 86세였다. 춘암상사의 영결식은 4월 7일 10시에 중앙대교당에서 거행하였고 장지는 갈현동이었다.
당시 최린은 친필로「天道敎第四世敎主法宗春菴上師 朴寅浩之墓」라고 쓴 지석을 묘정에 묻었다. 갈현동에 있던 묘소는 포덕105년 3월 28일 포천군 무봉리로 이장하였고, 포덕107년 4월 3일 환원 제36주기를 맞아 중앙총부에서 묘비를 건립하였으며 124년 5월 7일에는 탄생지에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포덕131년(1990)8월 18일 정부는 춘암상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울님께 기도하라.[62.4.1 가회동 자택에서 지방 두목들에게 한 설법]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성사께서 평소에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사께서는 가르침의 으뜸이 되는 뜻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진리를 선언하시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처럼 뒤에 오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하셔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절대로 나를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몸에 한울님을 모시었으니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버리고 어찌 먼 곳에서 찾으려 합니까?"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 해월신사께서는 또 다시 대신사의 으뜸 되는 가르침을 이어 받으셔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을 섬기듯이 하라" 하시고 조상님께 제사를 지낼 때에 나를 향하여 제물을 차리는 설법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다음에 의암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신사께서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라고 하시면서 "대신사님의 신령하신 기운을 내 마음에 정하오니 다함없는 조화가 오늘 나에게 이르소서(神師靈氣我心定無窮造化今日至)라는 진실한 간청의 글을 지으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또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스승에 대하여 숭배는 할지라도 스승에게 의뢰하지는 마시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세분 스승님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스승님들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으뜸이 되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느라고, 다시 말하면 우리 스승님들께서 다음에 이 세상을 살아갈 무수한 생명들이 잘 살아가는 길을 열어 주시느라고 그 엄청난 고난을 겪으셨으며 마침내 그분들은 그 고귀한 목숨까지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은덕을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기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우리 스승님들이 한울님의 도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그 은덕 때문에 우리가 스승님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을 함에 있어서 한울님의 도에 대한 가르침을 신앙하여야 올바른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각 생각하여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믿기를 "우리의 스승님께서는 성령으로나 육신으로써 우리의 모든 희망을 어느 때인가는 모두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하여 스승님만 믿고 의뢰할 것 같으면 이것은 우리 성사께서 말씀하신바 "여러분이 모두 대신사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대신사의 일을 하지 못하면 여러분 스스로의 자격을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의 본래의 뜻을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자격을 모두 포기할 지라도, 그리하여 스승님만 믿어서 우리의 희망을 모두 이룰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봄비가 아무리 만물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뿌리가 없는 나무는 꽃을 피우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스승님의 덕이 아무리 두터울 지라도 자기가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복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스승님만 믿는 것이 또 스승님만 의뢰하는 것이 옳지 못한 이유는 우리 스승님도 육신을 가지셨고 육신은 길어야 백년 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이 가르치신 천도교는 길이 5만년 동안 이어갈 위대한 종교이니 리가 천도교를 믿어야지 스승님만을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우리 성사의 이런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사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우리 교의 일반 신도들이 각각 우리 대신사께서 깨달으신 그 자리만 다 같이 깨달으면 온 세상에 덕을 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운 일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가 각각 대신사와 같이 깨달아서 모두 대신사와 같은 경지에 나가게 되면 세계의 모든 생명을 건지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자신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도교를 믿지 않을 지라도 내가 있으니까 천도교는 반드시 오만 년을 갈 것이다."라는 적어도 이 정도의 자신과 자각만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천도교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스승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도를 좀 닦아야 합니다. 닦아서 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이런 말을 하니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우리 선생님이나 나는 청수를 모시고 기도를 할 때는 언제든지 반드시 내 몸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께만 기도를 하였지 결코 신사님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가 스승님을 대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스승님들이 평생에 지니셨던 도덕적인 인격을 그대로 배우는 것이 제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였고 또 평생토록 쌓으신 공덕을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도리일 뿐이라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 사업을 잘하고 잘하여서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이 모신 한울님께 빌어야 할 뿐이지 이미 당신들의 하실 일들을 다 하시고 돌아가신 스승님들께 또다시 해 달라고 비는 것은 공연히 우리의 의뢰심만 기를 뿐 아무 실속이 없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78.3.12)
교인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는가?
지금 교세를 보면 재정이 미흡하여 교세가 미약한 것 같으니까, 도가 없는 줄 알고 신앙이 미약한 사람도 혹 있겠으나 절대로 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가 없게 되면 한울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한울, 즉 천지가 없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한울이 없으면 나도 없고 세상 또한 없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아무리 용렬하다고 하지마는, 나는 물질에 절대로 욕심이 없다. 참으로 나는 홀로 기쁘고 좋은 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참으로 때와 시기에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여간 기쁘지 아니하다. 우리 교회로 말하자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때와 시기를 맞이하리니 물질과 과학과 사회적 관념에 이끌리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수도하라.
한신이가 대장이 되니 한나라 사람들이 대경(大驚)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교인도 불의에 도통하는 자가 속출하리니. 사람을 속이지 말라. 거짓말을 한번 하면 십년공부가 무효가 되며 또 십년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무슨 음식이든지 먹을 때에는 “생각하시는 모신 내 한울님이 본래 오신 한울님을 받드셔서 먹고 굴신 동정하는 것이 곧 나인 줄을 투철히 깨달았으므로 생각하시는 모신 내 한울님의 은혜를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하고 식고의 이치를 알고 염념불망하면 도통이 그 중에 있느니라.
천하만사는 생각과 실제가 다르니라. 성패득실은 진리에 맡겨두고 결과를 짓는 데는 실행이 있어야 되느니라. 실행이 없는 결심은 공상이고 결심이 없는 실행은 요행이니라. 천만 죄악은 공상과 요행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우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진리, 그것 때문에 일생을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성공이요, 진리가 아닌 성공은 영원한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니 현명한 동덕들은 길이길이 인식할 지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마치 손으로 물건을 쥐고 있는 것과 같으니, 손에 든 물건을 놓으면 그 물건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울님의 간섭과 영기 중에서 사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