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사강의(經史講義) 9 ○ 논어(論語) 2 계묘년(1783)에 이현도(李顯道), 정만시(鄭萬始), 조제로(趙濟魯), 이면긍(李勉兢), 김계락(金啓洛), 김희조(金煕朝), 이곤수(李崑秀), 윤행임(尹行恁), 성종인(成種仁), 이청(李晴), 이익진(李翼晉), 서형수(徐瀅修), 심진현(沈晉賢), 신복(申馥), 이유수(李儒修), 강세륜(姜世綸) 등의 대답을 뽑았다
안연(顔淵)
이 장은 《집주》에 정자가 “성인의 말씀은 여기에만 그쳐도 옳은 것이다.[聖人之言 止此爲是]”라고 하였다. 말을 참는 것[訒言]을 인(仁)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인도(仁道)의 전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다만 부자가 그 병통을 인하여 말해 준 것이니, “여기에만 그쳐도 옳은 것이다.”라는 것이 성인의 본의가 아니겠는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인도(仁道)는 지극히 커서 본디 ‘말을 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치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온전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그 작은 것에 나아가면 전체의 큰 것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정자가 ‘여기에만 그쳐도[止此]’라고 한 가르침은 이 때문에 꺼낸 말입니다.
군자(君子)는 덕(德)을 완성한 명칭이다.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음[不憂不懼]’이 과연 충분한 것인가? 맹자는 “군자는 죽을 때까지 하는 근심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근심을 하는 이유야 비록 같지 않을 듯하나 근심을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혹은 근심하지 않는 것을 군자라고 하고 혹은 죽을 때까지 근심하는 것을 군자라고 하니,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덕을 이룬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개 그 이(理)가 사(私)를 누를 수 있기 때문에 근심을 아니하는 것이요, 기(氣)가 도의(道義)에 짝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는 근심’의 근심은, 이것을 스스로 떠맡아 오직 잘 해내지 못할까 염려함을 이르는 것이니, 근심하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서로 방해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가까운 이를 친애한 뒤에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뒤에 사물을 아끼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인도(仁道)의 시행에 차등이 있음인데, 지금 “사해(四海) 안이 모두 형제이다.”라고 하면 묵자(墨子)의 겸애(兼愛)에 가깝지 않겠는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자하(子夏)의 말은 단지 사마우(司馬牛)의 근심을 풀어 주려고 한 것인데, 말에 실로 병통이 있기 때문에 《집주》에 ‘여(如)’ 자 하나를 붙여서 그 병폐를 바로잡았고, 그 아래에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도 또한 본래의 뜻을 깊이 찾아보자는 의논입니다.
자장이 명(明)을 물었는데 부자는 명(明)과 원(遠)으로 답하였다. 원(遠)이라는 것이 ‘명(明)의 지(至)’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보면, 명(明)이라는 한 글자는 본디 위아래로 두루 통하는 것인데, 지금 굳이 명(明)과 원(遠)을 짝으로 들어 서로 번갈아 말하여 마치 두 가지 공부인 것처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자장(子張)이 명(明)을 탐구하는 공부가 매양 고원(高遠)한 곳에 있고 도리어 가까운 곳에서 가리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자가 아주 가까워서 가리어지기 쉬운 곳으로부터 하나의 원(遠) 자를 말하여 그 병통을 치료한 것입니다. 대개 명(明)은 곧 원(遠)의 뿌리이고 원(遠)은 곧 명(明)의 끝이니, 어찌 명(明) 자 이외에 다시 원(遠) 자의 공부가 있겠습니까.
정(政)이라는 것은 예악(禮樂), 병형(兵刑), 전장(典章), 문물(文物)이 이것인데, 부자가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으로 자공(子貢)의 물음에 답하였으니, 이는 전국(戰國) 시대의 부국강병(富國強兵)의 학설과 무슨 분별이 있는가? 은로(殷輅), 주면(周冕), 하시(夏時), 소무(韶舞)는 참으로 자공(子貢)이 미칠 바가 아니지만,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을 한 뒤에는 반드시 교육이 있어야 바야흐로 ‘부유해지면 가르쳐야 한다[旣富又敎]’는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데, 지금 단지 족식과 족병만으로 정(政)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선유는 “이 장의 세 구절은 바로 한 부(部)의 《주례(周禮)》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리(田里)를 제도화하고 부렴(賦斂)을 적게 하여 창고가 채워지고, 군대를 정비하고 때맞춰 검열을 하여 무비(武備)가 닦여지면, 이른바 예악, 병형, 전장, 문물이라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절목(節目) 안의 일이 아닌 것이 없고 실제도 또한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교화(敎化)를 시행함은 본디 병(兵)과 식(食)의 근본인데, 선유는 두 항목이라는 학설과 세 항목이라는 학설로 의논이 여러 갈래였습니다. 세 항목이라는 학설을 따른다면 ‘부유해지면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에 참으로 딱 맞고, 비록 두 항목이라는 학설로 말하더라도, 육씨(陸氏)가 이른바 ‘병(兵)과 식(食)을 갖추기 전에 백성을 인도하고 병과 식을 갖춘 뒤에는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이 참으로 정밀하고 요약된 말인데, 주 부자가 교화의 근본을 미루어서 찾아서 백성들이 신뢰를 가지게 되는 증거를 삼은 것이지 병과 식을 갖추는 일만을 하면 백성들이 곧 믿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장은 《집주(集註)》에서, 문(文)과 질(質)에 차등을 두지 않은 것을 가지고 둘 다 잘못된 말이라고 하였는데, 부자(夫子)가 일찍이 이르기를, “질(質)이 문(文)보다 많으면 야(野)하고 문이 질보다 많으면 사(史)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문과 질을 나란히 들어서 그 차이를 허용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자공(子貢)의 말은 근본이 있는 것 같은데 주자가 배척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면긍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은 두 승(勝) 자를 나란히 거론하여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해를 경계한 것이지만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한 구절은 질(質) 쪽에 무게가 있는 것이고, 자공(子貢)의 말은 두 유(猶) 자를 섞어 말하여 나란히 행해져야 함을 밝힌 것이지만 호표견양(虎豹犬羊)이라는 말에는 문(文) 쪽에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자가 배척한 까닭입니다.
철(徹)의 제도를 지금 널리 상고하여 상세히 말할 수 있는가? 주자는 이르기를, “여덟 집이 힘을 모아 900묘(畝)의 논밭을 함께 경작하여, 수확을 하면 넓이를 계산하여 균등하게 나누어서 나라에서 그 하나를 가져가고 백성들이 그 여덟을 가져간다.”고 하였는데, 후대의 학자는 《춘추전(春秋傳)》의 ‘곡식을 세금으로 내는 것은 공전(公田)을 경작한 것 이외에는 없다[穀出不過藉]’는 말을 인용하고, “자(藉)가 바로 조법(助法)이니, 두예(杜預)가 이른바 ‘백성들의 노동력을 빌려서 공전(公田)을 경작한다’는 것이다. 곡록(穀祿)을 내는 것이 이 숫자를 넘지 않기 때문에 불과(不過)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조(助)라는 것은 자(藉)이다’의 자(藉)이니, 철(徹)은 바로 조(助)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본디 자(藉)를 철(徹)이라 이름하였다. 《공양전》과 《곡량전》에도 다 ‘10분의 1로 하여 공전을 경작했다.[什一而藉]’라고 하였는데 모두 별다른 뜻이 없다. 철(徹)이라고 이름 붙인 의미는, 공(貢)과 조(助)를 통(通)하고 안과 밖이 통하고, 그리고 천하에 두루 행해진다는 것일 뿐이다. 만약 노동력을 공통으로 쏟고 농지의 면적을 통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면, 공전(公田)과 사전(私田), 안과 밖을 모두 세우지 않아도 되고, 저 면적도 결국은 같아지니 설치하지 않아도 되며, 단지 900묘만 통계하여 하나의 구역을 만들어서 경작하고 수확하면 되는 것이니, 그 말이 맞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 학설이 또한 곡진히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계락이 대답하였다.]
장횡거(張橫渠)의 정지(井地)에 대한 의논과 호오봉(胡五峯)의 철전(徹田)에 대한 학설이 비록 모두 자세하기는 하지만 서로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주 부자가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는 글에 “정전법(井田法)은 여러 학설을 상고해 보아도 합치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의 학자들에 이르러서는 의논들이 더욱 여러 갈래여서, “철(徹)과 조(助)는 전혀 분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신은 견문이 좁아 상고한 바도 이미 없으니, 더구나 어찌 감히 갑자기 그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장(子張)이 물은 것은 변(辨) 자에 무게가 있는데, 부자가 답한 것은 혹(惑) 자에 무게가 있으니, 질문한 본래의 뜻에 안 맞는 듯하다. 그에 대한 설명을 해 보라.
[신복이 대답하였다.]
그 혹(惑)의 까닭을 알면 변(辨)하는 방법은 본디 또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잘 계발(啓發)시키는 곳입니다.
이 장은 다만 군신(君臣), 부자(父子)만 말하고 부부(夫婦)를 빠뜨렸으니, 삼강(三綱)에도 오히려 그 조목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경공(景公)이 어떻게 성인(聖人)의 말 밖의 뜻을 알아서 정치에 시행할 수가 있겠는가. 부자가 사람을 가르침은 마치 화공(化工)이 사물의 모양대로 형체를 그리는 것[隨物賦形]과 같은데, 지금 경공에게 대답하기를 이와 같이 은미하게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성인의 말은 그 하나를 들어 그 셋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가 바른데도 부부(夫婦) 사이가 바르지 못한 경우는 없습니다. 더구나 경공(景公)은 이미 첩(妾)이 많은 데다 또한 후사(後嗣)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 부자(父子) 사이의 도리를 잃은 것이 오로지 부부(夫婦) 사이가 바르지 못한 것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부(父父), 자자(子子) 가운데에 이미 부부(夫夫), 부부(婦婦)의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대학(大學)》에, “청송(聽訟)은 나도 남만큼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본말(本末)을 풀이하였으니, 대개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반 마디 말에 옥사를 결단한다.”는 것으로 자로(子路)를 허여하였으니, 거칠고 속된 자로도 또한 본말을 아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대학》의 청송장(聽訟章)은 대개 사무송(使無訟)으로 지본(知本)을 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로가 비록 옥사의 결단은 잘하였더라도, 아직은 청리(聽理)할 만한 송사가 있었으니, 아마 본말을 아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무릇 정(政)을 말한 것은 모두 일로써 말하였는데, 자장(子張)의 질문에 부자가 정치를 하는 마음으로써 대답한 것은 어째서인가?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선유(先儒) 가운데 이 장을 논한 자가 이르기를, “이는 정치를 하는 마음만 논하고 정치를 하는 절목은 말하지 않은 것이니, 대개 정치를 하는 절목은 자장(子張)이 필시 이미 익숙히 강구하여, 말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의논은 안회(顔回)나 증자(曾子)에게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자장에게는 맞지 않을 듯합니다. 단지 자장의 사람됨이 문(文)이 많고 질(質)이 적었기 때문에 부자가 무본(務本)의 뜻으로 말해 준 것이니, 바로 이것이 병세에 딱 맞는 좋은 처방이 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미(美)와 악(惡)이 이루어지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진 자인지 불초한 자인지에 달린 것이다. 임금이나 스승의 책무를 맡은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비록 군자(君子)의 덕(德)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다른 사람의 미(美)를 이루어 줄 수 있겠는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이 장의 뜻은 마땅히 존심(存心)으로 보아야지 성효(成效)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록 크고 작음은 같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몸에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을 이루어 주는 방도가 없겠습니까. 다만 임금이나 스승의 책무를 맡은 사람은 미치는 바가 넓을 따름입니다.
위 글에서는 부정(不正)을 말하고 아래 글에서는 불욕(不欲)을 말하였다. 정(正)과 욕(欲)이 일에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마음에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욕(欲)이란 것은 칠정(七情) 가운데 하나이니 마음으로써 말한 것이고, 정(正)이란 것은 온갖 법도의 곧음[貞]이니 일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장(章)은 뜻이 사실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정(正)과 불욕(不欲)은 모두 마음속에 존재하여 일에 드러나는 것이니, 어느 한쪽에만 소속시켜서 보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그대가 선(善)을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善)해진다.”는 것은 교화(敎化)가 절로 시행됨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니, 강자(康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닐 듯한데, 부자가 이렇게 고해 준 것은 어째서인가?
[조제로가 대답하였다.]
부자가 강자(康子)에게 고한 것은, 강자에게 고한 것이 아니라 대부(大夫)에게 고한 것입니다. 대개 교화가 저절로 흘러 행해짐은 비록 강자가 미칠 바가 아니더라도,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실로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없으니, 부자가 고해 줌이 절로 극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성인(聖人)은 가벼이 사람을 끊어 버리지 않으니, 어찌 반드시 먼저 강자를 불능(不能)이라고 제쳐 두고 안 고해 주겠습니까.
자장(子張)이 문(聞)을 달(達)로 여겼다면, 그가 물은 달(達) 자에 대해서는 아마도 물은 바의 본래의 뜻으로써 풀이해 줘야 마땅할 것 같은데, 《집주(集註)》에 달(達) 자의 바른 뜻으로 풀어놓은 것은 어째서인가?
[강세륜이 대답하였다.]
주자(朱子)가 만약 명예저문(名譽著聞)으로 달(達) 자를 풀이했다면, 이는 문(聞)을 풀이한 것이지 달(達)을 풀이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 글자를 따라서 그 뜻을 풀이하는 것이 바로 주자가 경(經)에 주석을 다는 근본 취지입니다.
애인(愛人)이 참으로 인(仁)이기는 하나 인(仁)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고, 지인(知人)이 참으로 지(知)이기는 하나 지(知)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다. 성인이 어찌 그 전체(全體)를 들지 않고 단지 그 하나의 일만을 말하였는가? 그리고 번지(樊遲)의 물음은 인(仁)이 지(知)보다 먼저인데 부자(夫子)가 이른바 거직조왕(擧直錯枉)은 지(知)가 인(仁)보다 먼저인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부자가 일찍이 인(仁)을 물은 번지(樊遲)의 물음에 ‘선난(先難)’이라고 하고 ‘거처공(居處恭)’이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이것을 ‘철상철하(徹上徹下)’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을 비록 전체(全體)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번지가 인(仁)을 지(知)보다 앞세운 것은 덕(德)의 순서이고, 부자가 지를 인보다 앞세운 것은 학(學)의 순서이니, 위주로 말한 것이 또한 같지 않습니다.
‘잦으면 멀어진다[數斯疏]’는 뜻으로 말하자면, 본디 ‘안 들으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욕을 당하지 않아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붕우(朋友)는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처음에 충고를 했다가 안 듣는다는 이유로 곧바로 멈추면, 어디에 그 곧고 성실한 친구로서의 도리가 있겠으며, 비위나 맞추는 친구에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윤이(倫彝)가 펴지는 것이 반드시 붕우의 도움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 충고를 아니할 수는 없으나, 저가 이미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에 도리어 나를 멀리한다면 저가 실로 스스로 붕우의 의리를 끊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욕을 당하겠습니까? 곧고 성실한 도리가 참으로 그 안에 있는 것이니, 신은 그것이 비위나 맞추는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유(先儒) 가운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강학(講學)을 먼저 하고 회우(會友)를 나중에 한다.”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강학은 반드시 사람들과 더불어 강(講)해야 하지 단지 자기 혼자서 강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두 학설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강학에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에게 각고(刻苦)의 공부도 없이 갑자기 남의 말만 들으면 입으로만 지껄이는 자료가 되는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이미 열심히 하였는데 절차탁마의 보탬이 없다면 고루하고 편협하여 덕을 진취시키고 학업을 닦아 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강학을 먼저 하고 회우를 나중에 한다는 것과 사람들과 더불어 강을 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학설 모두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위는 안연편(顔淵篇)이다.
[顔淵]
此章集註。程子以爲聖人之言。止此爲是。夫訒言。謂之仁中之一事則可。謂之仁道之全體則不可。此特夫子之因其病而告之。則止此爲是者。得非聖人之本意歟。種仁對。仁道至大。固不止乎言之訒也。然理無大小。莫非其全。故卽其小。而全體之大無不在焉。程子止此之訓。爲是而發也。君子。成德之名。不憂不懼。果足以盡之耶。孟子曰。君子有終身之憂。所以憂之者。雖似不同。而爲憂則一也。或以不憂爲君子。或以終身憂爲君子。何歟。種仁對。不憂不懼。非成德不能也。蓋其理足以勝私。故不憂。氣足以配道義。故不懼。若終身憂之憂。以是自任。惟恐不克之謂。非憂愁悶歎之意。恐不當以是而疑其相妨也。親親而仁民。仁民而愛物。此仁道之施有差等。而今 曰四海之內。皆兄弟。得無近於墨子之兼愛歟。種仁對。子夏之言。只欲寬牛之憂。而語實有病。故集註著一如字。以捄其弊。而其下。不以辭害意云者。亦原情之論也。子張問明。而夫子以明與遠答之。遠者不過明之至。則明之一字。固足以徹上徹下。今必以明與遠。對擧而互言之。若兩項工夫者。何歟。翼晉對。子張求明之工。每在高遠之地而不知反。蔽於近。故夫子從極近而易蔽處。說箇遠字。以醫其病。蓋明乃遠之本。遠乃明之極。豈於明字之外。 更有遠字工夫耶。
政者。禮樂兵刑典章文物是也。而夫子以足食足兵。答子貢之問。此與戰國富强之說。有何分別耶。殷輅周冕夏時韶舞。固非子貢之所及。而足食足兵。然後必有以敎之。方不悖於旣富又敎之訓。今但以足食足兵爲政者。何歟。翼晉對。先儒謂此章三句語。是一部周禮。蓋制田里薄賦斂而倉廩實。比什伍時𥳑閱而武備修。則所謂禮樂兵刑典章文物。無非節目間事。而實亦在其中矣。至於敎化之行。固是兵食之本。而先儒 以兩項說三項說。議論多端。若從三項說。則允合旣富又敎之訓。雖以兩項說言之。陸氏所謂導民於兵食之前。化民於兵食之後者。儘是精約。而朱夫子推原敎化之本。以爲民信之證。非謂只事兵食而民便信之也。此章集註。以文質之無所差等。謂之胥失。而夫子嘗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此以文質對擧。而明其不容軒輊也。然則子貢之言。似有所本。而朱子斥之。何歟。勉兢對。聖人之言。對擧兩勝字。戒偏失之害。而文質彬彬一句。重在質邊。子貢之言。混言兩猶字。明竝行之義。而虎豹犬羊。重在文邊。此朱子之所以斥之也。徹之爲制。今可博考而詳言歟。朱子云。八家幷力。合作九百畝田。收則計畝均分。公取其一。私取其八。而後儒引春秋傳。穀出不過藉。以爲藉是助法。杜預所謂借民力以耕公田。穀祿所出。不踰此數。故曰不過。此正孟子助者藉也之藉。則徹仍是助。是以當時固以藉名徹。公羊,穀梁。亦俱曰什一而藉。竝無他義。而至其名徹之義。通貢助通內外。與通行天下是已。若 謂之通力計畝。則公私內外。皆可不立。夫畝終同。皆可不設。而但通九百畝。作一區。治之收之可也。此其說。不亦曲有依據乎。啓洛對。張橫渠井地之論。胡五峯徹田之說。雖皆詳備。而自相逕庭。故朱夫子答人之問。有曰。井田之法。考之諸說。未有悉合。至近世儒者。則議論尤多歧貳。謂徹與助。更無分別。如臣謏見。旣無所考。尤何敢遽決其得失乎。子張之所問者。重在辨字。而夫子之所答者。重在惑字。恐非所問之本意。須陳其說。馥對。使知其所以惑者。則辨之之道。固亦卽此乎在。此聖人善啓發人處。此章。但言君臣父子。而夫婦亦且遺却。則其於三綱。尙不能盡其目矣。景公。何以得聖人言外之旨。而以施於有政歟。夫子敎人。如化工之隨物賦形。而今於答景公。若是其微發。何也。馥對。聖人之言。擧其一而該其三。未有君臣父子正。而夫婦不正者也。况景公。旣多內嬖。又不立嗣。其失父子之道者。專由於夫婦之不正。則父父子子之中。已帶得夫夫婦婦之義矣。大學。以聽訟之猶人。釋本末。蓋惟聖人能之。而今以片言折獄。許子路。則子路之喭。而亦能至於知本末之域歟。馥對。大學聽訟章。蓋以使無訟爲知本。則子路雖善於決獄。猶有訟之可聽。恐未造乎知本末之域矣。凡言政者。皆從事爲上說。而子張之問。夫子以爲政之心答之。何歟。瀅修對。先儒之論此章者。以爲此論爲政之心。而不及爲政之目。蓋爲政之目。則子張必已熟講。而無待於言。臣恐此論在顔,曾則可。在子張則未可也。只緣子張爲人文多質少。故夫子以務本之意告之。正爲是對證之良方故也。人之美惡成毁。在其人之賢不肖如何耳。如非任君師之責者。已雖有君子之德。將何以成人之美耶。崑秀對。此章之旨。當以存心看。不當以成效看。而雖大小不同。一人之身。亦豈無成人之道耶。特任君師之責者。所及也廣爾。上章言不正。下章言不欲。正與欲。指在事而言歟。指在心而言歟。行恁對。欲者。七情之一。以心言也。正者。百度之貞。以事言也。然此兩章義實相關。正與不欲。皆存諸中而形諸事。則恐不當偏屬一邊看。子欲善而民善。此主敎化之自行者言。則恐非康子之所及。而夫子告之如此。何也。濟魯對。夫子之告康子。非告康子。所以告大夫也。夫敎化之自然流行。雖非康子之所及。治國之道。實未有外此者。則夫子之告之。自不容不盡。况聖人不輕絶人。豈必先處康子於不能而不以告哉。
子張認聞爲達。則其所問之達字。恐當以所問之本意釋之。而集註釋以達字之正義。何也。世綸對。朱子若以名譽著聞。訓達字。則是所以訓聞也。非所以訓達也。隨其字而釋其義者。卽朱子註經之本旨也。愛人。固是仁也。而仁中之一事也。知人。固是知也。而知中之一事也。聖人何不擧其全體。而只言其一事耶。且樊遲之問。則仁先於知。而夫子所謂擧直錯枉。則知先於仁。何也。種仁對。夫子嘗答樊遲之問仁。曰先難。曰居處恭。而程子云徹上徹下。則今此愛人知人。雖謂之全體。未爲不可。至於樊遲之仁先於知。德之序也。夫子之知先於仁。學之序也。所主而言者。亦自不同。以數斯疏之義言之。則固當不可則止。無自辱焉。而朋友居於五倫之一。始旣忠告。而以其不可。便卽止之。則烏在其爲直諒之道。而不幾近於善柔乎。種仁對。倫彝之叙。必資於朋友之輔。則不得不忠告。彼旣不能受用。而乃反疏我。則彼實自絶於朋友之義。吾何辱焉。直諒之道。固在其中。而臣不見其爲善柔也。先儒或曰。先講學後會友。或曰。講學必與人講。不是只自家講。兩說孰優。種仁對。講學有道。在我無刻苦之工。而遽聞人言。則不過爲口耳之資。然用工旣勤。而無切磋之益。則固陋淺狹。無進修之路。先講學後會友。與夫與人講。兩說俱不可廢。以上顔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