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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특집)_포지션
루이스 그릭,
한국 서정시에 건네는 질문
양 균 원 (시인, 대진대 영문과 교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표기에 혼란이 있다. Glück은 모음 ‘u’에 움라우트가 찍혀 있어서 ‘그뤽’으로 소리 날 듯하지만 시인 자신은 [glick]으로 발음한다. 이것을 ‘글릭’으로 표현하면 자음 ‘ㄹ’이 첫 음절의 종성과 둘째 음절의 초성에 사용되어 분절이 강화된다. 반면에 ‘그릭’은 첫 음절에 받침이 없어서 둘째 음절에 쉽게 연음된다. 영어에서 [glick]은 음절이 한 개이고 [gl]는 한 묶음의 초성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외국어 고유명사는 그 원래 음가를 살려주는 게 옳다. Louise는 ‘루이즈’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다. ‘스’와 ‘즈’ 중 무엇을 택하느냐, 해묵은 논쟁이다. 모음 다음에 오는 ‘s’는 유성음이어서 ‘ㅈ’가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 귀에는 ‘ㅅ’에 가깝게 들린다. 내게는 윌리엄즈보다 윌리엄스가, 스티븐즈보다 스티븐스가 더 실제에 가깝게 들린다.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지면을 낭비한다 싶겠지만 시인에게는 머리보다 귀가 더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필자 주
I.
저널리즘은 요약을 추구한다. 몇 줄로 시원하게 정리해주는 것이 최상의 글쓰기라고 간주한다. 시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런 요구에 본능적으로 저항해야한다. 올해의 노벨문학상이 발표되자 여러 언론사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았다. 몇 통화 연속으로 하던 중에 하나같이 수상자 루이스 그릭(Louse Glück)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시 세계가 무엇인지 꿰뚫어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나로서는 이것저것 설명하다가 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나도 확실하게 모르는 사람의 생애와 시 세계를 어찌 몇 분에 요약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줄곧 해온 일은 축약에 반(反)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자에게 가장 쉬운 접근은 저널리즘을 통해 이뤄진다. 학술적으로 다뤄진 논문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 시를 온전하게 감수하는 데는 이 둘 다 부족함이 있다. 저널리즘은 짧게 줄이면서 행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많은 것을 배제해버린다. 학술적 글쓰기는 논지에 준하여 시를 토막 내는 경향이 있어 그 무엇을 들출 수는 있지만 시, 시인을 실체적으로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시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그 시의 특이지점들을 통해 시인의 숨결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시를 쓰는 데서도 그렇지만 읽는 데서도 서두름은 가장 경계해야할 태도일 것이다.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그릭은 1943년생 미국 여성 시인이다.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하지만 그릭은 미국 내에서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볼링겐상 등을 수상했고 미국 계관시인을 지낸 바 있어서 상당히 잘 알려진 시인이다. 노벨문학상은 시집이 아니라 시인에게 주어진다. 시인의 전 생애, 그 모든 작품 활동에 대해 평가가 이뤄지는 상이다. 계간지 『포지션』의 지면에서는 그릭의 2014년도 전미도서상 수상집 『충직(忠直)하고 고결(高潔)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에 주목한다. 시인을 전반적으로 요약하기보다는 수상 시집 중에서도 표제시 한 편에 집중하여 완역한다.
외국시를 통째로 번역하고 원문과 함께 제공하는 것은 독자에게 시 실체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면서 옮김의 한계를 노출하기 위해서이다. 나로서는 번역으로 원문을 대체하거나 특히 시인을 몇 문장으로 규정할 의도가 없다. 오히려 내 좁은 시각과 굳은 감각이 그이의 시 한 편으로 끝없이 흔들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상의 독자는 번역과 원문을 함께 읽어주는 독자이다. 어떤 독자는 원문에서 놓쳤던 것을 번역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다른 독자는 번역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을 원문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짧은 평설을 덧붙이는 것은 우리말로 옮기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원문의 감각과 의미를 보충하려는 시도이다.
표제시가 장시여서 가독성을 위해 여러 부분으로 나눠 제시한다. 여러 연들이 한 묶음으로 다뤄질 수 있고 묶음에 따라서는 짧은 평설이 개입될 수 있다. 원문 전체와 번역 전체를 각각 묶음으로 제시하지 않고 이렇게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엇갈리게 배치하는 것은 번역과 원문을 함께 읽어가는 전체적 흐름을 원해서이다.
II.
충직(忠直)하고 고결(高潔)한 밤
Faithful and Virtuous Night
난 말할 수 있었고 행복했어요―내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아주 간단해요.
또는, 난 말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행복했어요―이럴 수 있겠죠.
또는, 난 행복했어요, 그래서 말을 했죠―이럴 수도 있겠네요.
난 어둔 방을 통과하는 한 줄기 밝은 빛과 같았어요.
시작하는 일이 그토록 힘들다면, 끝나는 일은 어떠할까 생각해보세요―
내 침상에서, 채색된 범선들이 인쇄되어 있는 홑이불은
(탐험의 형식으로) 모험의 환상을, 동시에, 요람처럼 부드러운
흔들림의 감각을 전달했지요.
My story begins very simply: I could speak and I was happy.
Or: I could speak, thus I was happy.
Or: I was happy, thus speaking.
I was like a bright light passing through a dark room.
If it is so difficult to begin, imagine what it will be to end―
On my bed, sheets printed with colored sailboats
conveying, simultaneously, visions of adventure (in the form of exploration)
and sensations of gentle rocking, as of a cradle. (8)
시의 목소리가 시인 화자로 통일되어 있다고 치자. 그이는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막 꺼내면서 시작에 대해 그리고 이와 연관하여 끝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세를 취한다. 시작은 구체적 사건의 발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관한 명상으로 채워진다. 그만큼 시작(始作)의 시적(詩的) 상징성이 중요해진다. 어떤 시작은 시인이 시도하는 모든 의미 있는 일들의 근원을 뜻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모든 이야기의 이유와 목적에 연결되는 원천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일생을 통해 시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시작의 정반대에 위치한 끝 또한 궁극적 성취가 지속적으로 늦춰진다면 맨 나중의 시작에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끝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지나온 경험을 살피고 앞을 내다볼 수 있겠으나 함부로 꿈꾸거나 미리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는 지금의 동력이 사라질 수 있으므로, 과거에 시작했으나 여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모종의 시작에 대해 결의를 다지는 게 중요할 수 있다. 아니, 근원적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억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도전이어서 차라리 살아온 대로 이어지다 그렇게 마감하게 될 끝을 말하는 일이 더 쉬울 수 있다. “시작하는 일이 그토록 힘들다면, 끝나는 일은 어떠할까 생각해보세요.” 그 끝이 결국 시작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시작과 끝은 한 점에서 만나고 있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 세상의 회귀, 반복의 한계를 뜻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모든 출발의 영원한 동력을 뜻할 수 있다.
시인 화자에게 시작은 셋 중 하나로 정리된다. “말”(言)을 하는 능력과 행복 사이의 세 가지 관계로 축약된다. 첫째, 이 두 가지는 등위접속의 관계에서 별개이면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작동한다. 혹은 둘은 인과관계로 맺어질 수 있고 다만 인과의 선후가 바뀔 수 있다. 둘째, 말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거나 셋째, 행복해서 말할 수 있다. 화자가 제 이야기의 시작을 간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꺼내려는 이야기의 주제가 명료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자신의 시적 경력의 출발이 “말”하는 행위와 관계있고 또한 자신의 행복이 그것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화자에게 시인의 운명이 시작되었던 곳은 “침상”의 홑이불에 인쇄된 채색 범선들이었다. 선명한 색깔의 범선들이 불러일으키는 모험의 환상과 이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화자 내면의 “부드러운/흔들림의 감각”이 바로 시작을 이룬다. 그것은 시인 화자에게 일어난 맨 처음의 구체적 사건이면서 이후 모든 시 쓰기의 시작에서 작용하게 될 동력을 은유할 수 있다.
봄, 커튼이 펄럭여요.
미풍이 방으로 불어오면서 첫 곤충을 데려와요.
기도하는 이들의 소리처럼 웅웅대는 어느 소리.
어느 커다란 기억을
구성하는 기억들.
신호를 보내는 것이
그 유일한 업무인 등대처럼
안개 속에서, 간헐적으로 시야가 트이는, 투명의 지점들,
하지만 등댓불의 요점은 실제로 무엇인가요?
이쪽이 북(北)이에요, 이렇게 등댓불은 말해요.
난 당신의 안전한 항구예요―이런 말이 아닌 거죠.
Spring, and the curtains flutter.
Breezes enter the room, bringing the first insects.
A sound of buzzing like the sound of prayers.
Constituent
memories of a large memory.
Points of clarity in a mist, intermittently visible,
like a lighthouse whose one task
is to emit a signal.
But what really is the point of the lighthouse?
This is north, it says.
Not: I am your safe harbor. (8)
지나온 시간 전부에 해당하는 기억이 있다. 기억의 총량은 대체로 안개 속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투명하게 시야가 열리는 지점들이 있다. 큰 기억을 구성하는 소소한 기억들이 생을 지탱한다. 등대의 불빛은 사방을 동시에 그리고 계속 밝혀주지는 않는다. 그 불빛이 있어 항해자는 어둠 속에 계속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실제 요점은 “안전한 항구”가 아니라 “북”을 가리킴으로써 방향을 찾아가게 하는 역할에 있다. 시인 화자가 의존하는 작은 “기억들” 또한 “안전한” 피난처로서가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방향감각에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형으로서는 엄청 화나는 일이었을 거예요, 내가 이 방을 그와 함께 썼거든요.
내 존재에 대해 벌을 주려고, 계속 날 잠 못 들게 하느라, 그는 읽어대곤 했어요,
밤새 켜놓은 누런 불빛 옆에서 모험 이야기들을 읽어대곤 했죠.
오래전 버릇―침대 저 편에 누운 형,
마침내 수그러졌으나 자진해서 그리된 형,
두 손 위로 고개가 떨구어지고 얼굴은 몽롱해지곤 했지요―
내가 말하는 그 시기에
자신이 읽어댔던 책을 칭하여 형은
충직하고 고결한 밤이라고 했어요.
이 호칭은 형이 읽어대고 내가 잠 못 들었던 그 밤을 가리킬까요?
아니에요―그건 아주 오랜 전 어느 밤, 웬 바윗돌이 나타났고,
그 바윗돌 위에 검 한 자루가 자라났던,
어둠의 호수를 뜻했어요.
Much to his annoyance, I shared this room with my older brother.
To punish me for existing, he kept me awake, reading
adventure stories by the yellow nightlight.
The habit of long ago: my brother on his side of the bed,
subdued but voluntarily so,
his bright head bent over his hands, his face obscured―
At the time of which I’m speaking,
my brother was reading a book he called
the faithful and virtuous night.
Was this the night in which he read, in which I lay awake?
No―it was a night long ago, a lake of darkness in which
a stone appeared, and on the stone
a sword growing. (8-9)
시의 제목 “충직하고 고결한 밤”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서 왕 이야기의 제목이었음이 드러난다. 그 밤은 화자의 어린 시절의 정신을 형성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시적 응축성이 현격히 완화되면서 서사시나 설화의 그것처럼 이야기의 요소가 강화되고 있다. 그릭의 시는 쉽고 투명한 언어에 의존하는 특성이 있다. 최소한의 이야기 혹은 그 파편이 개입하여 전달성이 강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1992년의 『야생 붓꽃』과 같은 시집에서는 그런 스타일 속에서도 화자의 분산되거나 의혹에 찬 목소리에 의해 이야기가 여러 갈래도 확장되는 여지가 컸다. 여기서도 그럴 여지가 있겠으나 앞선 시집들에 비하면 목소리가 통일되어 있고 산문성이 여실해지는 듯하다. 이러한 산문적 구성에서 긴박성이 약화될 수 있지만 순탄한 흐름은 다시 시적 긴박이 살아나는 시행들과 교차를 이룬다.
내 머릿속에 여러 인상들이 들락거렸다.
곤충들이 내는 듯, 희미하게 웅웅대는 소리.
형을 관찰할 때 외에는 그와 함께 쓰는 작은 침대에 누워
천정을 쳐다보곤 했어요―방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결코 아니었죠. 그것이 내게 상기시키는 것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명백히 하늘이었지만, 더욱 고통스럽게도
흰 구름 위에 흰 여행복을 걸치고 앉아 계시는 부모님이었어요.
게다가 나 자신 역시 여행 중이었어요,
이번 경우엔 어느새
그 날 밤이 다음 날 아침으로 이어졌고
나 역시 특별한 옷을 입고 있었지요―
줄무늬 파자마였어요.
어느 봄날 하루를 맘대로 그려보세요.
어느 무해한 하루―나의 생일.
아래층 식탁에 세 개의 선물이 놓여 있죠.
첫 상자에는 이름 첫 글자를 한 데 인쇄한 손수건이 있고
둘째 상자에는 색연필이 학교 사진처럼
3열로 배열되어 있고
마지막 상자에는 『나의 첫 독자』라는 책이 담겼어요.
이모께서 인쇄된 포장지를 접었어요.
리본은 말려서 단정한 공처럼 되었지요.
형이 내게 준 것은 은색 종이에 싸인
막대 초콜릿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난 홀로였어요.
아주 어린 아이가 종일 하는 일은 아마도
관찰하고 경청하는 것일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소일거리였어요―
우리가 키우는 새들의 다양한 소리,
곤충 족속들이 부화하는 소리, 그 작은 것들이
창틀을 따라 기어 다니는 소리, 위층에서는 이모가
한 더미 옷들에 구멍을 내는 재봉질 소리,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지요―
불안한가요, 당신은 불안한가요?
하루가 끝나기를, 당신의 형이 책으로 귀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요?
충직하고 고결한, 그런 밤이 귀환하여
당신과 부모 사이의 간격을, 짧게나마,
수선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요?
이런 일은, 그렇지요, 즉각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동안에, 내 생일이 있었지요.
그러다 어쩌다가 그 빛나는 시초가
끝없이 계속되는 중간이 돼버렸어요.
Impressions came and went in my head,
a faint buzz, like the insects.
When not observing my brother, I lay in the small bed we shared
staring at the ceiling―never
my favorite part of the room. It reminded me
of what I couldn’t see, the sky obviously, but more painfully
my parents sitting on the white clouds in their white travel outfits.
And yet I too was traveling,
in this case imperceptibly
from that night to the next morning,
and I too had a special outfit:
striped pyjamas.
Picture if you will a day in spring.
A harmless day: my birthday.
Downstairs, three gifts on the breakfast table.
In one box, pressed handkerchiefs with a monogram.
In the second box, colored pencils arranged
in three rows, like a school photograph.
I the last box, a book called My First Reader.
My aunt folded the printed wrapping paper;
the ribbons were rolled into neat balls.
My brother handed me a bar of chocolate
wrapped in silver paper.
Then, suddenly, I was alone.
Perhaps the occupation of a very young child
is to observe and listen:
In that sense, everyone was occupied―
I listened to the various sounds of the birds we fed,
the tribes of insects hatching, the small ones
creeping along the windowsill, and overhead
my aunt’s sewing machine drilling
holes in a pile of dresses―
Restless, are you restless?
Are you waiting for day to end, for your brother to return to his book?
For night to return, faithful, virtuous,
repairing, briefly, the schism between
you and your parents?
This did not, of course, happen immediately.
Meanwhile, there was my birthday;
somehow the luminous outset became
the interminable middle. (9-11)
시작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형과 침대를 공유하며 지냈던 이모의 집, 하루의 끝에 밤이 찾아와 한 침대에서 형이 모험으로 가득한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어린 시절, 부모의 부재를 견뎌내야 했던 그 시간이 “커다란 기억”의 시작이다. 시작이 눈부실 수 있었던 것은 외로움, 불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덕택에, 화자는 “관찰하고 경청하는 것”을 거의 유일한 일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 그것은 형극이면서 유일한 탈출구였고 기쁨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소일거리였다.” 화자는 관찰과 경청의 대상이 되어주는 모든 사람, 관심을 집중시키는 모든 것에 에워싸인 적이 있었다. 그런 시절 이후에 생일에 대한 추억이 따라오고 그러다가 “중간”이 찾아온다. 그 중간은 지겹도록 끝없이 이어진다.
늦은 사월치고는 온화한 날씨. 솜털
구름들이 머리 위에, 사과나무 가지들 사이로 떠다녔어요.
집어든 책 『나의 첫 독자』는 겉으로 보기에
두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어요―단어를 읽을 줄 몰랐거든요.
세 번째 쪽에 개 한 마리가 등장했어요.
다섯 번째 쪽엔, 공이 한 개 있었는데―아이들 중 한 명이
가능해 보이는 높이보다 더 멀리 그걸 던져 올렸고, 그 위에
개가 앉아 하늘 속으로 떠가더니 무도회에 참석했어요.
그런 이야기 같았어요.
그 종이쪽을 다 넘겼어요. 마쳤을 때
넘기기를 다시 시작했죠, 그래서 이야기는 황도대(黃道帶)처럼
순환의 형상을 취하게 되었어요. 그게 날 어지럽게 했죠. 그 누런 공은
엉망으로 보였어요, 아이의 손에서나
개의 주둥이에서나 마찬가지로 편안해 보였어요―
내 아래에서 나를 떠받쳐주는 두 손.
두 손의 주인은 누구든 될 수 있었어요,
남자의 것일 수도, 여자의 것일 수도.
노출된 내 살갗에 떨어지는 눈물. 누구의 눈물이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우중에 밖에 나와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날은 날씨가 불안정해졌지요.
드넓은 푸름에 균열이 나타났어요,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돌연한 먹구름이
푸른 배경을 뒤덮었지요.
어디선가, 시간의 먼 후방 구석진 곳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지막 여행에 착수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갓난아이에게 애정 어린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형을 허공에 던져 올리고 있었지요.
내가 창가에 앉아 번갈아 했던 두 가지 일은
시간 경과 지켜보기와 함께 하는
나의 읽기 첫 수업, 그리고 나의
철학 및 종교학 입문이었어요.
Mild for late April. Puffy
clouds overhead, floating among the apple trees.
I picked up My First Reader, which appeared to be
a story about two children―I could not read the words.
On page three, a dog appeared.
On page five, there was a ball―one of the children
threw it higher than seemed possible, whereupon
the dog floated into the sky to join the ball.
That seemed to be the story.
I turned the pages. When I was finished
I resumed turning, so the story took on a circular shape,
like the zodiac. It made me dizzy. The yellow ball
seemed promiscuous, equally
at home in the child’s hand and the dog’s mouth―
Hands uderneath me, lifting me.
They could have been anyone’s hands,
a man’s, a woman’s.
Tears falling on my exposed skin. Whose tears?
Or were we out in the rain, waiting for the car to come?
The day had become unstable.
Fissures appeared in the broad blue, or,
more precisely, sudden black clouds
imposed themselves on the azure background.
Somewhere, in the far backward reaches of time,
my mother and father
were embarking on their last journey,
my mother fondly kissing the new baby, my father
throwing my brother into the air.
I sat by the window, alternating
my first lesson in reading with
watching time pass, my introduction to
philosophy and religion. (11-12)
창가에서 하는 일이 관찰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탐색으로 발전하여 어느 순간부터 “수업”이 진행된다. 그 수업은 주입식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주체적 “읽기”이고 “철학 및 종교학”에 대해 “나의” 질문과 답으로 파고드는 “입문”이다. 훗날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바탕이 되었을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읽기” 수업은 “시간 경과 지켜보기”와 함께하고 있다. 교실 교육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 허용되고 있다. 화자를 기억의 먼 후방에서 정서적으로 받쳐주는 “두 손”의 주인은 불명이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느꼈던 “눈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혹 빗방울이었을까? “마지막 여행”은 부모의 죽음일 것이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을 것이다. 다만 가장 멀리 찾아간 마지막 기억에서 부모는 형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분들이었다. 그 마지막 후에 오랜 “중간”의 통로를 거치는 동안 갓난아이의 피부에 닿던 눈물 혹은 빗방울은 화자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아마 잠들었을 거예요. 깨어나 보니
하늘이 바뀌었어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모든 것이 아주 신선하고 새로워 졌지요―
난 계속 지켜보았어요,
다른 사물, 아마도 부드러운 장난감에 의해
곧 대체될
한 사물, 그 누런 공과 그 개가
광적으로 재회하는 것을―
그러다 갑자기 저녁이 찾아왔어요.
집에 왔다고 외쳐대는
형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얼마나 나이 들어 보이던지, 아침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어요.
형이 우산대 옆에 책을 놓아두고
세수하러 갔지요.
교복의 소맷동이
무릎 아래에 달랑거렸어요.
한 작은 아이에게
지속적인 어떤 것이 멈췄을 때
그게 얼마나 충격적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Perhaps I slept. When I woke
the sky had changed. A light rain was falling,
making everything very fresh and new―
I continued staring
at the dog’s frantic reunions
with the yellow ball, an object
soon to be replaced
by another object, perhaps a soft toy―
And then suddenly evening had come.
I heard my brother’s voice
calling to say he was home.
How old he seemed, older than this morning.
He set his books beside the umbrella stand
and went to wash his face.
The cuffs of his school uniform
dangled below his knees.
You have no idea how shocking it is
to a small child when
something continuous stops. (12-13)
하늘은 흐렸다 맑아진다. 한때는 먹구름 가득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아주 신선하고 새로워 졌지요”라고 말할 수 있다. 상상력을 키워주고 그로써 어린 화자를 달래준 것은 “누런 공”과 “개”의 이야기이다. (글을 터득하기 전부터) 읽고 상상하고 다시 읽고 또 상상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취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만 그때까지 이야기 속의 두 주체는 “광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그러다가 형이 갑자기 성숙해진다. 함께 속해 있던 어린 아이의 범주를 한순간 벗어나버린다. 가장 가까이 든든했던 “지속적인 어떤 것”이 사라졌다. 이것마저 결국 감내해야했지만 그것이 일으킨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번 경우에는, 드릴 소리 같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재봉실의 소리들―
사라졌어요. 사방에 정적이 깔렸어요.
그러고 나서, 그 정적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그러고 나서, 우린 모두 함께였어요, 이모와 형까지.
The sounds, in this case, of the sewing room,
like a drill, but very far away―
Vanished. Silence was everywhere.
And then, in the silence, footsteps.
And then we were all together, my aunt and my brother. (13)
소리와 정적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어린 화자가 “지속적인 어떤 것”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형의 갑작스런 성숙이 일으키는 충격, 항상 듣던 이모의 재봉질 소리마저 멀리 사라지는 정적, 그리고 다시 세 가족의 시끌벅적한 재회, 이런 급속한 흐름이 취학 전 화자의 의식을 날카롭게 재현한다.
그러고 나서 찻상이 차려졌어요.
내 자리에는 한 조각 생강 케이크가 놓였고
그 조각 한가운데엔
촛불이 하나 불붙여지길 기다리고 있었죠.
참 말이 없네, 이모가 말했죠.
사실이었어요―
소리들이 나오는 곳은 내 입이 아니었던 거죠. 그 소리들은,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에서, 아마, 정확성이 더 떨어지는
무언가로, 표현되었죠, 아마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들이 여전히 내게 소리들인 듯 여겨졌어요.
Then tea was set out.
At my place, a slice of ginger cake
and at the center of the slice,
one candle, to be lit later.
How quiet you are, my aunt said.
It was true―
sounds weren’t coming out of my mouth. And yet
they were in my head, expressed, possibly,
as something less exact, thought perhaps,
though at the time they still seemed like sounds to me. (13)
소리의 출처는 입이 아니라 머릿속이다.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지만 속으로 “아마” 생각이었을 것들이 소리처럼 발화되고 있다. 머릿속에서 “정확성이 더 떨어지는” 어떤 것이 표현되고 있다. 시인 화자가 가게 되는 인생길은 머릿속에 있는 그것을 말로 치환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뭔가가 있었어요.
아니면,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아무것도 없음은
이미 숱한 질문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어요,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숱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휘돌아요. 그 질문들은 어떤 방식으론가,
행성들이 그러하듯, 조직화되는 속성을 지녔어요―
Something was there where there had been nothing.
Or should I say, nothing was there
but it had been defiled by questions―
Questions circled my head; they had a quality
of being organized in some way, like planets― (14)
“아무것도 없었던 곳”은 “where there had been nothing”을 번역한 것이다. 대과거 시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화자의 머릿속에 대한 이야기다. 자아가 영글지 못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고 심한 박탈감이나 허무를 뜻할 수 있다. 그렇듯 어린 소녀의 텅 빈 머릿속에 불명료한 어떤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뭔가 있었어요”는 과거 시제여서 대과거 이후의 사건을 이룬다. “뭔가” 이제껏 아무것도 없는 곳에 생겨났다. 그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 화자는 끝임 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아무 것도 없음,” 결핍과 의혹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화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자아는 또한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질문들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론가” 조직화되는 속성을 지닌다.
밖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죠. 정녕 이 밤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보존하는 어느 화학 물질처럼
별이 뒤덮고 달빛이 떨어지던 그 상실의 밤이었을까요?
이모가 촛불을 켰어요.
어둠이 온 땅을 휩쓸었고
바다에서는 밤이 떠내려갔어요,
나무토막에 묶여―
말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내 생각으론, 잘 가, 그랬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선가
그 말의 뜻은 작별이었으니까요―
글쎄,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던 거죠.
Outside, night was falling. Was this
that ost night, star-covered, moonlight-spattered,
like some chemical preserving
everything immersed in it?
My aunt had lit the candle.
Darkness overswept the land
and on the sea the night floated
strapped to a slab of wood―
If I could speak, what would I have said?
I think I would have said
goodbye, because in some sense
it was goodbye―
Well, what could I do? I wasn’t
a baby anymore. (14)
어린 시절 어느 생일에 대한 기억이 전개되고 있다. 이 생일에 켜진 촛불 앞에서 화자는 누군가 혹은 무엇엔가 “잘 가”라고 작별을 고한다. 아이에게 소환되는 “그 상실의 밤”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보존하는” 힘을 지녔다. 그 밤은 부모와 함께여서 별빛과 달빛이 온 세상에 비추고 있다. 하지만 그 밤이 지나면 헤어져 다시 보지 못하는 탓에 “상실”의 고통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 밤은 이제껏 어린 아이가 의지해온 “충직하고 고결한” 것이었지만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작별이었으니까요”는 영시 원문에서 동사 “was”가 기울임체로 강조되고 있다.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자신은 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다는, 단절을 확실히 하고 있다.
나는 어둠이 위안을 주는 걸 알았어요.
베갯잇 위에 항해하는 푸른 빛 노란 빛
범선들을, 희미하게,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나에게는 형뿐이었어요.
우린 침상에 누워, 가장 깊은 친밀을
함께 숨 쉬었지요.
인간은 두 부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있고 뒤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내게 떠올랐어요.
아니 당신이라면 아마, 계속 이동하려는 자들과
노상에서 멈추려는 자들로 나뉜다,
불타는 칼에 의해 나뉜 듯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형이 내 손을 잡았어요.
그마저 머지않아 떠내려가겠지요,
그게 상상적인 것이 됨으로써, 형 마음속에
어쩌면 살아남게 될지라도 그럴 거예요―
마침내 시작되었다면 누군들 어찌 멈추겠어요?
난 그냥 기다릴 수 있다고 여겨요, 방해받게 되는 걸
내 부모 생전에는 품이 넓은 한 그루 나무 옆에서 그러했듯이―
이를테면, 바지선이, 산과 산 사이를
마지막으로 지나가게 되겠지요.
내가 이어서 하게 될 어떤 일, 사람들이 말하는,
잠들게 되는 것과 같은 어떤 일.
I found the darkness comforting.
I could see, dimly, the blue and yellow
sailboats on the pillowcase.
I was alone with my brother;
we lay in the dark, breathing together,
the deepest intimacy.
It had occurred to me that all human beings are divided
into those who wish to move forward
and those who wish to go back
Or you could say, those who wish to keep moving
and those who want to be stopped in their tracks
as by the blazing sword.
My brother took my hand.
Soon it too would be floating away
though perhaps, in my brother’s mind,
it would survive by becoming imaginary―
Having finally begun, how does one stop?
I suppose I can simply wait to be interrupted
as in my parents’ case by a large tree―
the barge, so to speak, will have passed
for the last time between the mountains.
Something, they say, like falling asleep,
which I proceeded to do. (14-15)
성숙은 어둠을 껴안는 것인지 모른다. 성장한다는 것은 어둠과 친해지는 것을 뜻할 수 있다. 화자에게 어둠은 “위안을 주는” 힘을 지닌다. 화자는 이제 모든 사람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분화에서 정체성이 굳어진다. 그이는 앞으로 가는 자와 뒤로 가는 자를 구분하는 순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고 있다. 아마도 뒤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이는 뒤로 향하면서 여전히 앞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토록 의지하던 것에 계속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고 있다. 부모는 떠났고 형도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서두르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얼핏 미성숙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준엄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느긋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취한다. 부모가 살아계셨던 때도 소녀는 지금처럼 열렬한 관찰자였다. 언덕에 올라 품이 넓은 나무 옆에 앉는다. 거기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멀리 떠가는 바지선을 구경한다. 산과 산 사이로 멀어져가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한없이 누운 듯 잠든 듯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다 현실 속의 누군가 혹은 무엇이 자신을 찾아와 방해를 하게 될 것이다. 먼저 나서지 않고 그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 있다. 이완, 여유, 자유, 몽상의 시간을 누리려고 한다. 시인 화자는 “난 그냥 기다릴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버릇이 하나의 능력이라는 자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것을 계속 “이어서 하게 될 어떤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화자가 평생을 함께할 습관으로서 글 쓰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잠들게 되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이기도 해서 누군가 제발 그만 일어나라고 말하게 될 어떤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늦춤의 태도가 글쓰기와 같은 창조적 과정으로 발전하는 것은 향후의 일일 것이다. 화자에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먼 곳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아마도 과거를) 가슴에 품는 독특한 방식을 뜻한다.
다음날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모가 너무나 기뻐했지요―
내 행복이 그녀에게
아예 넘어가버린 듯했어요,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행복이
더 많이 필요했지요, 양육할 아이가 둘이나 되었으니까요.
난 생각에 잠기는 짓에 만족했어요.
색연필을 가지고 놀면서 여러 날을 보냈지요.
(어둔 색들이 곧 바닥나버렸어요)
그렇지만 내가 보았던 것은, 이모에게 말했던 대로,
세상에 대한 사실적 설명이기보다
내 자신의 공허를 뚫고 지나간 뒤에 발생하는
그 변형의 환상에 더 가까웠지요.
봄 세상 같은 어떤 것이라고, 난 말했어요.
세상에 빠져 있지 않을 때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어요,
이를 위해 이모가 내 요청에 따라
플라타너스 나뭇가지를 들고
자세를 취했어요.
내 침묵의 수수께끼에 대해 말하자면―
영혼의 퇴행에 의해서보다는 그 귀환에 의해서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던 거죠, 왜냐하면
영혼이 빈손으로 귀환했으니까요―
이 영혼, 그게 얼마나 깊은지,
백화점에서 길을 잃고
엄마를 찾는 아이 같았어요―
어쩌면 영혼은
몇 분가량만 심저를 탐색할 수 있는,
탱크의 공기가 딱 그만큼만 주어진 잠수부 같은 거예요―
그 후엔 폐가 그를 돌려보내는 거죠.
하지만 난 확신했어요, 폐에 저항하는 뭔가,
아마도 죽음에 대한 동경 같은 어떤 것이 있다고―
(난 영혼이라는 단어를 한 타협으로서 사용하지요)
The next day, I could speak again.
My aunt was overjoyed―
it seemed my happiness had been passed on to her, but then
she needed it more, she had two children to raise.
I was content with my brooding.
I spent my days with the colored pencils
(I soon used up the darker colors)
though what I saw, as I told my aunt,
was less a factual account of the world
than a vision of its transformation
subsequent to passage through the void of myself.
Something, I said, like the world in spring.
When not preoccupied with the world
I drew pictures of my mother
for which my aunt posed,
holding, at my request,
a twig from a sycamore.
As to the mystery of my silence:
I remained puzzled
less by my soul’s retreat than
by it return, since it returned empty-handed―
How deep it goes, this soul,
like a child in a department store,
seeking its mother―
Perhaps it is like a diver
with only enough air in his tank
to explore the depths for a few minutes or so―
then the lungs send him back.
But something, I was sure, opposed the lungs,
possibly a death wish―
(I use the word soul as a compromise). (15-17)
화자에게는 죽음을 지향하는 욕구가 있다. 폐는 공기의 결핍을 감지하는 순간 몸에게 물 위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화자는 그 폐의 명령에 저항하면서 더 깊이 가라앉으려는 충동 속에 있다. 사람들에게 영혼은 존재의 핵심이지만 화자의 영혼은 죽음에 이끌리고 있다. “타협”의 영혼은 허용된 산소로는 그 심저에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죽음의 유혹에 이끌리면서 또한 저항하고 있다. 양쪽의 경계에 처하여 그 영혼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타협”을 이루고 있다. 영혼의 심저로 내려가지만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지 못하고 돌아올 때는 그저 빈손이다. 내려가는 퇴행보다 올라오는 귀환이 더 아프고 위험할 수 있다.
그릭의 「야생 붓꽃」(“The Wild Iris”)을 위시한 여러 시들은 죽었다 살아나는, 땅속에 내려갔다 땅위로 올라오는, 목소리를 잃었다 되찾는, 어느 반복되는 고통을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봄 세상 같은 어떤 것”은 엘리엇(T. S. Eliot)의 “가장 잔인한 달” 4월처럼 삶 속의 죽음이나 죽음 속의 삶을 뜻할 수 있다. 실제의 세상은 시인 화자의 텅 빈 영혼을 뚫고 지나면서 “변형”을 겪게 된다. 이 “변형”을 겪으면서 어린 아이는 “소년”이 되고 다시 “어른”이 된다.
그렇지요, 어떤 의미에선, 난 빈손은 아니었어요―
내겐 색연필이 있었던 거죠.
또 다른 의미에선, 그게 나의 요점인데―
난 이미 대용품을 수락하고 있었어요.
밝은 색들, 그러니까 남겨진 색들을 사용하는 건
힘들었어요, 이모는 물론 그런 색들을 선호했지만―
그녀는, 모든 어린이는 밝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갔어요―나는
형처럼 소년이 되었고, 후에
어른이 되었어요.
여기서 당신을 놓아주려 해요. 완벽한 끝내기는
없다고 여겨지는 때가 왔어요.
사실은 무수한 끝내기들이 존재하지요.
또는 아마도, 누구든 일단 시작하면,
오직 끝내기들만 존재하게 되지요.
Of course, in a certain sense I was not empty-handed:
I had my colored pencils.
In another sense, that is my point:
I had accepted substitutes.
It was challenging to use the bright colors,
the ones left, though my aunt preferred them of course―
she thought all children should be lighthearted.
And so time passed: I became
a boy like my brother, later
a man.
I think here I will leave you. It has come to seem
there is no perfect ending.
Indeed, there are infinite endings.
Or perhaps, once one begins,
there are only endings. (17)
앞선 시행들까지 화자는 “당신”이라는 청자를 앞에 잡아두고 어린 시절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제 갑자기 “소년”을 지나 “어른”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형처럼 “소년”이 되었다고 고백하기 전까지 화자는 어린 여아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시인이 여성임을 고려하여 화자 또한 그러리라고 쉽게 가정하였고 그래서 “elder brother”는 형이 아닌 오빠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즈음에서 화자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시 전체를 여아가 아닌 남아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릭이 시인과 시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시는 시인의 자전적 고백이 아니고 그 목소리는 그런 형식으로 다뤄진 페르소나일 따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지만 어린 여아가 세상과의 동행에서 결국 “소년 같은 어떤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여지는 남겨두고 싶다.)
시 「충직하고 고결한 밤」은 시작에 관한 상념으로 출발하여 끝내기에 관한 생각으로 마무리된다. “완벽한 끝내기”는 없다. “완벽한” 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을 상정한다. 인과관계의 개연성에 따라 맺어지는 끝은 그 이후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정도로 앞선 일들이 모두 자체적으로 해명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에게 인생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갈 어떤 것으로 예정될 수 없다. 그래서 끝은 어디로든 향할 수 있고 무수하게 달라질 수 있다. 대의적 가치나 목적이 없이 그냥 진행되는 일에는 과정을 받쳐주고 이끌어가는 주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과정이 그냥 과정일 뿐이라면 시작에게는 주어지는 끝만 남게 된다. 끝은 추구의 필연적 성취로서 다가오지 않고 어느 순간 닥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소년을 지나 어른이 된 화자는 현재 “무수한 끝내기들”만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에게는 “완전한” 자아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심연이 너무 깊어 도달할 수 없고 그 깊이에서 항상 죽음과 연계되어 위험하다. 그렇게 완전하지 않고 위험한 자아 속에서 화자는 그 자아를 대체할 무엇을, 그 깊이까지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를 그려낼 수 있는 “색연필”을, 자신에게 허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주로 어둔 색깔이 동원되고 있고 밝은 색들은 남겨진다. 화자가 취하는 입지는 “완벽한” 혹은 유일한 끝내기와 “무수한” 끝내기들 사이에 있는 듯하다. 그이는 현재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중간에 살고 있다. 현실을 압도하는 중간은 끝이 없는 듯 지루하게 늘어지고 있다. 화자에게 시작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외적 현실과 동떨어진 자아의 심연에서 불분명하지만 강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소년을 지나 성인이 된 마당에 그 목소리가 덜 명료해진 듯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이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냥 앞으로 갈수만은 없다고 저항하고 있기도 하다. 뒤로 돌아가 시작에 이를수록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투명해질 것이다. 최대한 관찰과 경청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기다리면서, 현실이 개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자리에 있으려한다. 매 순간을 새롭게 태어나려는 시도에서 화자는 중간 과정이 요구하는 순응에 저항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순응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그이의 분투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실현할 만큼 용감하지 않고 “타협”과 “대체물”을 통해 치러지지만 여전히 수고스럽고 고통스럽다. “완벽”과 “무수” 사이에서 조용하고 처연하게 모종의 끝내기를 찾아가고 있다.
III.
시, 시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외적 규정에 의해 억압될 수 없는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시를, 누군가를 대함으로써 나 또한 그렇게 열릴 가능성이 허용되는 게 아닐까. 시 한 편을 통해서 시인 전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생을 담고 있는 「충직하고 고결한 밤」에는 그릭이라는 시인의 특수성이 은연히 살아있다. 그것을 읽어주는 것이 번역자와 독자가 시인에게 다가가는 바른 길일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을 다 밝혀주지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엮어주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 그 몸짓, 손짓, 숨짓으로 그이에게 가장 필수적인 뭔가를 느끼게 해준다. 꼼꼼한 읽기는 그럴 수 있고 그러해야 할 듯하다.
그릭의 시는 한국 서정시에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릭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보다 개인적 일상과 기억을 시의 주된 제재로서 다룬다. 오늘날 미국문학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고통과 이민자의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문학에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도 상존하고 있다. 이슈를 점하는 쟁쟁한 작가들 사이에서 그릭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이가 상대적으로 탈미국적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릭이 미국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미국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의 독자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판단되는 것은 그이가 지역의 문제보다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는 내면의 문제를 다루면서 서정성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정성, 서정 시인으로 치자면 그만한 수준의 시인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미국 내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여 쉽게 읽히고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뛰어난 시인들이 상당수일 것 같다. 그래서 서정적 호소력 외에 그릭의 매력을 더 찾아보자면 그이는 사적(私的)이면서 동시에 공적(公的)이다. 서정성이 기반하고 있는 자전적 기억은 한 개체의 시공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모두 직면해온 삶의 이면을 헤집고 있다. 또한 자신의 문제를 진솔하게 투명하고 쉬운 언어로 표현하는 듯한데 그것이 극화되고 무대 위에 놓이는 방식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화하고 있다.
서정시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언어에서 환영받는다. 이것은 자칫 시인의 토설, 유아론적 몰입,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내면의 혼돈으로 흐를 수 있다. 혹은 빤한 지식이나 환원주의적 통찰에 흐를 수 있다. 그릭의 시는 감정에 호소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있지 않다. 그릭의 시에 표현된 고통은 철저히 ‘예술 감정’으로서 자아의 내면에서 분출된 것이 아니라 오래 사유되고 그 한계적 의미나 가치가 힘들게 만들어져 나온, 그리하여 그에 등가적인 언어의 형식을 찾은 예술적 구성물이다. 그이가 택하고 있는 자아의 개념은 “부정”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음’(nothing)으로 그것은 ‘아무도 아님’(nobody)의 처지에 있다. 그릭은 자아를 표현하는 전통적 서정 시인이지만 그 자아의 중심을 없애고 그 부재에서 목소리를 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면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들을 시 속에 반영하면서도, 서정시의 목소리에 혐오와 저항을 드러내는 미국 언어시인들과 다르게, 이론적이지 않고 투명하면서 서정적인 울림의 언어를 구사한다.
왜 그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가? 정치적 맥락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로서는 그릭의 시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서정시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엮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장 사적인 시에도 공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 있고 가장 공적인 시에도 사적 함축이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시인에 따라 의식적으로 치중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릭의 경우에는 양자가 모두 정교하게 접근되고 있다. 그릭의 시를 읽으면서, 한국의 서정 시인들은, 개인적 서정이 공적 영역의 어떤 것들에 의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지극한 눈길을 주어야할 것 같다.
인용문헌
Louise Glück. Faithful and Virtuous Night.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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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담양 출생. 『광주일보』(1981)와 『서정시학』(2004) 시 부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허공에 줄을 긋다』 『딱따구리에게는 두통이 없다』 『집밥의 왕자』가 있고 연구서로 『1990년대 미국시의 경향』 『욕망의 고삐를 늦추다』가 있음. 현 대진대 영문과 교수.
첫댓글 양선생님 덕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의 시를 실시간으로 접하는 시간 가집니다. 감사합니당